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慢性)
이 월란
뿌리는 늘 가늠되고 있다
줄기?곧음이나 꽃받침의 싱싱함으로도 혹은 열매의 굵기로도
방금 세안을 마친 계집아이의 낯짝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열매가
허공을 주렁주렁 점령하고 있을 때
우린 땅 아래 감추인 토양의 점조직도 올곧은 뿌리의 뻗침으로
충실히 점거당하고 있으리라 쉽게 단정해 버리지 않던가
밑동이 삭아 없어진지 오래라고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할 것인가
순진무구한 동식물의 줄기들은 언감생심 흉내조차 내지 못할 일이거늘
호모사피엔스의 줄기에선 종종, 혹은 자주, 혹은 만성으로도 일어나는 것을
기적도 잦으면 일상이 되어버리는 법
아랫도리가 마비되어 버린 몸관에서도 꽃은 피고 열매가 맺힌다
밑동이 잘려나가고 아연한 세상 속 통제된 구역에서도
정충과 밑씨는 개헤엄을 쳐서라도 물마루를 올라
무수한 길을 내고 또 내어 뇌관 촘촘히 박힌 열매를 맺고
정받이 빠치는 씨방안에서 영장(靈長)의 길을 또박또박 걷고 있다면
대체 보이지 않는 속씨식물의 헛물관는 어떻게 연명을 하고 있었을까
어디에 기생을 하며 누구의 통로 안에서 더부살이를 해 온 것인가
인생은 뿌리 없이도 응고되지 않는 물관 줄기로 열매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짧디 짧은 것일 뿐이라고
뿌리가 가늠되지 않을만큼, 들통나지 않을만큼 길지 않은 것 뿐이라고
행보석 위에서 꼼지락대던 발끝이 간지러웠던 건
행여 명주실같은 뿔거지라도 돋으려고 한 연유에서일까
2007-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