우리가 사는 이유
중국의 태평시대를 나타내는 ‘격양가(擊壤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일출이작 일입이식(日出而作 日入而息 /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경전이식 착정이음(耕田而食 鑿井而飮 /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함포고복 고복격양 (含哺鼓腹,鼓腹擊壤 / 내가 배부르고 즐거운데), 제력하유우아재(帝力何有于我哉 /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요(堯) 임금 때 한 노인이 배부른 풍요로움에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먹고 사는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왜냐면 사실 먹는 즐거움은 인생의 즐거움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살기 위해’ 보다는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언젠가 이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 삶에는 많은 고금의 명언(?)들이 있다. 일테면 데칼트의 ‘나는 사고(思考)한다, 고로 존재 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 이것이 문제다‘ 또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등등... 헌데, 순서대로 따져보면, 내가 살아있지 않는데 누가 뭘 사고한다는 말인가? 이는 거꾸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할 수 있다‘도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햄릿도 그렇다.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지,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것인지? 굳이 따지면 우유부단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6천 년 전에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성경 말씀을 그냥 믿는다면, 닭도 조물주가 만들어 이브의 자식들인 카인과 아벨처럼 그 후 계란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세상 만물이 다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면, 이를 놓고 옳다 그르다를 따지고 논리를 갖다 붙이는 것은 우견(愚見)이다. 어찌 생각하면 호사가들의 고급의 말장난이라...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별로 시비(?)를 건 적이 없다. 그냥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다만 여기에서 앞서 말한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에 관한 문제는 약간 관점이 다르다. 왜냐면 철학적이거나 인류 . 종교적인 의문 이전에 이는 우리의 실생활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건강관리학을 전공하는 류현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일한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거리에 나서면 먹을거리가 지천이라 이는 살만해졌다는 방증이기에, 요즘은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소비자들은 맛은 기본적으로 하고 보기에도 좋고 안전한 먹거리를 찾는다고 한다. 이는 생리적 욕구에서 안전적 욕구로 나아간다는 매슬로의 욕구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에 의하면 당연한 결과라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요즘은 먹는 것에서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시대이다. 근래 현대인은 너무 많이 먹어서 아프다. 그래서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다. 예년의 국민건강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3명 중 1명은 비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때문인지 고혈압, 고지혈증, 심장병, 당뇨, 암 등 각종 성인질환이 급증한다고 한다. WHO에서 ‘성인병은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규정한 지 오래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치료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현재 3조원을 넘어섰고 매년 증가추세라고 했다. 어쨌거나....잘 먹고 잘 살려면 우선 세상살이가 편해야 한다.
이제 선거가 다가온다. 총선에서 어느 당의 누가 당선이 되든, 정치의 근본은 맹자의 말처럼 ‘정재양민(政在養民/정치란 백성을 편히 잘 보살핌)에 있다. 즉 경제와 나라가 튼튼해서 국민이 ‘마음 편히,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산다면 뭐가 더 이상 필요할까. 원컨대 이러한 ‘무위(無爲)의 다스림’으로 대한민국에 최고의 정치가 이루어지고, 어느 휴일 오후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시민들과 함께 시장에서 만나 막걸리 한잔 나누며 격의 없이 파안대소(破顔大笑) 하는 날이 많아진다면, 그게 바로 태평성대고 우리가 바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