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이월란(09/11/19)
희망과 절망의 유전자가 다투어 나를 붕붕 띄우며 놀던
양수의 밤을 헤엄쳐 별처럼 깜빡깜빡
시계 초침 소리로 뜨던 엄마의 맥박
그 별빛의 잔상으로 흐릿하게 밝아오던 유년의 새벽도 지나고
허기로 날샌 아침의 햇발 아래
더욱 선명해지던 아픈 진실은 양지보다 음지의 소름
나를 왜 잉태하셨나요, 발길질로 태동을 시작하던 태아처럼
쓸모없는 나를 왜 만드셨나요, 헛배 부른 세상 속 태아처럼
신에게 대들긴 너무 경박한 시각
먼 길을 떠나기엔 너무 늦고 밤기차를 타기엔 너무 이른 시각
당신에게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고
그리움을 시작하기엔 남은 세월이 너무 버거운 시각
이사를 가기엔 너무 늦고 눌러 앉기엔
이미 짐을 꾸리기 시작한 마음이 나를 떠나기 시작하는 시각
빳빳이 들린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시각
순간의 기쁨에 동참하던 잡다한 신들의 목을 치고
나의 몰락을 즐기던 유일한 신의 발목을 잡고 싶은 시각
정오의 어린 햇살도 스러진지 오래인
따뜻한 피가 도는 붉은 노을을 비문처럼 새겨두기 위해
두 눈 말갛게 비워두어도 좋을 시각
가슴이 하는 말이 더 잘 들리기 시작하는 시각
어정쩡한 각도에서 지는 해도 선명히 뒤돌아보이는 갱년의 언덕
아직은 남아 있는, 지는 해의 뜨거운 잔열 아래
아등바등 기어오르던 시야의 벽을 이젠 허물어도 좋을 시각
세 번째의 계절처럼 마지막 계절을 헤아려
난처하게도, 내 안에 끙 갇혀 있어도 좋을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