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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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現代詩로 보는 韓國人의 抒情(2)

                                                             최 선 호

                                   
 정희성(鄭喜成) (1945-  ) 경남 창원 생. 시인 서울대 국문과 졸업. 대학원 수료, 숭문고교 교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와시학상(1997)
70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변신」당선. 시집〈답청〉74.〈저문 강에 삽을 씻고〉78.〈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91.〈시를 찾아서〉등.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 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 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의 전문

                                       
 정희성 시인은 현실에 매우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가지고만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예리하게 벼려서 現寫하여 현실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위 시에서 보듯이 쉽게 비유(metaphor)된 '한밤', '얼음', '물고기' 등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을 담고 있는 매체들이다. 여기서 이 얼음을 꺼야한다. 그래야 내가 바라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눈을 감지 못하는 물고기는 싸우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나의 친구와도 연결되고 있다. 이는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벗어나려는 불굴의 힘이다. 이 힘으로 얼음을 꺼야한다. 이 얼음이 바로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이다. 여기서 싸우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나의 친구는 얼음 밑에서도 숨을 쉬는 물고기 같이 어려운 환경을 이기며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내가 누려야 할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바이런, 보들레르 등의 비판적 사실주의자들은 역사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입장에서 현실비판에 용감성을 내비쳤다. 외부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인 자신의 내면의 정신과 감정은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현실과 인간관계를 냉철하게 비판 분석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런 불굴의 시 정신으로 불의에 칼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한국시에서는 현대적 특성이 농후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8 ․ 15를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에 이육사 윤동주 김수영 시인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샛강바닥 썩은 물에/달이 뜨는구나/-〈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부분

/그들이 네 힘임을 잊지 말고/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아직도 돌을 들고/피 흘리는 내 아들아/-〈아버님 말씀〉의 부분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풀을 밟아라/밟으면 밟을수록 푸른/풀을 밟아라/-〈답청〉의 부분

/너는 죽고/죽어서 마침내 살아 있는/이 산천/사랑으로 타고/함성으로 타고/마침내 마침내 탈 것으로 탄다/-〈진달래〉의 부분

/그가 돌아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내가 무섭다/그러나 나는 결코 잊지 않는다/오, 기억하게 하라/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러보는/자유, 나의 조국아/-〈不忘記〉의 부분

 위에 보인 시의 부분들에서 우리의 가까운 역사적 현실이 보이지 않는가! 이렇듯 정희성 시인의 시세계는 명징하게 들어나 있다. 시인은 시인 자신의 상상력이나 사고력의 역할에 의해 그 느낀바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 외부 사물을 시인의 상상과 결부시켜 시인의 내부로부터 다면화하여 밖으로 표출시킬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외부적 사물→ 시인 상상의 세계→시적 표현에 이르게 된다.

 정희성 시인의 시에는 사회적 현실성과 역사성 위에 서정성이 짙게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큰 감동을 준다. 이는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아픔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유에서 자유를 찾는 일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의 시를 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영옥(韓英玉) (1951-  ) 서울 출생. 시인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문학박사),〈현대시학〉73년 천료, 한국예술비평가상 수상(97년) 천상병상 수상(00년),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시집〈적극적 마술의 노래〉79년. 〈처음을 위한 춤〉92년. 〈안개 편지〉97년.〈비천한 빠름이여〉01년.

 
불붙는 적의로 떨리는 눈

치켜뜨고

무서운 힘으로 부푼 손바닥

치켜 올리고

천천히 천천히

오랫동안 그의 살을 파먹은

철천지원수에게로

다가선, 바싹 다가선

주인공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내려치려던 칼 같은 손바닥

구름처럼 부드럽게 띄우며

원수의 어깨를 깊이 끌어안는,

그런 뒤집어엎음이여

그렇게 뒤집어엎으라고

연방 꽃피고 잎 돋는 것들이여

분홍, 연두, 분홍, 연두

그 간절한 되 뇌임이여.

                        -〈분홍, 연두〉의 전문

 
 한영옥 시인의 여러 시편 가운데서 〈분홍, 연두〉한편을 택했다. 참신한 이미지와 그 구사가 매우 돋보였기 때문이다. 분홍, 연두는 색깔이다. 시인이 살려낸 시의 nuance는 예사롭지 않다. 그 대상물의 색채라든가 형상을 사실 그대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 속에서 분해되어 새로이 창조되는 美的 작업의 비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는 묘사된 회화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을 알게도 되고,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거나 개인의 심상에서까지 우러나는 시의 사회성을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분홍과 연두는 '뒤집어엎음'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피어나는 이유를 갖고 있다. '철천지원수'의 어깨를 깊이 끌어안음이야말로 극적인 변화의 뒤집어엎음이다. 이로써 시인은 잘못된 사회, 인간관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혁의 도구는 총이나 칼이 아니라 꽃이다. 꽃이 피워내는 분홍과 연두이다. 그러므로 분홍과 연두는 인간 모두의 간절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꽃은 자꾸 피어야 한다. 그래서 분홍과 연두를 끊임없이 분출해내야 한다. 인간에게도 분홍과 연두가 있다. 사랑, 이해, 관용, 인내 등에서 인간의 분홍과 연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 손짓하는 metaphor이다.

 시는 "인생의 비평"이어야 한다“는 영국의 비평가 아널드의 말이다.〈분홍, 연두〉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비유가 제시하는 사물에 대한 암시의 깊이와 얕음에 따라 그 시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만큼 비유는 시에서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분홍, 연두〉를 색깔로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생을 파고들어 그 속성에서 〈분홍, 연두〉를 찾아야 할 일이다. 

 /그대여, 구름이여./여기 남아 함께 울자/이상하게도 맑아가는 이 저녁에/ -〈구름 앞에서〉의 끝 연에서 보이듯이, 또 다른 시들에서도 한영옥 시인은 그의 시심을 자연에 기대어 나타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한영옥 시인 시세계의 뚜렷한 단면이다. 이런 점은〈분홍, 연두〉와도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보인〈분홍, 연두〉는 극히 아름다운 시심에 세련된 표현기법의 조화로 이채롭게 번득이고 있다.

     
 김모수(金母守) 시인, 경남 통영 출생. 1976년 미국 이주. 한국 창조문학 신인상. <해외문학>상. 재미시인상. 재미시인협회 이사.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와 사람들」 동인. 시집:「달리는 차창에 걸린 수채화」,「주홍빛 신호등」,「투명의 신호등」,「아름다운 황혼」, 현재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거주 kimmosoo@gmail.com

 
내 인생 나무의 전성기는

겨울의 끄트머리

봄이 막 도착하기 직전의

빈 가지일 때이다

 

바작바작

뼈 속까지 타 드는 갈증

그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한 방울의 진액

 

내 생의 클라이맥스는

넘치는 포만의 잔이 아니라

채움의 가능성을 지닌

빈 잔일 때이다

 

어떤 빛으로

어떤 맛으로

어떤 열도熱度로

채워질지

 

가슴 조이며

기다릴 수 있는

짜릿한 즐거움

빈 잔의 시간 

                  - 김모수의「빈 잔盞의 시간」전문

 
 김모수 시집「주홍빛 신호등」에서 발췌했다. 인생을 나무에 移入하고 있다. 나무의 가장 견디기 어려운 때는 "겨울의 끄트머리/봄이 막 도착하기 직전의/빈 가지일 때"로써 "바작바작/뼈 속까지 타 드는 갈증"을 느껴야 하는 고통의 때이다. 이 순간을 "인생 나무의 전성기" 즉 "내 생의 클라이맥스"라 했다. 바로 이 정신적 위치가 김모수 시인의 靈的 指定席이다. 이 자리야말로 간절한 기다림의 자리이다. "가슴 조이며/기다릴 수 있는/짜릿한 즐거움/빈 잔의 시간"이 되는 때이기에 더욱 그렇다.   

 인생은 자연이 아니고, 자연 또한 인생이 아니다. 그런데 김모수 시인은 인생을 자연에, 자연을 인생에 대입시켜 감동의 절정을 경험하고 있다. 깡마른 나무가 풍만한 봄을 기다리듯이, 지극히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의 세계를 갈구하는 영적 목마름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를 노래한 고라 자손의 영장으로 한 노래에 접맥되고 있다. 사슴은 열이 높고 다혈질의 체질을 가졌기 때문에 덥고 건조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특히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동물이다. 요엘 선지자는 이런 상황을 더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욜1:20).

 이 시에서 나무로 변신한 시인은 목마른 사슴을 닮아 있는 것이다. 간절하고 더욱 간절한 위치에서 절대를 사모하고 있음에랴! 그러므로 "빈 잔일 때// 어떤 빛으로/어떤 맛으로/어떤 熱度로/채워질지"를 염원하는 시인의 信仰度數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안선혜(安先蕙) 시인, 경남 마산 출생, 미주시문학회 회원 〈순수문학〉등단,〈카톨릭월보〉신인상, 재미시인협회 회원, 시집: <나의 슬픔이 사랑을 만나다>, <그해 겨울처럼>, 제18회 가산문학상, 제19회 해외문학상 대상 수상.




고향이 해남이랬지

우수영 하얀 파도

가슴이 철석이면

속울음 우는 사람

미국 땅 문턱 높아

삼국으로 돌아서 월장한

간 큰 남자

영주권 없어 부모장례 못 갔고

미아리 처자식 눈에 밟혀

눈물을 기름 삼아

하얗게 밤을 태웠다던 그

이별 곱빼기로 먹고도 허기진 가슴

불심에 잡혀서 뜨겁게 타고 있네

소갈머리 주변머리 베레모로 멋을 내고

문학의 길 법사의 길 새파란 신입생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도 무색할

고뇌에 찬 이 남자

속은 나도 모르오

                      -안선혜의〈내가 아는 남자〉전문


 미주 이민 백주년기념/이민을 주제로 한 詩 모음/재미시인 작품집〈外地〉13호에서 안선혜 시인의 작품을 발췌하였다. 이민 100주년을 맞으면서 이민의 특색이 농후한 작품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연 19행의 현대 자유시(내재율)로 구성된 이 시는 이민자의 아픔과 낭만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정시이다. 起 敍 結의 3단 짜임이 원만하다. 쉽게 읽혀지면서도 정감어린 해학까지 곁들여 피로감을 주지 않고 잔잔한 감동으로 번진다. 시어의 선택도 무리 없이 순조로운 편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국 인이 모르는 이민자의 또 다른 아픔을 실감한다. 해남을 고향으로 두고 신분 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이 역력하다. 부모 장례까지 참석을 못하는 사람- 이런 입장이야말로 이민자의 입장이 아니겠는가. 끝 행의 “속은 나도 모르오”는 누가 누구의 속을 모른다는 표현인가. 일반적으로는 시인이 이민자의 속을 모른다는 뜻으로 보아지지만 다시금 우리의 눈을 끌게 하는 표현이 아닌가? 제목과 대비된 표현이 돋보인다.  

   
 예현연 시인, (200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 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 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머리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 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당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 년 전부터 글썽여 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 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200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예연현의 <유적> 전문


 폐관을 알리는 안내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알리는 비상등이 꺼져버릴 때까지 유적전시관에서 시인이 유적을 감상하고 있다. 시인 자신이 직관하고 있는 얽히고설킨 사연들을 묘사하면서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그녀와 시인 사이에 교차하는 詩情을 시간이라는 쟁반에 담아 읊어내고 있다.

 유적에 대한 글이긴 하지만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어들이 詩語로 등장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더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이 시를 감상하는 독자들의 앞에는 유적이 놓여있지 않을지라도 이 한편의 시를 통하여 시인이 감상하고 있는 유적을 추출해 볼 수 있을 만큼 묘사의 섬세함을 보이고 있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 낀 세월로부터 지금 막 유적전시관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이 꺼져버리기까지의 시간의 흐름이 역사의 쟁반에 놓여있고 그 위에 소중한 유적들을 올려놓았다. 금간 항아리, 회갈색 머리로 누워있는 古代 여인(황녀)의 벌린 입 속 수천 년을 견딘 치아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 고리 끊어진 장신구, 가슴팍에서 사그락 대던 벽옥 구슬들 등에 얽힌 사연들을 유적과 유품 사이로 연결하면서 시인 자신과의 연관을 짓고 있다. 보기 드문 자상한 묘사로 시정을 읊어내고 무엇인가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유적과 유적 사이에 놓여있는 정신적 유산이다. 

  끝 부분인 "폐관을 알리는 안내방송만이 어지럽고/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의 두 행은 이 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어둠 속에서 모든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로 끝맺음이 오히려 압축과 생략에 도움이 될 성싶다.


 李根培 (1940.3.1- ) 시인, 시조시인, 충남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207에서 출생. 호는 沙泉.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1960).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묘비명 당선과 서울신문에 시 벽 당선(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압록강 입선(61년) 동아일보 신춘, 조선일보 신춘(62년). 한국일보 신춘 “북위선” 당선(64년). “한국문학” 발행 및 주간(1976-84). 재능대학 문창과 교수.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60년), “노래여 노래여”(81년), 장편서사시집: “한강”(85년) 등 


 가을의 첫 줄을 쓴다

 깊이 생채기 진 여름의 끝의 자국

 흙탕물이 쓸고 간 찌꺼기를 비집고

 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마시는

 들플의 숨소리를 듣는다

 금실 같은 볕살을 가슴에 받아도

 터뜨릴 꽃씨 하나 없이

 쭉정이 진 날들

 이제 바람이 불면

 마른 잎으로 떨어져 누울

 나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과 산다는 것의

 뒤섞임과 소용돌이 속에서

 쨍한 푸르름에도

 헹궈지지 않는 슬픔을

 가을의 첫 줄에 쓴다

                                                                   - 이근배의 “序歌” 전문

 자기존재의식에 집착하고 있다. 가장 무성하고 욱어진 녹음을 이루어야 했을 생애의 생채기로 얼룩진 여름의 삶을 살고, 가을에 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마시는 들풀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꽃씨 하나 없이 쭉정이 진 날들을 살아온 자신은 쨍한 푸르름에도 헹궈지지 않는 슬픔을 안고, 이런 자신의 삶을 첫 가을에 절절히 고백하는 서럽도록 맑은 가슴을 훤히 내비치고 있다. 이는 과연 얼마나 허전한 삶을 노래하고 있는가. 전연 16행의 봉투구조의 형식에 높은 서정을 담고 있다.

 이어령(李御寧, 1934년 1월 15일(음력 1933년 11월 13일) ~ )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 저술가, 대학 교수를 지낸 국어국문학자이며, 문화부 장관 역임.

 평생, 지성과 이성의 화신으로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 그가 세례를 받고 영성 세계의 문을 열어 생애에 극적인 획을 그으며 첫 시집 <어느 불신자의 기도>를 문학세계사를 통해 세상에 내놓은 지 어언 여러 해가 흘렀다.

 금세기를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구석들을 잽싸게 먼저 보고, 먼저 듣고, 먼저 터득하여 정신문화의 등불을 밝히면서 산문으로만 자신을 무장하여 50여 년 동안 문단생활을 해오던 그가 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문학 전반을 섭렵해 오더니, 급기야 그 예리한 감각의 붓을 들어 문학의 꽃이라 불리는 순수시에 접근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감성과 지성의 오솔길을 걸으며 이성의 정상에 올라 있는 그가 영성의 세계로 지향하는 뚜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절절한 심경을 널리 펴 보이고 있다. 이제 시 분야에의 접근은 그의 문학에서의 마지막 작업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의 시에는 영적 승리를 갈구하는 목마름이 있다. 하나님 앞에 눈을 뜨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사람으로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고, 송강(松江) 정철이 목멱(木覓)을 그리워하듯 자기 영혼의 집을 그리워하는 영적 기다림이 담겨져 있다. 그의 잔에 가득한 맹물이 맛좋은 포도주로 변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군중 속에 숨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몰래 잡아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시정으로 녹아 흐르고 있다. 기독교 문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터 그의 예리한 붓끝에서 그토록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던가!

  “하나님/당신의 제단에/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절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중략- /아! 정말 하나님/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더이까.//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중략-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 부분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그냥 당신의 여윈 손을 잡고/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 끝 연

 “내 영혼의 집을 짓게 하서소서”
                                            -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의 부분

 산문의 대가로 반세기를 주름잡아 오던 그가 왜 시를 쓰는 걸까? 산문으로 닿을 수 없는 영적 하늘을 보았음일까! 딱딱한 산문의 껍질을 깨고 운문의 세계로 발돋움하는 몸부림이 더욱 신선한 바람을 불게 한다.

 “꽃들이 지는데 지금/천 송이 또 천 송이 꽃이 지는데/계백이여 불타는 고향을 지키던 계백이여 지금 어디에서 칼을 가는가.”
                                      -지금도 떨어지는 꽃들이 있어<낙화암에 부쳐> 끝 연

 한편, 그가 간직해 오던 이지가 시정으로 승화되어 재치 있게 건축된 언어와 언어들의 틈새에서 삶의 애환을 노래한다. “눈물이 무지개 된다고 하더니만”, “미래의 문명은 반짇고리에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모더니즘의 첨단을 오르내리는 몸짓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 묻은 이야기들을 끌어오는가? 신앙적인 것, 교훈적인 것, 가정적인 것, 지성적인 것, 이성적인 것, 현대적인 것들로 이렇게 가슴을 치는가!

 그의 시집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장폴 사르트르의 주변을 둘러보는 듯, 그의 고백 속에 흐르는 눈물의 감격을 뜨겁게 경험한다.        
 

 이육사(李陸史 1904-1944).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源綠, 별명은 源三, 후에 活로 개명, 경북 안동 출생, 普文義塾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嶠南學校에서 수학(1921), 義烈團 가입(1925),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1933년 9월 귀국하여 詩作에 몰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囚人番號 64번을 따서 陸史란 이름으로 <黃昏>을 1933년에 新朝鮮에 발표하여 등단.


A.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B.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C.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江 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D.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E.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曠野> 전문

 

「광야(曠野)」는「청포도(靑葡萄)」와 함께 이육사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인은 일제치하에서 옥고를 겪으면서 조국의 光復을 소원해 왔다. 일제에 저항하는 삶 자체가 그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윤동주와 함께 저항시인으로 우리 詩史는 외치고 있다.
 5 연 15 행의 이 시는 현대 자유시內在律이며 조국 광복으로 내달리는 꿈과 의지가 점철되어 있다. 이 시인이 처한 현실을〈지금 눈 내리고〉로 알 수 있다. 여기서의〈눈〉은 일제의 침략 · 압박을 상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도 이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여기서〈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조국의 내일을 내다보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독립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현실을〈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역사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일제의 침략과 조국의 광복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A연의〈까마득한 날〉날은 太初를 말한다.〈하늘이 처음 열리고〉는 開天 즉 역사의 시작을 말한다.〈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닭이 어디서 울었느냐는 물음이라기보다는 設疑的으로 '어디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B연은 의인법의 활용이 잘 나타나 있다.〈범(犯)하던〉은 "범하진"의 안동 사투리.〈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의 '이곳'은 광야이다.〈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에서 神聖不可侵의 '광야'임을 나타낸다.
 C연의〈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와〈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에서 活喩法의 표현을 본다. A-C연까지 역사의 태동과 발전이 점층적으로 나타나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D연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의지를 노래한다. E연은 미래를 향한 단단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끝 부분의〈하리라〉는 사동 조동사이다. 여기서의 광야는 넓은 들(廣野)의 뜻이 아니라, 인적이 없이 아득하게 너른 허허벌판의 '빈들(曠野)'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40년에 필적할 만한 한국민족이 겪어낸 36년 치욕의 광야이다. 이육사는 그의 생애를 걸고 독립을 위해 투쟁을 하다가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한, 드문 시인 중의 한 분임을 선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를 전후한 시인 중에, 충남 보령 산꼭대기에 대리석으로 세운 김영랑, 심연주, 오일도,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등 일곱 항일 민족시인 추모분향단이 있다.


  이창윤(1940- ) 시인, 의사, 재미시인협회,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다시 쓰는 봄편지>, <잎새들의 해안> , <강물은 멀리서 흘러도><내일은 목련이 지는 날 아닙니까>, 가산문학상. 미주시인상, 해외문학상 등 수상.

 일찍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란 편지글에서 “시는 나타난 그대로의 문자를 읽고 이해해야지, 일체의 설명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독자들의 이해의 세계를 최대한으로 존경스럽게 언급한 말일 것이다. 이 말은 필자를 적지 않은 무계로 누르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창윤 시인은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1964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1966년 <현대문학> 시 부문 추천 완료로 등단했다. 첫 시집 <잎새들의 해안>을 출간하고 1967년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산부인과 전문의 Maternal Fetal Medicine 특수 전문의 의학 수련, 그 후 의학 연구와 환자 치료에 열중하던 30년 동안은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헨리포드 병원 산과와 Head of Maternal Fetal Medicine, 헨리 메디칼 센터의 Director, maternal Fetal Medicine의 임무를 완수하고 2000년 말 임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미시간 주립대학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가 있다. 시집으로 <잎새들의 해안> <강물은 멀리서 흘러도> <다시 쓰는 봄 편지>가 있고, 가산문학상, 해외문학상, 미주시인상, 재미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내일은 목련이 지는 날 아닙니까>는 이창윤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며, 그의 삶의 철학이 ‘슬픔의 미학’으로 승화된 시집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상은 이창윤 시집 <내일은 목련이 지는 날 아닙니까>의 표지 안 쪽에 이창윤 시인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글이다. 이 글을 여기 옮겨 놓은 뜻은, 이창윤 시인의 역정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덧붙이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창윤 시인은 시인이면서 의사이다. 또한 의사이면서 시인이다. 의사는 인간을 치유하는 과학자이다. 그러나 시는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은 인간의 두뇌에서 다루어지지만 시는 두뇌보다는 가슴에서 데워낸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과학은 이성과 지성의 산물이고, 시는 감성과 정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혹 지성적인 주지시는 두뇌에서 나온다 할지라도          두뇌에서 정서를 끌어내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정서의 영토는 가슴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두뇌에서 가슴, 가슴에서 두뇌까지의 거리라 했다. 이것은 이어령 교수의 생각만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가질 것이다. 지성에서 감성으로 오는 거리와 감성에서 지성으로 가는 거리는 자로 재어지지 않을 만큼 먼 거리이다.

 이창윤 시인은 의사이자 시인이기 때문에 이토록 먼 거리를 어찌어찌 견디며 오고 가곤 했는지, 이창윤 시인의 시의 역정에 가슴을 기울여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창윤 시인은 종종 자신은 “시 같은 것을 쓰고 있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시인이 아니면서 시인처럼 살고 있다’는 말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진실 속에는 진정한 참말이 들어 있다. 이 세상에 시이면 시이지, 시 같은 시는 존재하지 않고, 시인이면 시인이지 시인 같은 시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 같은 것을 쓰고 있다는 이창윤 시인의 말 속에는 가장 진실한 시를 쓰고 있다는 말의 속성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말했다. 아무짝에도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쓸모 있는 것들만 쓸모 있게 거래되는 세상에
엉뚱한 짓으로 위로 받는 삶이  
이 시대에도 하나 둘 남아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시를 쓰는 일은
언제 어디선가 기슭에, 누군가의 마음 기슭에
흘러가 닿을 것이라고 믿고
던지는 Bottle Letter 같은 것이라고
(얼마나 많은 바틀래터가 수취인을 찾지 못하고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는가)
우리들은 바틀래터를 삶의 바다에 던지는 자들
또한 받아서 읽어보는 수취인이 아닌가
이런 부질없는 일을 반복하는 자들이
심심찮게 남아 있는 한                   
시는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시는 읽혀질 것이다
                              <서시> 전문
          
 이처럼 시는 이창윤 시인에게 Bottle Letter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창윤 시인은 Bottle Letter같은 시일지라도 결코 손에서 놓지 못한다. 시가 쓰이고 읽혀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스승으로 불리웠던 틱낫한 스님의 <Anger>란 책에서 인용한 “채소를 가꾸지 않았으면 나는 시를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구절 앞에 한 동안 서 있어 본다.
 
 “진짜 올가닉입니다” 아내가 친지와 이웃들에게 그녀의 즐거움을 조금씩 나누어 줄 때     시를 쓰는 일에도 거짓말을 좀 보태어서 저런 것이 될 수 있다면, 부러워해 보는 것이다. 의예과 시절,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할 때 만났던 여학생, 지금은 우리 집 채소밭 주인, 나는 여기서 인용한 구절을 “시를 쓰지 않았으면 나는 채소를 가꿀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로 비유하여 놓고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어 본다.         
                                             <시 쓰기 그리고 채소 가꾸기> 전문

 이 시의 구조는 봉투구조이다.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에 채소 가꾸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이 연관된 시행이 반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편지봉투처럼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이 반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이창윤 시인이 시를 접하는 일면을 이해하게 된다. 비료를 물에 타서 뿌리는 것은 거짓을 참말로 만드는 비법임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의 양괄식 구성에서 강조되고 있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어 본다’의 한동안은 이창윤 시인의 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시간이다. 이렇듯 이창윤 시인은 시를 /떠나지 못하는 시인 중의 시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가지 슬픈 상처를
가슴에 묻어두고 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들판은, 지난해에도
들국화의 씨앗을 골고루 흩어두고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던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당신은 가을 들판의 계획에 쉽게 말려든다
그러나 들국화로 시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낡은 슬픔이 아닌가
흰 것과 보라색 사이에는, 가느다란 목덜미와
가늘게 울먹이던 어깨가 보이지 않느냐고
들판이, 겁먹고 있는 당신의 등을 떠밀 것이다

돌아서던 모습이 서러워 보이던
나의 누이여, 너의 싸늘한 재를 뿌리던 강 언덕에
지천으로 핀 들국화를 꺾어
강물에 띄워 보내고 왔다
다시 물어보고 싶구나, 우리가 무엇이 되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어 다시 만나리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한 순간을 만나게 해놓고
들판이 속내를 털어 놓을 것이다.     
꽃 피우고 씨앗 익히는 일이야
머뭇거리다가 지나가는 세월에 맡겨 둘 일이지만
나도 서러운 색깔로 물들 때가 있거든
그런 색깔로 그리운 날도 있어
울기 좋은 곳이 따로 있으면 나에게도 알려달라고

                                                - <들국화가 들판을 물들이면>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이창윤 시인의 가슴 속의 일면이라도 살펴보게 된다. 분명히 시인의 가슴임을 감지할 수 있다. 들국화가 있는 들판을 의인화하고 있다. 그런 들판과 들국화를 향해 시인의 정적 세계를 넉넉히 방출시키고, ‘나도 서러운 색깔로 물들 때가 있거든/그런 색깔로 그리운 날도 있어/울기 좋은 곳이 따로 있으면 나에게도 알려달라고’는 그 가슴이야말로 예사롭지가 않다. 시인은 시작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생김새의 모양과 심지어 그 지니고 있는 색깔까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첫 연은 억양법으로 그 의미를 은은히 변모 시키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이 시 전체에서 들국화가 아울려져 시적 정서를 풍기고 있다.                
한 평생이란 말이 느낌을 주기 시작하더니
안개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한 그루 나무로 내 시야에 들어오더니
내 마음의 허전한 뒤뜰에 자리 잡고
휘어진 가지를 슬픔 쪽으로 뻗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를  내 안으로
불러들여야 하겠다
내 마음의 안방에 가장 부드러운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고
그를 편안하게 하련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가 내 등을 두드릴 것이다
잘 가거라, 친구여
돌아보지도 않고 먼 길을 가야 하는
내 마음의 등이 따스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한 평생이란 말을
이 땅에 남겨두고 가기 때문일 것이다
                
                                 - <한 평생이란 말> 전문

 이 시에는 한 평생이란 말과 내가 병존한다. 나는 주인이요, 한 평생은 객이다. 첫 연부터 끝까지 주와 객의 점층을 이루고 있다. 이 점층은 그대로 인생을 사는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주와 객이 일체를 이루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내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수법을 취한 시의 예를 든다면 박두진의 “하늘”에서도 점층된 주객일체를 볼 수 있다. “하늘”에서도 내가 주요, 하늘은 객이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머얼리서 온다/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에서 하늘과 내가 일체감을 이루기까지 점층과 반복이 계속된다. 그래서 끝부분에 이르면 주와 객이 일체가 되는 신비의 열매가 맺힌다. 이창윤 시인도 그런 신비를 안고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본다. 인생의 끝에 이르러는, 결국 ‘내가 한 평생이란 말을/ 이 땅에 남겨두고 갈 것이’기 때문에 작별을 고하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등을 두드릴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자의 사유이며, 시인 앞에 열려 있는 정서의 길이 아닐까 싶다.

 이창윤 시인의 시에는 운문성보다는 산문성이 돋보여지고 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시적 호흡이 비교적 빠른 편이라기보다는 느린 편이 더 있고, 따라서 호흡도 일반적으로 차분차분하다. 급하게 흐른 물살 같은 표현은 드물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시작부터 주제의 정점까지 직선으로 가기보다는 우회적 방법이 거의 지배적이다. 이런 등등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판단이며, 단점을 짚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돋보이는 특징을 지목해 본 것이다.                

 한 편 한 편의 시마다에 무게 있는 의미들이 담겨 있고,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묘수가 담겨 있다. 더구나 문학의 길을 걸으며 오랜 동안 보람과 노력의 詩歷을 쌓아올린 시인의 시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음도 마음을 편케 한다.

 의사 시인으로서 시집에 조금도 의사 분위기를 피우지 않은 이창윤 시인은, 의사로 근무하던 병원에서 시인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을 이에 짐작해 볼 수 있다.   
 
 
 
 장효영(1971- ) 2004 미주중앙신인문학 시 당선자
 

소망 베이커리와 코끼리부동산을 연결하고 있는
좁은 길 구석에 달걀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파는
여자가 있다 거의 매일
누런 재생용기의 달걀판이 안정감 있게 달걀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덤으로
졸고 있는 여자의 고단한 삶도 버텨주고 있다.
그 정면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에 햇살이 멈추어서고
여자의 그늘진 자리가 더욱 분명해지는 오후

 

내가 길을 건넜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웬일인지 달걀이 반쯤 줄어져 있다 여자는
움푹 팬 볼을 실룩거리며 깨진 달걀을 치우고 있다.
자신의 상처인 듯이 아프게 달걀을 닦아내고 있다.
붉은 신호등 아래선 사람들은 잠시, 무너진
하루의 피라미드를 엿보며 지나가고

 

여자는 아마도 그 순간 아슬아슬한
보화의 꿈을 꾸었나보다.

                   2004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장효영의 <생활에 틈> 전문
 
 〈생활의 틈〉에 삶의 고달픔이 절절히 배어있다.〈소망 베이커리와 코끼리부동산을 연결하고 있는 좁은 길〉, 〈누런 재생용기의 달걀 판〉, 〈졸고 있는 여자〉, 〈여자의 그늘진 자리〉 등에 고달픈 삶이 서려있다. 더구나 〈여자의 고단한 삶〉을 그나마 덤으로 버텨주는  것은 〈누런 재생용기의 달걀 판〉뿐.
 둘째 연으로 접어들면서 사태가 변화된다. 〈내가 길을 건넜다가 돌아오는 사이〉로 변화의 합리성을 제시한다. 아마도 졸고 있던 여자의 실수였을까? 달걀이 반쯤 줄었다. 팔린 것이 아니라 깨졌다. 꿈과 현실이 맞지 않는다. 설상가상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길 구석에서 달걀을 파는 여자의 고단한 삶이 전지적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직접묘사이다. 이런 수법에서 살아있는 감동을 얻게 된다. 이와 비슷한 소재로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계란장수이야기가 있다. 계란을 잔뜩 짊어지고 장으로 가던 길에 계란지게를 받혀놓고 좀 쉬다가 깜박 잠이 든 사이, 꿈속에서 계란 팔아 돼지를 사고, 돼지 팔아 소를 사고, 소를 팔아 밭을 사서 참외를 심고, 원두막에서 지키다가 참외를 따는 녀석을 작대기로 후려치는 꿈을 꾸다가 그만 지게작대기를 치는 바람에 지게가 쓰러지면서 계란이 몽땅 깨졌다는 이야기-이런 소재가 연상된다. 어쨌거나 표현이 다양하고 섬세한 산문율의 자유 서정시이다. 마지막 연 두 행은 설명조를 띤 묘사로 보인다.
 이런 시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깔리는 정경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특히 이민의 삶은 이보다 더 고달픈 삶인지도 모른다. 별로 길지 않은 시를 통하여 인생의 단면을 심도 있게 그려내는 시인의 예리한 현실감이 돋보인다. (발췌 2004. 2. 20. 미주중앙일보)

 김종길(金宗吉 1926- ) 시인, 영문학자, 경북 안동 출생, 혜화전문 국문과 졸업(1947), 고려대 영문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영국 세필드대학에서 영문학 연구, 청구대학, 경북대학, 고려대학 교수, 1955년 <현대문학>에 “성탄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 

A. 어두운 방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B.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C.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D.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E.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F.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G.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H.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I.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J.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聖誕祭) 전문

 22행의 전 연으로 짜인 내재율의 자유 서정시이다. 우리들이 살던 한국의 토속적인 정경이 과거와 현실에 맞물려 한 폭의 단막 영화처럼 어려 있다. 어찌 보면 수필이나 소설의 일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착각이다. 수필이나 소설이 주는 분위기를 지나서 詩情의 昇華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겪는 일상에서 소재를 택하였고, 시어도 일상용어로 쓰였으며, 구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을 하고 있으면서 회상을 곁들이고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우리의 가슴에 들어와 감동의 불을 지펴주고 있다.
 차분하게 순수한 사랑에의 그리움이 담겨있다. 이것이 시인이 노래하고자 하는 포인트이다. 비유적 심상보다 묘사적 심상에 의한 서술적 표현을 주로 하고 있다.
 F 연을 통하여 과거에서 현재(시각적)로 추억과  눈앞의 풍경(공간적)으로 이어지는데 대한 교차점을 이루고 있다.
 성탄은 누구의 가슴에나 흰눈과 함께 성스러운 정경으로, 성스러운 사랑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히 이 시에서〈성탄제〉에 내포된 의미는 '성스러운 사랑'이다.

  A 연의 '바알간 숯불'과
  D 연의 '그 붉은 산수유 열매-'는 '사랑'의 감각적 표현이다.

  B 연의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은
  E 연의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과 같은 표현이다.

  I 연의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J 연의 '내 혈액'과 연결을 이루며, 차가운 눈과 함께 촉각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매체는 '성탄제'와 '눈'이다.

  무의식중에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 이토록 감동을 주는 정신적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영역이다. 이 점이  김종길 시인의 시풍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귀한 초점이 된다.


 윤휘윤(尹輝允 1940-) 재미시인, 경북 예천 출생, Intl Christian University 졸업, 현재 미연방공무원(LA 근무), 1989년 <심상>지에 <이민시대>, <꿈>, <산행> 등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 백향목, 글마루 동인, 제7회 가산문학상 수상, 시집 <이민시대, 홍익출판사, 1990> 


세코야 숲 속에 엉켜있는

늙은 두 나무

저 나무들도 백지 한 장에 계약서를

주고받았을까

 

등 부비며 함께 살자고

빽빽하게 작성된 계약서 한 장 내밀 때

홀라당 넘어간 젊음이 아롱거린다

 

계약서 한 장에 매달려 살아왔고 살아졌는데

돌아눕는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며

외롭고 서러워지는 이 까닭은 무엇일까

그래도 천만 다행인 것은

각방 쓰자고 선언했다는 친구도 있다는데

계약서가 살아 있다

 

저 나무들도 죽는 날까지 함께 하자고

무언의 약속을 했으리라
 
                                       윤휘윤의 <계약서> 전문


 사람과 나무, 비유에서 나무와 인생을 본다. 계약한 대로 살지 못한 인생에서 받는 서러움을 나무에 이입하고, 결국 살아 있는 계약서는 각방 쓰자고 선언했다는 친구를 계약대로 돌아오게 하리라 기대하고 있음에랴. 부부 인생을 나무들에 비유한 텃취가 흥미롭다. 이런 각도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묘미가 윤 시인에게는 있다. 이토록 사물을 텃취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윤 시인은 능숙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