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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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미주문학> 2019 여름호

現代詩로 보는 韓國人抒情(1)

(서정 몇 점) 최 선 호(시인, 문학평론가, 미주감신대교수)

 

 

 

강언덕 본명: 강병희, 1996년 월간 <한국시> 신인상 등단, 재미시인. 시집 <허공에 머문 순간>, <낮에도 뵈는 별>, <길에서 길을 묻네>, <빈 바다가 불타고 있다> , 영랑문학상 본상, 미주펜문학상, 재미시인상 수상.

 

시인은 무엇보다도 감수성이 예민해야 한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함에 맞닥뜨린 귀중한 모멘트의 하나인 감각은 인식의 가장 처음이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논리적인 인식이 필요하게 되고, 그것들의 융화로 객관적 인식이 완전에 보다 가깝게 이르게 된다.

詩作을 든든히 받쳐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인의 경험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그 경험을 시로 옮기는 일은 금물이다. 그 경험을 시인의 심령 속에서 앙금이 괼 때까지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 속에서 우러나는 시의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옹달샘에 고인 물의 가장 맑은 부분을 조롱박으로 살짝 떠올리듯이 그렇게 앙금의 진실을 떠내야 좋은 詩心이 자리를 잡게 된다.

시는 감동을 모태로 태어난다.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기 이전에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동으로부터의 발산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펜 끝과 같은 감성은 현실로 부터 받아들이는 감각의 인식이며, 현실적인 모순과 진실을 직감하고 피력해 내는 의식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감성에 치우치다 보면 세기말의 탐미주의나 관능주의의 노예로 전락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는 거의가 생각하는 시로서의 구실에 충실하다. 생각하는 시란 노래하는 시와 대립되는 말인데, 이것은 시인의 바탕에 사상과 비평정신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정서라든가 주정적인 것이 그 시인의 사상과 분리되는 일 없이 일체가 될 때라야만 뛰어난 시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인데, 이는 엘리어트가 내세운 말이다.

 

비옥한 땅에 떨어진

 

작은 씨앗이어라

 

 

광풍에 찢기어

 

마디마디 쓰린 마음

 

밤새워 앓고 난 후

 

창 넘어 찾아든

 

새 하늘이어라

 

 

 

다시 열린 너와 나의

 

조촐한 새 길이어라

 

가난한 내 가슴에

 

가장 값진 것 하나

 

찾으실 제

 

마음으로 씻고 손으로 닦아

 

후회 없이 드릴

 

마지막 선물이어라

- 강언덕 <용서> 전문

 

이 시에서의 핵심은 용서이다. 용서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는 자가 한 몸이 되듯, 쌍방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참된 용서의 경지이다. 용서 이후에는 양자 사이의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맑게 갠 하늘이다. 그러므로 구름 낀 하늘이 아니라 새 하늘이다. 가장 좋은 것이므로 후회 없이 드릴/마지막 선물이다. 강언덕 시인은 용서란 씻고 닦을 수 있는 관념을 물체로 비유한다. 새 하늘, 새 길, 선물이 시인의 시심을 여는 용서의 비결이다. 강 시인은 구도자의 마음으로 이 귀중한 것들을 시행에 올려놓았다. 이런 사물이 시정의 승화를 이루는 强度에 대한 느낌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새벽마다 좌선시간

 

내 머리 속 청소를 한다

 

털고 닦고 치워 보지만

 

돌아서면 생각의 먼지들

 

잘도 숨어 있다 얼굴 내민다

 

 

내 머리 속의 먼지들

 

너희는 약자가 아니다

 

차라리 내 삶의 그림자다

 

너희를 꼭 치워야 될

 

적으로 알았을 땐

 

세상 일 답답하고 힘들더니

 

나 또한 우주의 먼지로 남아

 

너와 함께 할 친구라 생각하니

 

이제는 날아다닐 빈 하늘 뵈는구나

- 강언덕 <청소> 전문

 

강언덕 시인은 佛者로서의 시인이다. 그러므로 먼지를 으로 알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佛心으로 이해의 경지를 터득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의 心中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세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심령에는 날아다닐 빈 하늘이 뵈는구나의 노래가 거침없이 나온다. 그는 이미 먼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지가 되긴 되었지만 다시 인격체로 환생하는 길이 시인에겐 있다. 먼지를 적으로 알기보다는 친구로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강 시인에게는 이토록 자연스러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는 詩心으로만 이해되는 경지가 아닐까? 그렇다, 강 시인의 가슴에는 詩心佛心이 공존해 있기 때문이다.

 

 

고영준 재미시인, : 永資 시인, 문학평론가, 미주 중앙일보 시 부문 입상, 월간 창조문예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시집 <고향이 있었다>, <당부> , 미주한인기독문협 회장, 이사장 역임, 현재 편집고문.

 

오월의 여인

 

무지개 꽃송이

 

 

한 겨울 가뭄에도

 

핏빛 꽃으로 피는 숙명

 

튼튼한 줄기 연한 가지

 

끈질긴 발

 

그 곁에 굼벵이 한 마리

 

그리고 가시

 

굼벵이 한 마리 찌르지 않는

 

가시

 

꽃을 따도

 

가지를 꺾어도

 

잎을 따버려도

 

가시는

 

내 피 묻은 가시는

 

그냥 거기 있다

 

- 고영준 <장미> 전문

 

 

장미를 사물로 보았다-1연과 2

오월의 여인, 무지개 꽃송이- 장미를 아름다운 사물로 형상화 했다.-2

줄기찬 생명력과 질긴 생명체로 보았다.-2

굼벵이를 장미를 괴롭히는 대상으로 보았다.-3

 

굼벵이와 가시는 서로 다른 물상이다.

가시는 장미의 보호물이지만 굼벵이는 해로운 생명체이다.-3

 

그래도 가시는 굼벵이를 찌르지 않는다.-그리스도의 무저항 정신, 사랑.

장미를 인간으로 보았다.-4연은-3년의 굼벵이 한 마리 찌르지

않는/가시를 보충 설명하고 있음.

 

이상과 같이 분석했을 때, 이 시의 통일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결국 내 피 묻은 가시는/그냥 거기 있다/ 고 했으니, 피 묻은 가시는 괴로움의 대상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무능력해서 일까, 사랑하기 때문에서 일까? 오월의 여인은 굼벵이를 더럽다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가시로 대응도 하지 않는다.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 대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무저항 정신과 일맥상통함을 보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좀 더 구체적이고 감동적인 텃취가 요망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으로 왔는가?

 

짜증 한 번 내는 일 없이 세상을 살고

 

투정 한 번 없이 사랑을 하는

 

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이 되랴

 

 

 

사흘 굶어도 말없이 웃어버리고

 

태양을 향하여 여문 꿈 꺾어버리고

 

체념의 미소로

 

나의 손을 잡는 너를 위하여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으랴

 

 

 

너는 나에게 한없는 상징

 

나의 무덤에서라도 피어날 꽃이여

 

나는 너에게서

 

무엇이 되랴

 

- 고영준 <꽃과 나> 전문

 

 

시 전체에 너와 내가 뚜렷이 존재한다. 시에서 주는 의미는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이 되어야겠는데 무엇이 되랴 고 묻는 물음이 거의 전체를 채우고 있다. 여기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나는 시인이다.

1, 2, 3연 모두가 나는 무엇이 되랴는 반복을 이루고 있다. 너는 인격체(1), 초능력자(2), 상징체(3)로 미래에 다가올 대상이지만 나는 과연 너에게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소망 또는 한탄조의 아쉬움이 3회나 반복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믿음이 엿보이는 부분으로 보이는 것이다.

22행에 태양을 향하여 여문 꿈 꺾어버리고는 얼른 납득이 어려운 부분으로 여겨진다.

 

김남조(金南祚, 1927- ) 시집 <목숨 1951>으로 등단. 초기에는 주로 정열을 노래했으나, 점차 기독교적 사상과 윤리를 바탕으로 한 시를 쓰게 되었다. 시집으로 <나아드의 香油 1955>, <나무와 바람 1958>, <情念1959>, <풍림(楓林)의 음악 1963>, <김남조 시집 1967>, <雪日, 1971>, <영혼과 빵 1973>, <사랑의 草書, 1974>, <김남조 始作, 동행, 1976>, <시로 쓴 김대건 신부, 1983>, <너를 위하여, 1985>, <저무는 날에, 1985> 등이 있다. 경북 대구 출생, 서울사대 졸업 후 마산고교, 이화여고 교사, 성균관대 강사, 숙명여대 교수 역임.

 

1

 

임의 말씀 절반은

맑으신 웃음

그 웃음의 절반은

하느님 거 같으셨네

 

임을 모르고 내가 살았더면

아무 하늘도 안 보였으리

 

2

 

그리움이란

내 한 몸

물감이 찍히는 병

그 한번 번갯불이 스쳐간 후로

커다란 가슴에

나는

죽도록 머리 기대고 산다.

 

3

 

임을 안 첫 계절은

노래에서 오고

그래 만날 시만 쓰더니

 

그 다음 또 한 철은

기도에서 오고

그래 만날 손 씻는 마음

 

어제와 오늘은 말도 잠자고

눈 가득히

귀 가득히

빛만 갖고 있다.

- 김남조 <> 전문

 

살아 갈수록 나는 말이 줄어든다. 말의 어설픔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탓일까.

또한 마지막으로 남겨진 말은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도 있다. 水量이 적은 우물이 되더라도 참으로 나 나름으로서의 말의 진실을 다하고자 한다.”는 김 시인의 절절한 신앙의 심령적 고백이다.

얼마나 경건함이 노래로 가득 괴어있는가. 첫 수 1연의 절반이 두 번 반복을 이루었다. 여기서의 절반은 마치 두부모 자르듯 사물의 절반이 아니라 전체를 운치 있게 표현한 문예적인 그 절반이다. 언어를 어찌 잘라서 절반을 덜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절반은 전체를 대신하는 묘한 운치를 나타낸다. 둘째 수는 절대적 그리움을 경험한 나는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목숨까지도 내놓고 자신의 완성을 이루고 있음에랴! 셋째 수는 노래, 기도로 완성의 모습을 이루는 자신을 본다. 그러기에 셋째 수 끝 연에 /눈 가득히/귀 가득히//빛만 갖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절반이야말로 결국 전체의 사물로 채워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김남조 시인의 가슴은 경건한 신앙으로 꽉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서울 출생, 단독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 <거대한 뿌리 1974>, <주머니 속의 시 1977>, <김수영 전집(3) 1981),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1984> .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걸어 다닌다.

나의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반향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좋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 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러한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停頓)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 김수영 <현대식 교량> 전문

 

이 시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도랑이나 냇물을 건너는 풍경의 시대를 훨씬 지난, 현대식 교량을 건너는 사람들의 심장을 그려내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사회 발전이 바탕이 되어야 할 이해와 사랑에 중심을 이루어 모더니즘의 경향을 짙게 띄고 있다. 시인은 작자의 말을 통해 종교적이거나 사상적인 도그마를 시 속에 직수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일은 없다. 시의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언어. 따라서 나는 시의 내용에 대해서 고심해 본 일이 없고, 나의 가슴은 언제나 무(). 이 무위에서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렇듯 김 시인의 체질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는 詩語構成을 보이는 그만의 특성을 띄고 있다. 극히 현실적이기에 현대인들과의 거리감이 없다. 현실감으로 풍부한 조율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식 교량은 현대인들이 걷기에는 매우 마땅치 않은 환경이다. 어쩌면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가 아닌가. 그만한 불안을 떠받치고 있는 현대의 불안들이다. 이는 김수영 시인의 모더니즘이 강한 편향을 내비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김신웅(金信雄, 1934- ), 재미시인, 50년대 토요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와 시론>으로 등단. 정의여고 교사, 중앙일보 기자. 1980년 해직기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원로회원.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 재외동포문학상, 가산문학상, 미주시인상, 해외문학상 대상 수상, 미주한인기독문인협회 회장, 이사장 역임. () 편집고문. 시집 <대합실>, <바람 없는 날에도 뜨는 연>, <사랑을 위한 평균율>, <질 때도 필 때 같이> .

 

어느 날 헌책방 앞을 지나다

 

무심코 들러 서가를 둘러보았지

 

헌책이라 이르니 책이 헐은 것도 아니고

 

내용이 낡은 것도 아닌 책들이

 

헌책방에 있어 헌책이 되어 있을 뿐인데

 

때로 갈피의 주인이던 사람의 이름이나

 

누가 누구에게 준다는 헌정기록도 함께

 

다시 새 주인을 기다리는

 

어떤 글줄에 검거나 붉은 방점이 찍힌 채

환한 등불인양 밝히고 있기도 하네

 

선채로 읽어가는 몇 줄의 글들이

 

가슴에 길을 내고 들어 와 몸을 비벼대

 

문 걸어 잠궈 신기의 몰골 거부하다

 

결국 동의하고야 말게 되었지

 

아마 사람들의 의견은 그럴 것일 거라고

 

말다툼하다 화끈하게 한 잔 나누고

 

돌아 서던 기억으로

 

잠자던 책장 속 방점 찍힌 몇 줄의 글

 

겨울 지낸 언덕에 피어오르는

분홍빛 철쭉되어 기어 와

 

나도 함께 달아 오른 채 책방문턱을 넘었네

 

- 김신웅 <방점傍點찍힌 문장에서> 전문

 

헌책이 아닌데 헌책방에 놓여 있음으로 헌책이 되어버린 그 책의 운명에 대한 관찰이 치밀하다. 도둑이 아닌데 도둑들과 어울려 다니면 결국 그도 도둑으로 몰리고 만다는 처세철학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에서 독자가 얻은 것은 잠자던 책장 속 방점 찍힌 몇 줄의 글에서다. 이 몇 줄의 글이 겨울 지낸 언덕에 피어오르는/분홍빛 철쭉되어 기어 와의 표현은 색채감까지 동원한 극적인 아름다움이다. 이와 함께 책방문턱을 넘었다니, 그 방점 찍힌 문장이야말로 문장의 구실을 잘 감당한 문장이 아닌가. 헌책이 갖는 이미지에서 새봄에 피어난 분홍빛 철쭉과는 극히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다.

 

 

낯선 길 위에서 먼 산을 보네

 

고요에 가린 산 너머

 

떠오르다 가라앉은 꿈 아른거리네

 

무게도 없는 저것은 어디서 발원하여

 

뜨다 가라앉다 우리를 애 태우는가

 

걸어 온 세월, 발가락의 티눈 되어

 

모래를 털던 신발에서 날아간

 

풀씨 하나 꽃 피웠을까

 

다시 돌아보는 먼 산

 

너머는 꽃밭이 되어 있을까

 

널부러져 누워 있는 마른 풀들

 

어느 누구 꿈의 잔해인가

 

 

넘어오던 푸른 산 눈 덮여

 

지나온 산마저 낯설어지네

 

모래 뿌리던 바람

 

살 에이던 추위 뚫고 온

 

아직 눈 쌓인 숨차던 고갯길

 

숲 속의 새들 어디에 둥지를 틀까

 

그 때 갈무리한 씨앗 하나 품고

 

아직 심지도 못한 채

 

 

낯선 길 위에서 다시 먼 산을 보네

 

- 김신웅 <날아간 풀씨> 전문

 

이 시에 무슨 評說이 필요하겠는가! 지극한 서정(Lyric)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시 중에 꼽히는 갈래에 해당하는 시이다. 원래 그리이스에서 일곱 줄 악기인 리라에 맞추어 노래하는 노래를 가리켜 하던 말이었으나, 후일 시인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정서나 경험을 노래하는 시를 이르는 말이 抒情詩로 되었다. 서정시의 고전으로는 헤브라이즘의 소산으로 나타난 히브리문학 속의 다윗과 솔로몬의 작품들, 그리스에서는 사포나 아나크레온의 작품들, 로마에서는 카툴루스와 오비디우스의 작품들, 이탈리아에서는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작품들, 프랑스에서는 라마르틴과 위고의 비비와 뮈세의 작품들, 독일에서는 괴테와 하이네의 작품들, 영국에서는 워즈워드와 셀리의 작품들 등이 서정시로 유명하다. 한국 시문학으로는 1930 년대 이후의 순수시정신에서 그 맥을 뚜렷이 짚어 볼 수 있다.

김 시인의 두 편 중 서정성이 짙은 작품은 역시 날아간 풀씨에서 볼 수 있다. 브레몽은 시를 시적으로 읽는 데는 의미를 포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또한 그것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의미와 관계없는 상태에 있는 막연한 매력이 존재한다. 시는 어떤 종류의 음악이다. 그것은 가장 내부적인 정신의 본성을 전달하는 흐름의 지도자로서의 작용을 한다고 했다. 이 시를 읽으며 풀씨를 따라가노라면 나도 모르게 절로 노래가 마음속에 흘러내린다.

앞의 <방점傍點찍힌 문장에서>는 서정성보다는 叡智 또는 奇智를 일으키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런 작품들이 독자의 지혜와 흥미를 확산시켜 흥미롭게 이끌어 주기도 한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金春洙, 1922- ) 경남 충무시 출생, 일본 니혼대학 3년 중퇴, 통영중, 마산고교 교사, 마산대학 교수, 부산대학, 연세대학(부산분교)강사,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구름과 장미 1948>, <() 1950>, <() 1951>, <인인(隣人) 1953>, <제일시집(第一詩集) 1954>, <꽃의 素描 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59>, <打令調 其他 1969>, <處容 1974>, <金春洙詩選 1976> 등 다수.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베스트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1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 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 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 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 튼 것일까.

싹은 비정(非情)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의 불면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디페스트의 소녀여.

-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전문

 

이 시는 1959년 헝가리 의거에 자극을 받아 쓴 작품으로 자유수호를 위한 저항정신을 소녀의 몸에 덧입혀 극적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낭만적인 겨울의 풍경위에 소녀의 시체를 내던진 지극히 처절한 장면이 인류의 부르튼 시선을 모으고 있다. ---열세 살의 소녀를 전쟁판 위에 쓰러뜨렸다. 이 소녀야 말로 전 인류의 꽃이다. 수발의 소련제 탄환을 맞은 부다페스트의 소녀나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쥔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똑같은 인류의 꽃송이들이다. 이 두 소녀의 비극이 이 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 사이사이 1959년 헝가리 의거의 자극을 받은 채 자유수호를 위한 저항정신을 강렬하게 내비치고 있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삶에서의 죽음은 차라리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영혼이 되어,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이 정경이야말로 평화의 반대편에 서서 공포에 떠는 자들의 포승줄이 아닌가.

서정주(徐廷柱, 1915-2000> : 未堂, 전북 고창 출생, 중앙불교전문(동국대 전신) 수학, 인생파(생명파) 시인, 서라벌예대, 동국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명예회장 추대, 첫시집 <화사집(花蛇集) 1941), 2시집 <귀촉도(歸蜀道) 1947)에 이어 제3시집 <서정주 시선 1956> 4시집 <신라초(新羅抄) 1961>, 5시집 <동천(冬天) 1968>, 6시집 <서정주문학전집 1972> 7시집 <질마재 神話> 8시집 <떠돌이의 >, 9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10시집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11시집 <안 잊히는 일들 1983>, 12시집 <노래 1984>, 13시집 <팔 할이 바람 1988>, 14시집 <산시 1991>, 15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16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 1997> , 시집 미 수록작품 다수, 산문집 기타.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돼지, 매로 잡은 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서정주 <꽃밭의 獨白> 전문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冬天전문

 

꽃밭의 독백婆蘇斷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소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수행을 간 일이 있었다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이라고 未堂은 밝히고 있다.

어쨌거나 전연 14행으로 짜인 현대 자유 서정시이다. 이미지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1-6, 7-11, 12-14행으로 기, , 결의 3등분으로 나누인다. 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자아의식의 유한성을 노래하고 있다.

, 그중 나은 '노래'가 구름까지 가기는 갔지마는 더는 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혀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활로 잡았든 매로 잡았든 산돼지나 산새들에도 입맛을 잃었으니, 모든 면의 한계성에 갇혀 있는 실존을 복합감각에 실어서 반복적으로 호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한계에 갇힌 자아를 직유법을 동원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소망은 간절하지만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한 발작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이와 같이 한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입장일지라도 출구를 찾아 나서겠다는 강한 결심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아실현의 한계에 부딪힌 자신의 간절한 고백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물낯바닥'은 수면(水面)을 바꾸어 표현한 말로, 미당이 처음으로 사용한 신조어(新造語)이다.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의 직유를 보아도 자아의식의 한계에 갇혀 있음이 분명하다. 헤엄을 쳐야 갈 데로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반면에冬天에 나타난 자아의식의 한계는꽃밭의 독백과는 사뭇 다르다. 한계에 부딪히거나 갇혀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기 그지없다. 무한한 가치에의 경외심을 자신의 자아 속에 내포하고 있는 "우리 님의 고운 눈썹"에 이입시키고 있음을 본다.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의 행위에서 오는 반응을 통해 자아존재의 무한한 가치부여를 돋보이고 있으므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넉넉히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서운 새가 눈썹을 비끼어 가는 행위는 눈썹을 밟고 간다는 의미와는 절대 상반되는 것으로써 눈썹에 무한한 존재가치를 인정하면서 오히려 외경심까지 가지고 비끼어(피해) 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이만큼 자아의식의 존재를 고무시킨 작품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구자애(具滋愛 1964- ) 재미시인, 충남 면천 출생, 경기대학교 대학원 수료, 계간 <문학산책> 시 부문 신인상 수상, 의왕여성문학회 회원, 미주시문학회 회원, 미주 한국일보 제24회 문예공모전 시 부문 당선.

 

 

산등성이거나

 

고즈녁한 저녁이거나

 

바다 한 귀퉁이거나

 

가만히 귀를 대어보면

 

애잔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파도소리이거니

 

아니면 갈매기 소리거니 했지만

 

심해에 드리워져 있는

 

어망에서 나는 소리인 것이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가냘프고

 

슬픈 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아렸을 적 조기잡이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거나

 

가족 위해 망망대해

 

고기잡이 나갔던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거나

 

운이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낚지 못한 어망이

 

잡히지 않는 희망, 허기진 한숨소리, 아련한 갈증들을

 

제 구멍구멍 사이에

 

고기대신 기득 채워 넣었던 것이다.

 

 

 

 

가끔씩은 어느 구멍에선가

 

청아한 소리가 나긴 했지만

 

아주 드문 일이기에

 

금방 해일 속에 묻히고 만다

 

내 목소리가 무겁다거나, 가녀리다거나, 음울한 것은

 

쉴 새 없이 뒤채이는

 

파도 속에서 쓸리고 깎여

 

기다림의 상처와 잔해들이

 

아물어가는 소리인 것이다.

- 구자애하모니카전문

 

이 작품은 미주 한국일보 제24회 문예공모전 시 부문 당선작이다. 구자애 시인은 산문체의 자유 서정시로 우리를 울리고 있다. 특히하모니카는 더욱 그렇다. 바로 구자애라는 여성이 하모니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자애 시인의 낭만을 만나게 된다. 즉 어망에서 나는 애잔한 소리, 슬픈 소리를 어망의 구멍구멍 사이에 고기 대신 가득 채워 넣은 소리- 이 소리는 바로 구자에 시인 자신의 울음소리인 동시에 우리들의 울음이다. 삶의 고난을 달래는 소리(기다림의 상처와 잔해들이 아물어 가는 소리)가 구 시인에게 감정이입(感情移入) 되어 더욱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있다. 시의 스케일이 넓고 삶과의 밀착감(密着感)을 갖게 한다. 우리들 모두는 인생의 설움과 기쁨을 생계가 걸린 어망 같은 우리 하모니카로 계속 불어내고 있는 것이다.

 

김탁제(재미시인)

 

포실한 토방으로

 

 

아침 깨우는 산새 되어

 

낮 햇살 막아 그늘 되고

 

저문 나룻 길 샛별 되어

 

 

회향의 수심 풀어 주리다

 

 

아직도 풀 먹은 유년의

 

연줄 놓지 않고 그대와

 

짐짓 흔들어 본 하늘 길

 

 

문득 생각이 나시거든

 

기별도 없이 오시구려

 

 

애내성 옛스러운

 

바다 뱃고동소리 들으며

 

붉힌 얼굴 마주 부비다

 

 

정녕 속마음 주려거든

 

동백나무 한 그루

 

네모 돌녘*에 심어 주면

 

 

노상 시들지 않는

 

그대 백년 꽃으로

 

소조히 갯바람 속에 피리다

 

* 네모 돌녘: 비석의 네모난 둘레를 의미함

 

- 김탁제 <문득 생각이 나시거든> 전문

 

문득 생각이 나시거든은 무한한 상황을 배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놓은 제목으로서의 詩情이 물씬 풍기는 표현이다. “생각이 나시거든은 이미 생각이 났음을 전제한다. 생각이 안 났다면 이런 제목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과 대상을 인식함에 즈음하여 직접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모든 효과를 印象이라 한다. 예술에 관하여 우리가 얻는 인상을 美的 인상이라고 하는 이것은 다분히 주관적, 감정적 느낌으로 우리를 휩싸기도 한다. 이런 시를 읽는 독자들은 무한히 서정의 숲으로 이끌림을 당한다. 그것은 독자가 갖는 정서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문금숙(文金淑, 1940- ) 재미시인, 호는 옥계(玉溪), 순안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1963), LACC Child Development Curriculum 수료, 1991<한국시> 3편 추천, 용글샘 동인, 재미시인협회 이사장, 회장 역임, 9회 안데스문학상, 재미시인상 수상, 시집 <추억이 서성이는 마을, 1997>, <나의 바퀴도 흔들렸다, 2002>, 공저 <하오의 사중주, 1, 2>, 대표시<비버테일 꽃 속에 숨진 벌>.

 

 

크리스마스추리 장식에 나섰다

 

벽 한 쪽 붙박이 테이블 위에

조그마한 소나무 세워놓고

은은히 반짝이는 별. 금빛 종 몇몇 그리고 흰 눈 입힌 솔방울들과

붉은 열매(Holly berry)까지

캐롤에 맞춰

흥얼흥얼 신바람 내며

마트를 돌고 돌아

눈여긴 물건들 잔뜩 담아

생전 처음 예술가인양 가까이 멀찍이 서성이며

화려하게 장식되어가는 것들에

탐스러운 눈빛 되어

손 놓아버린 청춘과 사랑 찾아

붕붕

골목길을 빠져 나가고 있었던들

빨간 플라스틱으로 뭉쳐놓은 매혹적인 열매

맺힘 뚫고 제풀에 툭 터져

희디흰 속살 내보이며

탁 탁 탁

활짝 벙그는 꽃잎처럼

붉은 저녁노을로 꽃피는 것처럼

잠시 착각되는

불량품 껍질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는

- 문금숙 <아주 짧은 착각> 전문

 

어떤 시이든지 시의 내부에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그 들어 있는 내용이 얼마나 잘 표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시를 지은 사람 즉 시인의 능력에서 엿보인다. 또한 독자의 감수성도 영향이 있다. 흙 속에 묻혀 있는 어린 싹이 흙을 비집고 올라오듯이 시인의 가슴 속에서 정서의 의미가 새롭게 내밀려서 문자에 담겨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의 가슴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형성한다.

제목에서부터 삶의 단면을 들어내고 있다. 성탄절을 맞는 시인은 크리스마스추리 장식에 나섰다. 둘째 연 전체가 추리장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문 시인의 가슴 속에는 또 한 그루의 추리가 서 있다. 실물 추리가 아니라 실물에서 얻어진 짧은 착각의 추리이다. 이것이 心想이요 詩想이다. 내면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아주 짧은 착각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싶다. 휘황찬란한 모습은 순간적인 장식일 뿐이다. “활짝 벙그는 꽃잎처럼/잠시 착각되는/불량품 껍질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는이 속에 우리 인생이 압축되어 있다. 불량품 껍질은 죄 많은 인생일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는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앤젤레스 하이웨이로 오르는 산 정상 근처

눈 덮인 숲속에는

침엽수들이 잇달아 늘어서서

스쳐온 날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이면 늘 그랬다

도화지 한 면 3등분으로 그어놓고

하늘, 나무, , 차례로 그려서

마치 묵계처럼 단순하고 산뜻하게 색칠하곤 했었다

 

높이 솟은 산에 줄줄이 선 키 큰 나무들

코발트 빛 하늘 향해

시린 발 견디며 꼿꼿이 서서

기도하는 듯 엄숙하고

하얀 양털이불융단 펼쳐진

소박한 배경 두르고

순수의 시절을 고집하듯

확고한 존재로 버티고 있는 듯하다

 

뚫고 지나온 세월 속에 그려 넣던

나풀거리는 무성한 나뭇잎 장식

버벅거리며 채우던 이름 모를 꽃과 나비들

빛과 어둠 겹겹이 섞어 위선으로 덧칠하고 내세운 경건

주제부분에만 집착한 열정 그 무거운 사색

이미지 어지럽게 꾸며 배열하면서

아집에 젖은 언어만 꾸역꾸역 쑤셔 박아

무질서하고 복잡하던 면면들로 점철되었던

오랜 내 여러 풍경화와 겹쳐진다

 

푸른 하늘과 파란 나무들 하얀 대지의 삼원색(三原色)이 빛나는

맑고 투명한 정적이 머문 산정

햇살 거느린 소소리바람 산뜻해

 

엄청

고요하고 눈부시다

- 문금숙 <어느 날의 삼원색> 전문

 

문 시인은 초등학교시절로 돌아가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회상하고 있는 듯, 삼원색은 문 시인의 삶이 지니고 있는 가슴 속에 수놓인 색깔들이다. 그것이 <오랜 내 풍경화와 겹쳐질까>라 했다. 3연과 4연에 문 시인의 삶의 상징적 상황이 역력하다. 그의 삶 속엔 서릿발 견디며 꼿꼿이 서서/기도하는 순간도 엄숙하고의 순간도 있다. 이것은 하얀 양털이불융단 펼쳐진/소박한 배경 두르고/순수의 시절을 고집하듯/확고한 존재로 버티고 있는 듯하다는 문 시인 삶의 단면이다. 이렇듯 문 시인은 맑고 밝은 화폭처럼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문 시인의 삶이야말로 엄청/고요하고 눈부시다는 노래로 채워질 수 있다.

 

가까워진 설날 준비 위해

마켓 한 모퉁이 즐비한 떡국 감 포장 앞에 섰다

머뭇거리며

한 봉지 시장카트에 집어넣으려는데

또 한 살 먹어? 또 한 살 먹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세월나이가 거세게 반항한다

한 번 안 먹으면 안 돼? 한 번 안 먹으면 안 돼?

얇은 귀가 한 소리 또 듣는다

그래? 그래 에?

한 마리 동키호테가 용감하게 튀어나왔다

 

정말로

안 먹었다

 

조금은 슬픈 생각 중인데

기발하게 떠오른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생각

사람들은 뒤에서 뭐라고 할까

그래도 궁금해 하는

- 문금숙 <나이를 먹지 말기> 전문

 

문 시인의 속사정을 일반 독자는 모른다. 설을 맞이하면서 떡국 감을 사려던 생각을 아예 접고 말았다. 한 살 더 먹기가 싫다는 생각에서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 생각이 아닐까. 늙기가 역겨워서 나이를 안 먹겠다는 것인데,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떡국을 먹지 않는다고 나이를 먹지 않는다면야 오죽 좋으랴만, 어쨌든 문 시인은 딱히 나이를 먹지 않겠다는 속셈이다. “정말로/안 먹었다. 이런 사정을 남들이 공감이나 해 주겠는가. 어쨌든 이렇게 사는 문 시인은 세월 속에서 결코 늙지 않을 시인일지도 모를 일.

 

물만 주면 되는 줄 알았다

쥐눈이콩, 메주콩, 검정콩, 콩나물콩...

아는 만큼 구입해서 물에 담가 불려보았는데

콩알들 커진 듯 보이는데 발아될 기미는 전혀 없는 듯

그래도 콩나물시루에 담아 정성껏 물을 끼얹어주었는데

황금색 음표는 애초부터 벙어리였던가 빽빽한 채 음을 못 낸다

 

내가 물 붓는 정성 속엔 진실의 싹이 삭제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희망의 뿌리 내릴 수 있는 기한이 지난 건 아니었을까

혹은 청정 씨앗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어느 날

지난 실수

미련 없이 스스로 갈아엎고

오가닉 콩을 구한 뒤

옳은 꿈을 꾸기 위해

또는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것처럼

유기농으로 몸을 가꾸기로 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농약이 발려 있는 내 생애

수없이 시행착오를 일으킨 긴 세월이

이렇게 콩나물과 함께 씁쓸할 줄이야

- 문금숙 <어설픈 풍경> 전문

 

문 시인은 누가 보아도 건강한 현대 여성이다. 몸도 건강, 생각도 건강, 그가 품고 살아가는 믿음까지 건강한 여류시인이다. 헌데, 이 여성이 쥐눈이콩, 메주콩, 검정콩, 콩나물콩...을 구입해서 물에 담가 불려보고 콩나물시루에 정성껏 물을 끼얹어 주었지만 콩마다 무소식이다. 헌데, 마지막 연에서처럼 오가닉 콩을 구한 뒤/옳은 꿈을 꾸기 위해/또는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것처럼/유기농으로 몸을 가꾸기로 했다. 문 시인이야말로 참 사는 법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닌가. 이런 표현은 풍유적 비유로 병들어 가고 있는 현실을 베어내는 문 시인 나름의 날카로운 칼날이다. 그러나 문 시인은 부드럽고 점잖게 병든 환부를 도려내며 치유를 위한 건전한 방법으로 타이르고 있지 않는가.

 

어깨와 등이 시린 겨울날

오돌 오돌 떨던 마음이 생각을 확 바꾸었다

하나는 외롭다, 둘 이어야해, 화목을 위해선 하나 더

 

그래서

한꺼번에 가족 셋을 입양해왔다

좁은 응접실이 켕겼지만

바람이 찬 숲속에서보담 한결 따사로우리라

낑겨서 한 번 살아보자고 얼려대면서

 

어렸을 적

연탄불로 데운 방구들 위에

이불 하나 뒤집어쓰고

옹기종기 나누던 체온을 떠올린다면

 

곧 돌아올 봄 그날을 기다리며

목마름을 참던 겨울의 뿌리

땅속 깊이 묻고

후끈한 여름까지 가기 위한 성장을 위해

시린 겨울나는 것 쯤 문제없이 견딜 수 있는 것

그렇게 한 세상 바람 같은 것 날려 보내면

한결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슬쩍

스위치를 누르자 변해지는 세상

휘황한 불꽃

동글동글한 전구알들

데워진 실핏줄 따라 따스하게 빛났다

깊은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떠돌아 발바닥이 부르터진

외롭던 사슴 세 마리

피가 돌자 환하게 몸을 편다

 

마음속에 늘 품어 안았던

바라던 불가능

어느 날

이루어진 꿈소식

- 문금숙 <한 해의 끝 즈음에서> 전문

 

문 시인은 어린 시절을 춥게 살았다. 그러기에 추웠던 그 환경을 떠올려 곧 돌아올 봄 그날을 기다리며/목마름으로 참던 겨울의 뿌리가 되어 마음속에 품어 안았던/ 바라던 불가능/어느 날/이루어진 꿈 소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 시인이 바라고 있는 한 해의 끝 즈음이다. 그러므로 한 해는 문 시인의 일생이 비유된 언어일 것이다. 가난한 삶의 겨울에서처럼 세상은 고통스럽고 가족들은 깊은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떠돌아 발바닥이 부르터진 외롭던 사슴 세 마리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토록 외롭던 사슴 세 마리/피가 돌아 환하게 몸을 펴는 때야말로 한 해의 끝임에랴! 우리네가 세상에 머문 동안은 고통의 때, 그것이 끝나는 즈음에야 고통을 벗는다. 이로 보면 문 시인은 아늑하고 평화로운 삶의 환경을 지극히 염원하는 소망을 끝없이 데워내고 있다.

 

 

 

방동섭 재미시인, 백석대학교 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창조문학>을 통해 등단, 현 미주한인기독문인협회 회장, 저서 <영성을 깨운다>, <위풍당당> 외 다수, 시집 <눈물 속에는 미소가 있다>

 

 

한 점,

 

 

한 방울,

 

모두

 

귀하건만

 

 

 

 

전체를

 

송두리째

 

주고 간

 

그대여

 

 

 

삶을

 

전적으로

 

부정한

 

그대는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이다

 

 

 

 

한 점,

 

 

한 방울,

 

모두

 

긍정이다

 

 

 

무한

 

긍정이다

 

- 방동섭 <무한 긍정> 전문

 

시를 읽는 동안 모래사막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시에서 잡티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한없이 메마른 공간 같기도 했다. 나의 시선 속에 아하! 참된 시는 이런 것인가하는 다짐을 갖기도 했다. 그런 중에 삭막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방동섭 시인의 시는 상징과 생략이 지나치지 않았나 싶었다. 시 전체를 살펴보아도 詩心에서 출발한 詩想 그대로를 直線化 시켰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것은 詩的 수사력과 정서의 승화가 여지없이 초월되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어쩌면 이토록 직선적일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적 수사력을 훌쩍 뛰어넘어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에겐 부정이 없다. 모두 긍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고 고난 중에 긍정의 삶을 살았다. 이것이 무한 긍정이다. 이것이 방동섭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속에는 방동섭 시인의 믿음의 세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무한 긍정이란 언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두 말없이 직선화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오직 자기의 길만 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오직 긍정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방동섭 시인은 시인이기 이전에 목회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외쳐오고 있는 목회자이다. 목회와 함께 詩歷을 쌓아올린 결실이 이렇게 무한 과일을 맺어 실하게 영글게 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뜨거운 믿음을 바탕으로 쌓아올리는 시력에서 나오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방동섭 시인의 시도 무한 긍정에서 우러나는 절묘한 음성이다.

 

그때 세상은

 

눈물 흘리고 있었다

 

 

 

우주를 집어삼킨

 

깊은 어두움

 

침묵의 무게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형체도 없고

 

의미도 없는

 

어두움의 세계로

 

한 줄기

 

빛이 흘렀다

 

 

 

어두움은

 

모자람이 아니라

 

존재가

 

부정되는 것임을

 

 

 

빛이

 

가르쳐 주던 날

 

의미의

 

세계가 열렸다

 

- 방동섭 <창조 1> 전문

 

 

태초의 우주는 카오스(chaos)의 혼돈상황이었을 것이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어두움뿐인 세계에 여호와의 말씀이 빛이 있으라하셨기에 과연 환한 빛이 우주에 가득했다. 형체도 없고 의미도 없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은 모든 형체와 의미를 드러내어 모자람이 없는 세계를 활짝 열었다. 창조의 신비를 확실하게 돋보인 비밀의 폭로이며 하나님의 원대한 능력을 드러내는 찬양이다. 간단하고 소박한 표현이지만 우주의 개벽을 알리는 신비가 역력히 빛나고 있다. 방동섭 시인은 큰 소리 없이 조용하고 은은한 모습으로 엄청난 사실을 노래하는 妙才를 발휘하고 있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엄청난 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창조 1>詩行을 타고 나온 줄줄이 철학적 가르침이 아닌가. 엄청난 신비로움이 시 정신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시와 함께 이런 의미의 세계로 침잠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을은

 

고독한 실존

 

 

그 찬란함이

 

서글퍼지는

 

언덕에서

 

누군가 기다린다

 

 

 

가을이

 

묻어버린

 

고독의 비밀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있을 뿐

 

 

 

가을은

 

몹시 아프다

 

- 방동섭 <가을은 몹시 아프다> 전문

 

방동섭 시인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분명 가을의 시인이다. 일 년 4계절 중 가장 시와 가까운 계절은 아마도 가을일 것이다. 감상적 낭만이 절절이 흐르고 감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쥐어짜고 밤에도 잠들지 못하도록 뜬눈으로 지새우게 하는 가을 밤. 분명히 방동섭 시인은 가을에 붙잡혀 있는 시인이다. 몹시 아픈 가을이야말로 방동섭 시인과 가슴이 맞닿아 있는 절기이다. 그래서 방동섭은 이미 시인이 되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아픈 가을은 방동섭 시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는다. 이 아픔이야말로 역설적인 아픔이므로 방 시인은 그만큼 30, 60, 100배의 기쁨을 누리고 사는 시인이다. 그는 가을과 맞닿아 있는 가을의 시인이기에 가을이야말로 방 시인의 천국이다. 방 시인은 가을의 소망이 있는 시인이다. 풍성한 가을이야말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참으로 좋은 때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창

 

열어 제치면

 

길모퉁이에

 

살고 있는

 

시는

 

내 영혼이다

 

 

 

시는 느낌

 

생각이 아니다

 

시는 보이는

 

보려는 것이

 

아니다

 

 

 

얽힌 인생

 

처절한 몸부림

 

시가 침묵하면

 

무엇이 있어

 

읊조리나

 

 

 

인생은

 

어차피 시 한 줄

 

시 아닌

 

인생은 없으니

 

 

방동섭 시인은 참으로 놀라운 詩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 냄새도 없고, 소리도 안 나고, 빛도 색깔도 없는 한낱 삼중고를 앓고 있는 듯한 글줄에 불과한 시를 오케스트라보다 더 우렁차고 감동스러운 인생에 바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런 시를 내 영혼이라니, 시의 위치를 이토록 높게 올려놓은 시인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신라시대 鄕歌彗星歌에서 별의 위치를 사람의 위치보다 높게 표현한 시구(詩句)는 있을지라도 인생은 어차피 시 한 줄이라 노래한 시인을 필자는 이제 처음 만난 듯하다. 우리네 인생을 시 한 줄에 비유한 시인의 詩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곽상희(Gwak Sang Hewi, 1934- ) 재미시인(뉴욕 거주).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졸업 <현대문학> 이원섭 추천. 1963년 도미 오하이오대학 언어학교 졸업, 뱅크 스트릿드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전공, 뉴욕에서 해바라기육아원 경영, 시집 <바다 건너 목관악(木管樂) 1981>, <우리 지금은 노래하지 않네 1987> 외 다수(장편소설 포함).

내가 너의 부르튼 손을

 

품고

 

돌무덤 쌓인 강을 건널 때

 

 

내 손끝에 스치는

 

네 뜨거운 숨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숨결이

 

내 발바닥에

 

꽃잎 같은 굴렁쇠를 달아 주었다.

곽상희 <굴렁쇠> 전문

 

 

 

고통이여

 

너를 안는다

 

 

고통이 녹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내 안에서. “부분

 

 

 

꽃잎 같은 굴렁쇠를 내 발바닥에 달고 돌무덤 쌓인 강을 건너보아라. 이것은 곽상희 시인이 걷고 있는 荊棘이다. 그러나 곧 다음 시에서 그가 안고 있는 고통은 내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토록 시 단면을 통해서 보이는 시세계에 항상 피 묻은 그리스도가 인생과 함께 하신다.

 

 

새들은

 

말하지 않고

 

운다

 

 

낯선 이국땅

 

New York

 

 

나도

 

말하지 않고

 

운다

 

 

눈물이

 

길을 닦는다

 

- “새들은 말하지 않고전문

 

말을 하면서 우는 울음을 어찌 말하지 않고 우는 울음에 비하랴! 언어는 울음을 희석시키는 힘이 있지만 언어로도 희석 되지 않는 울음이야 오죽하랴! 오늘의 한국 시단에, 미주 시단에 이토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肉化해 내는 믿음의 시인이 또 누가 있을까?

곽상희는 그의 믿음을 통해서 이런 일에 매우 숙성한 사고를 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바다 속 물고기 같은, 하늘을 날고 있는 새 같은, 자유로운 시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밀 하나 캐러 텃밭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이 사막이 되고 바다가 될 줄 몰랐다. 닫힌 문이 될 줄 몰랐다. 문 밖에서 말을 캐는 일을 익혔다. 그렇게 사랑이 오고 말이 왔다. 바람이 익은 물빛 안에서”-는 곽상희의 고백이다.

곽상희는 시인다운 시인임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시에는 항상 진실한 인생이 그려져 있다. 그 인생 위에 푸른 하늘이 있고, 저 아래로는 넘실대는 파도가 있다. 그리고 시인의 주위에는 크고 작은 태산과 야산이 있고, 그 사이를 오가며 목숨 걸고 살아가는 곽상희의 기쁨과 슬픔이 눈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주님의 손을 잡고 있다. 그가 시인이 되고, 문학을 가슴에 안으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의 인생을 시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시집 고통이여 너를 안는다에 담긴 시인의 눈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비처럼 이미 내렸을 것이다. 주옥같은 시들의 갈피갈피마다 곽 시인의 눈물이 뜨겁게 배어 있음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