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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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유수일 시집 <매듭 만들기>를 읽고



 서정시집 <매듭 만들기>의 유수일 시인과 필자 사이에 3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자주 만나는 때도 있었지만 한 동안은 그렇게 자주 만나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는 일이 서로 다른 탓이었다. 그렇지만 30년의 세월이 넘도록 유수일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줄을 통 몰랐다. 유수일 시인이 시를 쓴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필자의 무관심 때문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누구의 과실인지 좀처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요 몇 달 사이, 아니면 근 몇 년 사이, 필자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시를 썼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며칠이나 몇 달 사이에 급조될 수 있는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는 익을 대로 익은 오고백과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수일 시인은 필자가 모르도록 혼자만 알고 시심에 심취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혼자 느끼고, 혼자 감동하고, 혼자 기록하고, 기록한 후에는 그 오랜 세월 동안을 혼자만 감동하고, 혼자만 즐겨 오면서 지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조금도 기대 해 본 일이 없던 분에게서 시집 <매듭 만들기>를 받았으니 그 감동과 기쁨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다.
 더구나 시집 독후감을 부탁 받고, 적지 않은 책망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토록 시를 써왔는데도 그걸 몰라주느냐는 책망이 팔자의 가슴에 매질을 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용서를 비는 마음을 담아 필자 나름의 독후감을 기록하고자 붓을 들었다.        
      
진분홍꽃 자주색
명주 이불을
내려 깔며

석양은
수즙은 새색시처럼
마냥
붉어 있다

Zumma Beach가
머얼리
내려다보이는
둔덕

창이 커다란
찻집

아내가
석고상인 양
말이 없다

예순의 뒤안길에서
뒤돌아 몰래 흘리는 눈물
그것이
노을 같은 것임을
나는
짐작만 한다

창으로 난
불들은 사양을 하고

뜨거운 차를  
다시 부탁하자

아내가
무거운 머리를
실어 오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나는
빈 어깨만
빌려줄 뿐이다
                  <노을> 전문

 석양을 진분홍꽃 자주색으로, 수줍은 새색시로, 아내를 석고상으로, 아내가 몰래 흘리는 눈물을 노을 같은 것으로......이렇게 표현하는 시인이야말로 보통 시인의 안목을 넘어 선 시인 중의 시인이랄 수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시의 생명은 상징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표현되는 상징을 흔히 메타포어(metaphor)라 하지 않는가. 이는 직유보다 한 단계 발전된 비유법으로 사물의 본 뜻을 숨기고 주로 보조관념들만을 간단하게 제시하는 표현으로 시에서는 절대적 요소로 자리매김 하는 수사법이다. 이를 다른 말로는 은유(隱喩)라고도 한다. 한편 <눈물을 노을 같은 것>의 표현은 은유가 아니라 직유(直喩)이다. 직유는 두 가지 유사한 인상을 직접 대응시켜 비유하는 것으로써 주로 ‘...처럼’ ‘....같이’ ‘,...듯’ 등의 표현인데, 직유는 손쉬운 표현이기는 하나, 너무 보편적인 보조관념에 빗대어 비유하면 진부한 느낌을 주게 되므로 참신한 비유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의 <눈물을 노을 같은 것>의 표현은 매우 참신한 표현이다.
 여기에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시에는 상징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다. 그것을 생략(省略)이라고 한다. 어떤 글이든지 생략이 되지 않으면 너저분하고 지루하다. 그만큼 생략은 글의 초점을 선명하게 제공한다. 이와 같이 시의 생명을 상징과 생략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유수일 시인은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듯하다. 두 말할 것 없이 시를 쓰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명령에 의하여 작업이 진행되지만, 시의 세계에서의 역사, 유파, 기교, 방법, 시어 등에 관해서 아는 것은 시를 쓰거나 감상하는데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시를 감상하는 독자는 모든 면에 샅샅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시에 등장한 사람은 <석고상인 양 말이 없는> 아내이다. 이 시인은 아내의 모습에서 노을을 본다. 눈 속으로 몰려드는 노을에서 아내의 황혼을 보는 시인의 마음이 선연히 보인다. 무거운 머리를 실어오는 아내의 무거움을 받아주는 <나는/ 빈 어깨만/ 빌려줄 뿐이다>에서 서로 애정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지나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부부는 짙은 황혼 빛을 받으며 나란히 걷고 있다.                                                                                                                                                                             
주여!

가진 것들을
무겁게 하시며
버리는 즐거움을
알게 하소서

모자라서
교만치 않게 하시며

가난해서
감사를 알게 하소서

있어야 할 곳과
가야할 곳에

불을 밝히시며.......

당신의
다른 이름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오랜 기다림에도
졸지 않게 하시며

내 십자가를
더 무겁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끝이 없듯이

내 기도의 시간도
끝이 없게 하소서
                <기도 1> 전문

 진실한 기도문이다. 조금도 어렵지 않게 쉬운 언어로 우리의 가슴속을 파고든다. 얼마나 절실한가. 나의 소원을 주님께 부탁하는 일이니만큼 경건하고 절실할수록 감동과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주님의 또 다른 속성은 ‘사랑’이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의/다른 이름이/사랑임을 알게 하소서”(God is Love)라 했다. 마음 속 깊이 주님을 모신 자의 시심(詩心)이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점이 신앙시의 기본이다. 신앙 시(信仰 詩)는 필요 이상의 상징과 생략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경건하고 진실한 기도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금방
다녀올 것처럼
잠옷 바람으로
나간 녀석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전에는
비에 젖어도
술에 젖어도
밤을
넘기는 일이 없었는데......

이제
무슨 말로도
그를
말릴 수 없음을 안다

제법
익숙한 솜씨로
멀리까지 찾아 나서야
녀석을
만날 수 있다

어제는
종탑도 없는
시골 교회

아스라이
눈 내리는 언덕길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는 놈을
겨우
찾아 데려왔는데......

오늘은
까만 머리
펄펄 휘날리며

겨울 바닷가에
오래도록
서 있는
녀석을 본다
             <겨울잠> 전문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잠옷 바람으로/나간 녀석이/(1연 2, 3행)” “겨울 바닷가에/ 오래도록/서 있는/녀석을 본다”(끝연) 는 극히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잠옷 바람으로 겨울 바닷가에 오래도록 서있는 녀석이라면 몹시 추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는/종탑도 없는/시골 교회//아스라이/눈 내리는 언덕길에/퍼질러 앉아/울고 있는 놈을/겨우/찾아 데려왔는데”로 보아 녀석에게는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성 싶다. 그 사연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시에서 그 사연이 무엇이라고까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여튼 투명하지 않아서 답답하다. 과연 녀석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가물가물
살수록
멀고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을
끌어 모아 보지만
너는 분명
내 딸이 아닌
엄마로 보여지는 슬픔
하늘은
눈이 아프도록 시린
계절이지만
엄마는
늘 깊은 가을로만 사신다
누구랴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의 터널 끝에서
기다리는 이는
하루하루
내딛는 걸음걸음은
다시 옛날로
돌아올 수 없지만
참 긴 세월
한 번도
얹혀 살아보지 못한 아픔
오늘은
자카란타 보라색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작은 골목길을
많이 작아진 손을
꼭 잡고 걸어보리라
그리고
오늘 하루는
정말 착한 딸이고 싶다
                   <엄마> 전문

 딸은 자라서 엄마가 된다. 일단 엄마가 된 후에는 다시 딸은 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엄마는 되지 않는다. 계속 엄마로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엄마는/늘 깊은/가을로만 사신다”는 엄마는 언제고 가을 낙엽처럼 떠나야 할 준비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엄마에게는 “참 긴 세월/한 번도/얹혀 살아보지 보지 못한 아픔”이 있다. 새끼들을 안아주고 사는 삶이긴 했지만 엄마는 누가 안아주는 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토록 시인은 엄마의 삶을 녹녹한 모습으로 감동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런 엄마 이지만 “정말 착한 딸이고 싶다”고 절절한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바람이 분다
지들끼리
서로 등 떠다밀면서
바람이 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산동네 마다
어둠을 뿌려놓고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휘파람 소리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시름시름 앓아가는
떡갈나무    

잎사귀마다
가을을 데려다 놓고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뒷걸음질
바람이 분다

창을 열면
낙엽처럼
수북이 쌓아놓고 간
그리움

가슴이 작아
다 담을 수 없는

아내가
누가 달래도 듣지 않는
울보가 된다

바람이 분다
           <바람> 전문

 “누가 달래도 듣지 않는/울보가 된다”의 주체는 아내이다. 아내를 누가 달래도 듣지 않는 울보로 만드는 시인이 여기 있다. 이 시인은 아내를 바람으로, 바람의 울보로 만드는 놀라운 묘수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평범하지 않은 재주꾼이다. 이미 아내를 울보로 만들기 위한 주위환경을 시 전체에서 구성해 놓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내를 울보로 울리고 있는 시인의 일상은 얼마나 감격하는 일이 많을까? 이 시는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구성하면서 인생의 절절한 아픔을 꿀꺽꿀꺽 참아내는 고통의 인내가 있다. 그러면서 계속 그런 바람을 불게하고 있는 것이다.
 
산과 산 사이
들과 들 사이

길은
용케도
가르마를 해가면서
휘어져 있다

젖 큰
서양 아줌마가
금방 구워 낸
빵을 들고 나올 것 같은
예쁜 마을

포도 실은
마차들이
수채화처럼
졸고 있다

목청이 좋지 않은
들새 몇 쌍이
시끄럽게 모여 사는
상수리 나무숲

아직도
덜 익은 열매들이
가을을 연습하고 있다

아득히 먼
어느 날

머리 곱게 장식한
인디언 처녀가
물 가지러 왔을
호수

지금은
마을에서
멀리 쫓겨나

갈대로
겨우
얼굴만 가리고 있다
                  <길1> 전문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담긴 계절은 가을이다.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 극히 낭만적이다. 그런 분위기에 유머러스하고 풍만한 웃음을 안은 “젖 큰/서양 아줌마가/금방 구워낸 빵을 들고 나올 것 같은/예쁜 마을”이 등장한다. 또 이곳은 “머리 곱게 장식한/인디언 처녀가/물 가지러 왔을/호수”였기도 한 정이 깊은 마을이기도 한 곳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 풍경에 서양 아줌마가 등장하고, 머리 곱게 장식한 인디언 처녀가 물 가지러 왔을 호수라면 이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마치 서양의 시인 보들레르나 릴케의 시를 읽는 감동에 마음이 뛰지 않는가? “지금은/마을에서/멀리 쫓겨나//갈대로/겨우/얼굴만 가리고 있다”의 이들이 얼굴만 가리고 있는 이 곳은, 갈대를 통해 가을이 진하게 내리고 있는 바로 그  “길”이 아니겠는가    

황소 등짝 같은
들판을
휘둘러 놓고
겁이 난 길은

쪼그려 앉은
뒷산
사타구니 사이로
숨을 할딱이며
달아나고 있다

이른 아침 마실로
다리 아픈
참새 식구들

나무에도 못 오르고
길가 풀 섶에
쉬고 있는데......

오순도순
도란도란
키가 없는 버섯들
숨어사는
재미가 그만이다

아침 이슬로
멱 감고
감기 들라
서로 등
토닥거려 주고

이웃이 제법 많은
네 잎 클로버
꽃샘바람이 싫다

제 발자국도
못 찾아
가끔씩
되돌아가는
마을 Bus

老松이
기다리다 지쳐
반쯤 누어있다
             <길2> 전문

 활유법 또는 의인법이 활용된 수사법을 통해서 코믹하게 길을 묘사하고 있다. 1, 2연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키가 작은 버섯들을 숨어 사는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서로 등 토닥거려주는 네 잎클로버, 가끔씩 마을 Bus가 되돌아가는 길 위에 기다리다 지쳐있는 노송을 본다고 마치 시골 풍경을 스케치하듯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모두 의인법 아니면 활유법을 사용하여 마치 우리네 인생을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산이
물장구치다
놓쳐버린 물

계곡을
숨바꼭질 하다가

폭포를
만나면서
하얗게 질려 있다

구름 몇 놈이
老松을 끌어안고
씨름하는 산모롱이

까까머리
기 승(僧) 하나가

저보다 큰
바랭이를 지고 간다

山寺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
꼬부랑 길

아직도
종소리가
따라붙는데......

누가
일부러
먹물을
잘못 튀겼을까

석탑 모서리
하얀 대낮에


까만 보름달
             <백자> 전문

 시의 중심은 마지막 두 연에서 찾을 일이다. “석탑 모서리에/하얀 대낮에//왠/까만 보름달”을 보면 “하얀 대낮”과 “까만 보름달”이 백과 흑으로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은 백자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흰색 또는 까만색으로 보임은 무엇 때문일까? 이 색은 시인 자신의 심령의 바탕에 떠오르는 색깔일 수 있다. 원래 백자는 이씨조선 시대 자기공예의 절정이고, 고려시대 자기 예술의 절정은 청자임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이 시 끝 부분에 까만 보름달로 비유된 사물은 오직 시인만이 품고 있는 내면에 뜬 보름달이 아닐까?   

 
하이얀 소복으로
울다 지친
청상 같은 꽃

젖가슴 깊이
몰래 감춘 향기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계절

마켓에 가면
나는
매번
아내를 잃어버린다

우유와 쿠키가 있는
코너에도
아내는 없고

무엇에 쓰는지
자주 섞갈리는
카드 코너에도
아내는 안 와 있다

아!
저기

눈이 하얗게 내린
들녘

외발로 선
학처럼
아내가 서 있다

아니
국화꽃인가......
             <국화가 있는 마켓> 전문

 이 시는 아내의 모습에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아내를 외발로 선 학으로, 아니 국화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현실을 떠나 있다. “우유와 쿠키가 있는/코너에도/아내는 없고//무엇에 쓰는지/자주 섞갈리는/카드 코너에도/아내는 안 와 있다” 그래서 잃어버리기만 하는 아내는 “아!/저기//눈이 하얗게 내린 들녘/외발로 선/학처럼/아내가 서 있다”고, “아니 국화꽃인가.....”고.  이처럼 아내를 미화한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학은 십장생의 하나로 선녀의 모습이요, 국화꽃은 그 향기가 일품으로, 사군자의 하나로 꼽히는 꽃이다. 시인은 “아!/저기//눈이 하얗게 내린/들녘”으로 아내를 부르며 달려갔을 것이다. 이 시는 아내를 미화한 작품으로 백미에 속하는 뛰어난 것 중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여겨진다.      

역원이
점심 먹으러 가면

잠자리만
떼로 몰려와
빈 선로를 지키는
간이역

먼데
山寺의 종소리가
바람에
얹혀오면
제일 먼저 손 흔드는
동네 입구
느티나무

가끔
들꿩이 길을 잃고 헤매다
등덜미 잡혀오는

홍시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빨갛게 터지는
가을

내 아내는
매일
고향엘 간다

시골 Bus에서
내려
서너 시간을
발을 팔아야 하는 곳

아내는
종종
할머니 이야기도
이고 오고
가을도
안고 온다                                                
          <아내의 고향> 전문

 이 시는 두 도막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연에서 제 5연까지는 고향을 한 폭의  풍경에 담고 있다. 또 6연에서 끝 연까지 매일 고향엘 가는 아내는 “시골 Bus에서/내려/서너 시간을/발을 팔아야 하는 곳”인 고향엘 다녀온다. “아내는/종종/할머니 이야기도/이고 오고/가을도/안고 온다”. 아내가 안고 오는 가을엔 간이역, 종소리를 바람에 얹어 보내는 산사가 있고, 동네 입구에는 제일 먼저 손 흔드는 느티나무도 있다. 가끔 들꿩이 등덜미를 잡혀오기도 하고, 홍시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빨갛게 터지는 생동감과 색채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고향 할머니의 이야기와 함께 그런 가을도 안고 온다. 이렇듯 시인은 고향의 가을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풍성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

          
쓸어낸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쌓이는 눈

“죄 짓고
사는 이치도
아마 같을 거외다“

노스님은
자기 키보다
큰 대빗자루로
헛손질만 하신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너인 것도 아니고
나인 것도 아니고

산인 것도 아니고
물인 것도 아니고......

시주 따라 나선
꼬마 승을
기다리다 지친
법고가
때 늦은
울음을 운다

눈 감아야
보이고

비워야
채워지고

귀 막아야
들리는

겨울
山寺에

자욱히
자욱히

눈만
내린다
        <눈> 전문

 이 시는 불성이 자욱하게 끼여 있는 작품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분위기가 4, 5, 6, 8, 9, 10연에 짙게 깔려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불교경전 <반야심경>에 나오는 명구로, 물질적 세계와 평등무차별한 공 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세계를 나타낸 부분이 앞에 지적한 4, 5, 6, 8, 9, 10연에 속하는 표현이다. “시주 따라 나선/꼬마 승을/기다리다 지친/법고가/ 때 늦은/울음을 운다”에서 이 시의 절창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무생물인 법고가 때 늦은 울음을 운다고 무생물을 의인화하는 표현의 높은 기법을 활용함에 놀라움의 느낌을 더하고 있다. 이 시는 그만큼 불심에 심취할 때 더욱 묘미를 나타낸다. 
 
유수일 시백께
불초, 제 주위에 이런 분을 모시고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더욱 정진하시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시는 삶은 매우 귀중하고 보람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의 작은 소견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좋은 작품 보여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최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