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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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이성열 시집 <구르는 나무>를 읽고

 

 

20191026, 미주문학상 수여식의 뜻 깊은 자리에서 수상자인 이성열 시인의 시집 <구르는 나무> 출판기념을 하는 중에 서평을 하게 되니, 한결 대견하고 영광스러운 기쁨을 가늠하기에 너무도 감동스럽다.

 

이성열 시인은 먼 훗날에라도 어느 모르는 독자에게 읽혀 심심풀이에 대신 할 수 있다면 이런 것도 하나의 시의 효용이 아닐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는 시를 쓰고 있다.” 고 자신의 시작관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시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은 그대로 작가의 고백이다.


새벽안개를 헤치고

낭창낭창한 허리로

주위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는 그대는

한 마리 잘 빼어난 꽃사슴과도 같다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파랑새와도 같다 그대는

한창 피어난 만인의 꽃

 

나도 그 버들 같은 허리에 감겨

꿈꾸어 보고 싶은 뭇 사내들 중 하나

                                                                   -<모르는 여인에게> 전문

 

시인은 그 버들 같은 허리에 감겨 꿈꾸어 보고 싶은 뭇 사내들 중 하나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다. 그 허리는 누구의 허리인가? 영락없이 낭창낭창한 버들 같은 여인의 허리이다. 그 여인에게 끌리는 시인의 마음만이 아니라 뭇 사내들의 관심사까지 휩쓸어 한꺼번에 뭉뚱그려 끌어내고 있다. 이야말로 인간본연에서 울어 나오는 절절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솔직한 고백으로부터 문학의 힘은 거침없이 발산된다. 그러므로 문학의 힘이야말로 순수에서 출발한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창시자인 스테판 말라르메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시정신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시정신이야말로 그만큼 순수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시의 능력에는 신성불가침의 세계가 열려있어서 다른 세력들이 그 중심을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사는 고로 영어로도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지 않아서 쓰다 보니 그 중 몇 편이 미 시단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어 선별하여 싣기로 하였다고 말하는 이성열 시인은 미 주류사회의 시단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기울이고 있는 시인이다.


한국어로 쓴 시나 영어로 쓴 시나 차분하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현학적이거나 내세우는 점이 전혀 없다. 있는 그대로에서 정서와 감동을 노래한다. 그러기에 시행마다 구구절절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 지나치게 재주를 부리거나 자신을 내세운 점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대로의 순수한 감동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시의 바탕이 참으로 진실하다. 시만 진실하지 않고 그 시를 쓴 시인도 부러움을 살 만큼 진실하다. 그러므로 그야말로 알짜배기 시인임이 틀림없다.


사막을 가로질러 기어가듯이

데굴데굴 구르는 나무를 보고

비웃거나 손가락질 하지 마

어떤 면에선 우리의 삶도

거꾸러져 구르는 나무 같지

짠물 항구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무논과 밀 보리

보리 고개 언덕이 있는 화성으로

그리고 학교를 따라 서울로

직업을 찾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삶의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왔잖아

살다 보면 변덕스런

바람이 부는 대로 또 어디론가

굴러가게 될 거야, 살다 보면...

                                                                        -<구르는 나무> 전문

 

이 시도 자신의 삶의 고백이고, 자신의 고백이 그대로 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쉬운 말로 쓰여 있어 독자를 마냥 편하게 하고 있다. 시의 생명은 상징과 생략에 있다고 하는데, 이 시들에서는 상징과 생략의 흔적이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꿰매거나 기운 자국이 없는 하늘과 같은 모습이다. 이를 흔히 천의무봉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을 안겨주는 매력을 듬뿍 지니고 있다. 시인이 태어나서 현재까지의 삶과 앞으로를 내다보는 미래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붉은 칸나 활짝 핀

모래 뜰 모래보다 흰

해오라기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

옥양목 치마저고리 입으시고

걸어 다니시던

나의 인자하던 할머니

평소 새처럼 날아

손주 보러 오고 싶다던 그녀가

소원을 이루어

내가 사는 집 정원으로

저렇게 걸어오시나 보다

                                                            -<해오라기> 전문

 

해오라기는 그 빛깔에서 옥양목을 연상시킨다. 생육보다 발이 고운 무명의 피륙으로 빛이 희고 얇다. / 옥양목 치마저고리 입으시고/ 걸어 다니시던/ 나의 인자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한 마리의 해오라기에 대칭하여 조화시키고 있다. 이야말로 극히 아름답다. 여기서 시의 백미를 느끼게 된다. 따라서 <붉은 칸나> <모래보다 흰> <해오라기의 깃털> <옥양목 치마저고리>의 여러 색깔에서 다양한 아름다움이 연상된다. 그런 정원을 평소 새처럼 걸어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이야말로 그 모습 그대로 한국적이며 동양적이다. 이렇듯 매사에 감동적 시적 적용을 하는 이성열 시인의 고매한 문학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펜을 놓는다.(최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