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천  (시인, 경기대 대우교수) 교수님의 다음 글을 정독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의미구조 탐색

*[시조시학 2002년 봄호에 [한국 현대시조의 전통성 탐색
―시적 의미 구조를 중심으로]으로 발표되었으나, 제목을 바꾸어 [문학과 창작]에 재수록하였음

1.


한국 현대시조의 전통성을 탐색하기 위하여 필자는 먼저 두 가지 점을 전제한다. 그 하나는 예술창조자와 향수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의 발전사를 참조하면, 예술은 발전할수록 창조자와 향수자의 거리를 지속적으로 벌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할 수 있다. 당초에 사람들의 예술적 취향에 부응하여 그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계발되기 시작한 예술은, 그 전담자의 미학적 경험과 예술 창작의 기술성이 증진함에 따라 일반인들의 예술적 기대를 훌쩍 뛰어넘게 되었다.
그리고 고급한 예술을 향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역시 예술가에 못지않은 심미적 감성과 경험을 훈련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근대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전문화되었던 소수의 창조자와 향수자의 인구가 대폭 확대되면서 예술 창조자의 소재 개발이 다원화하였고, 나아가서는 심미적 기준조차 변성시키는 단계로 개방되었다.
평면에서 입체로, 입체에서 설치로, 설치에서 환경으로, 도구의 개념을 다원적으로 확대한 회화예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은 향수자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전복하는 광범위한 의식의 혁명을 일으켜 왔음을 세계 문예사조의 흐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달리 도구나 형태가 고정화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으나, 오히려 끝도 없고 바닥도 없는 의미언어의 추상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다른 예술을 선도해나가는 추진력을 보여 왔다.
또 다른 전제는 세계의 예술이 그동안 더 이상 밀어붙일 수 없을 만큼 혁명을 추구해 왔기에 오히려 이제는 그 내용면의 소프트웨어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추구해온 표현의 혁명은, 이른바 프로이드나 융에 의존한 인간 심리의 분출을 기폭제로 삼아 슈르리얼리즘까지 진전하였으나, 근원적인 인간 심리로서는 그 이상의 외연을 확장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음을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예술은 이제 지역적인 토착문화를 토양으로 형성된 개성적인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으로 새로운 예술의 틀을 짜낸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같은 것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는 게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렇게 범위를 좁히면 그동안의 예술 혁명은 도구쪽의 혁명에도 추진력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아프리카 토속공예가 현대조각에 끼친 영향이나 흑인 영가류나 지역국가의 민요류가 현대음악에 자양을 공급하였듯이, 고유의 문화풍토에서 독특한 생명력을 갖고 발전해온 특징적인 지역문화가 앞으로 진행될 세계 예술의 소프트웨어 혁명의 원동력이 되리라 전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대시조는 현대시와 함께 이른바 1900년대의 개화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의 경우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시의 도입과 그 영향 아래 정형성을 고려하지 않는 자유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엄격한 율격의 한시나 자체의 율격을 지닌 고시조에 비해 현대시는 문자 그대로 자유롭게 서술할 수 있다는 자유시의 표현구조로 하여, 특히 새로운 예술 창조자들에게는 첨단적인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로 하여 예술하는 멋과 맛을 동시에 가져다주었기에 대환영을 받았다. 나아가 개화기의 교육 개방과 신분의 자유화로 하여 예술 창조자층이 급속도로 확대되었으며 그 시상의 내용이나 전개 역시 다양하였기에 문화 격변기의 총아로 군림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하겠다.
이에 비해 현대시조는 발생기서부터 한동안 주춤거릴 수밖에 없을 만큼 시대적 환경이 열악하였다. 당초에는 고시조를 답습하는 소수의 전통주의자와 시조를 민족문화의 구심점으로 삼은 개화기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현대시조는 한동안 부흥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그 모범 답안을 작성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현대시조를 둘러싸게 되었다. 우선 그동안의 고시조와 현대시조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한 변별성이 대두되었다.
창사로서의 기능이 강했던 고시조로부터 악곡과의 연결 고리를 단절시키기 위한 작업들이 시도되었고, 음악이 아닌 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위상을 확립시키고자 하는 학문적 연구가 뒤따랐다. 또한 현대 자유시의 유행과 연계되어 그 내용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시조단 내부에서부터 불거져 나왔다. 과거 유교문화의 유산인 음풍농월격인 내용에서 벗어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의미를 담고자 하는 자기 변혁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시적 구조와 내용을 갖추고자 하는 혁신적 변화의 모색은 오히려 시와 시조의 변별성 확립에 크나큰 짐이 되고 말았다. 현대시조는 시와의 변별성을 오로지 정형시라는 외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창사로서의 시조의 원형은 노래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것으로, 문학적인 면의 정형성을 추출해 내기에는 부적당한 것이었다. 악곡상의 특성을 배제한 시조에서 문학적 형태를 정립시키기 위한 일환의 노력들은 많은 시행 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현대시조를 창작하는 데 오히려 혼돈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한국의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데 등장하는 제일의 문제점은 이러한 현대시조의 발생기적 특징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2
현대시와 현대시조는 어떻게 다른가. 앞에서 말한 대로 현대시는 자유롭게 써내는 자유시고, 현대시조는 특유의 정형성에 의지해 써내는 시라 한다면,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변별성을 찾아내기란 더욱 지난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현대시와 현대시조는 그 창작 인구의 친목단체도 별도이고, 발표 매체도 별도이고, 창작인의 호칭이나 창작집의 호칭도 별도이다. 그러나 정형성을 제외한 채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와 시조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미지, 오브제 등과 같은 시 장르의 특색을 천착할수록 시 장르와 시조 장르의 구분이 퇴색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된 장르의 필요조건인 독자적인 표현구조를 확보하지 못한 채 도식적으로 외형적인 정형성에 의지하거나 자유성에 내맡긴 채 세련된 표현구조를 개발하지 못했기에 한 세기가 달라진 지금까지도 그 변별성을 마련하지 못했다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현대시와 현대시조 모두에 해당되는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문학론의 고전적인 명제의 하나에 훌륭한 작품은 그에 걸맞는 형식을 창출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훌륭한 작품이란 내용상의 의미 구조가 그 형식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시인의 정신과 영혼,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시적 논리가 바로 시의 내적 의미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현대시조가 외형적 정형성에만 치중하여 논의되어 왔기에, 이러한 내적 구조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다고 보여진다.
시조는 오랜 창작 역사를 통해 3장 6구의 형식 안에서 훌륭한 내적 의미구조를 갖추어온 전통을 갖고 있다. 현대시조가 법고창신의 방법으로 외형적 정형성뿐만 아니라 내용상에 있어서도 정형성을 내포한 의미구조를 부각시킨다면 현대시와의 변별성을 가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에 있어서 내적 의미구조의 파악은 바로 창작 소프트웨어와 직결된다. 현대시 역시 초창기에는 창작기술론에 관한 저서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시론 역시 종류가 많지 않았으며 그 상당수는 서구의 저서와 일본의 저서를 우리 현실에 적당히 맞추어 편집한 책이었기에, 원론이나 지엽적인 테크닉의 설명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정작 시의 표현체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한편의 시는 몇 행으로 이루어지는가, 그 내용 전개는 어느 부분에서 바꾸어야 하며, 행과 연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와 같은 기본 분야는 자작시 해설로 대충 메워나가는 현실이었다.
대다수 시론의 내용이 이러하다면, 이제까지의 창작교육은 몸집을 갖추는 의미 구조를 외면한 채 팔다리를 휘두르는 지엽적인 기술론에 의지해 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육으로는 창작은 물론 시에 대한 미학적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시인은 타고난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우리 창작교육의 풍토에서는 훈련된 시인이 아니라 자생적인 시인이 출현하고, 훈련된 고급 독자가 아니라 재치문답 테스트와 같은 3행시의 독자만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창작교육의 불구성을 바로잡을 대안은 없는 것인가. 필자는 오랫동안 대학과 문학사숙에서 현대시 창작을 강의하면서 시의 표현구조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필자의 창작 체험과 창작 강의 체험을 기초로 구상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이냐’ 라는 문제에서 ‘어떻게’에 치중한 방식이었다.
논의의 요점만 간추리자면, 시의 외형상 표현체제는, ‘도입―전개―전환―마무리‘의 4단으로 구분하되 평균 15행 내외의 길이를 기본으로 삼는다. 따라서 도입부와 전환부와 마무리 부분에는 성격상 2~3행 정도의 길이를 배당하며, 전개부에 7~8행을 중점 배치한다. 따라서 한편의 시는 도입부와 전개부가 합쳐진 10행의 A, 전환의 B, 마무리의 C로 크게 3등분된다. 다시 말해 전개부가 끝나면 잇달아 전환하고, 전개와 전환을 결합하여 마무리를 짓는다. 기능별로는 시의 도입부는 이미지, 전개부는 상상력, 전환부는 강조, 마무리는 알레고리가 추동력이 되면서 갈등에서 화해로 진전된다.
도입부에서 오브제를 제시함으로써 구축된 이미지는 전개부로 이어지면서 오브제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상상력을 획득하게 되고, 이로써 완성된 가설의 내용을 강조하는 장치로서의 전환이 이어지며, A와 B를 수렴함으로써 제시된 오브제는 시인의 의도대로 독자에게 다른 내용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 중 도입부의 이미지 제시가 초심자의 작품을 지도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시 장르를 막연한 심정의 토로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대체로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로 도입부를 전개하므로 한 행을 쓰면 다음 행에는 무엇을 쓰나, 하는 불안감이 팽배하고, 비슷한 어휘를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마련이다. 창작교육에서 시의 이미지는 강조하지만 그 이미지를 어디에 배치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기에, 사적인 감정을 지루하게 전개한 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잘못된 창작습관에 길들어져 있는 것이다. 도입부에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식은 빠른 시일 안에 작품의 품격을 높이는 데 최상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다음의 예시를 보자.
민박집 뒷방 툇마루 아래 가지런히 쟁여둔 장작을 바라본다 ①
불을 품고 얌전히 누워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②
장작 사이 벌어진 틈새들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③
토해낸다 캄캄한 구멍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보인다 ④
욕망의 마른 혓바닥들이 꿈틀거리며 ⑤
한꺼번에 기어나올 것만 같다 ⑥
손만 갖다대도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이다 ⑦
제멋대로 몸뚱이를 굴릴 것이다, ⑧
마음 속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연습을 하며 ⑨
뼛속까지 타오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⑩
성냥개비 하나의 작은 불씨에도 ⑪
우르르 몸을 내던질 것 같은 마음의 장작들, ⑫
멀리 서울을 떠나온 몸이 ⑬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⑭
곧 진눈깨비가 쏟아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⑮
―송정란, 『화목』
이 작품은 도입부의 1~2행에서 장작이라는 오브제를 제시함으로써 이미지를 구축하고, 3~10행까지 오브제를 통한 상상력이 전개되며, 11~13행은 오브제를 통한 상상력이 시인의 自我로 전환되면서 도입부를 다시 끌어들여 전환부를 강조한다. 13~15행은 마무리로서 시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갈등을 스스로 다스리며 화해하고 있다. 특히 13행은 전환과 마무리의 가교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복선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현대시의 창작 소프트웨어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시나 시조는 물론 서구의 자유시조차 이러한 표현체제를 이미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구의 자유시란 용어는 그 이전의 엄격한 율격에서 보다 자유로워졌다는 뜻이지, 율격과 무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시는 언어의 기본 율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어의 자유시를 문자 그대로 자유스럽게 받아들였기에 방만한 표현을 다듬어낼 수 있는 기능적인 표현체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자생의 천재시인들에 의해 서정적인 시세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창작교육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예술 발전사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시와 독자의 거리를 넓히는 불구성만 조장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조의 경우는 한국의 현대시와는 성장조건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와 함께 그 현대성에 골몰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좌표를 스스로 포기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시조의 역사는 장르 형성기 동안에 이미 독자적인 표현체제의 모범답안을 완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장 6구 12음보라는 외형성에 가려진 고시조의 표현체제를 점검할 경우, 그 충족조건의 하나인 창사성을 제외하고서도 불과 3행으로 독립된 시세계에서 전개와 변환을 자유 자재로 완성시키는 내용 구조의 입체감이야말로 경이로운 운용체제가 아닐 수 없다. 아래 인용한 황진이의 시조작품은 시조의 표현체제가 시인의 능숙한 운용에 따라 최대한 내용을 증폭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콋 임의 情이
녹수 흘너간들 청산이야 變퍞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니져 우러 예어 가콋고
오브제를 제시하되 그 뜻을 직절적으로 정의하며 전개되는 초장은 은유의 사용으로 하여 더욱 다이나믹한 힘을 갖고 있다. 중장에서 초장의 오브제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이어붙이는 반복 기법은 확신에 찬 어조로 서술되므로 읽는이의 정서적·심리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붙들어둔다. 초장과 중장의 이 절절한 갈등과 대립은 종장에 이르러 초장 중장의 의미를 부정으로 전환, 마무리함으로써 청산과 녹수의 대립적 긴장관계가 하나로 조화되어 화해로 갈무리된다. 현대시의 갈등에서 화해라는 내적 서술 원리를 불과 3행의 시로서 완벽하게 구축한 작품이다. 남녀간의 미묘한 심정적 갈등이 청산과 녹수라는 오브제에 의해 구체화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를 독자의 가슴에 심어주는 한편, 그 절절한 슬픔을 절제하는 여유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말의 전례라 할 수 있다.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초장에서는 제1구는 ‘동짓달 기나긴 밤’의 시간성을 오브제로 삼으나 제2구에서 ‘한 허리를 버혀내어’의 동사형 어미를 통해 마무리함으로써 이를 시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현대시에서도 고난도의 테크닉이라 할 수 있는 추상 오브제에 그림을 입히는 일이니 참으로 탁월한 솜씨이다. 중장은 ‘춘풍 이불’이라는 조어를 사용함으로써 슈르에서 말하는 서로 다른 두개의 언어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다. 여기서도 ‘서리서리 넣었다가’의 의태어를 합성함으로써 본래의 어의를 변조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특히 초장의 겨울과 중장의 봄이라는 시간성 계절어를 통해 기다림의 체감을 지수화하고 있다는 점도 뛰어난 표현기교가 아닐 수 없다. 종장 첫구에서는 ‘어른님 오시는 밤’이라는 시간적 전환이 이루어지며, 미래형 시제를 통해 초장 중장의 오랜 기다림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현재화시키는 의미의 반전이 이루어진다.
내 언제 無信하여 임을 언제퉳 속엿관쾬
月沈 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고
秋風에 지콋 닙 소퀳야 낸들 어이 퍛리오
황진이의 이번 시조는 심정적인 정황으로 초장을 전개하나, 그 정황이 ‘속인다’는 사건을 통해 궁금함을 유발시킨다. 중장은 한밤중에도 그가 오지 않았다는 단정적 진술을 하되, 직접적인 사례를 피하여 ‘뜻’이라는 심정어로 의미를 전환시킨다. 사람은커녕 과연 그가 오려는 뜻이라도 있었는지를 음미하게 하는 대목이다. 종장은 가을바람에 지고마는 잎소리를 통해 초장과 중장의 의미를 전환시킴으로써 그 정황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내세운다.
그럼으로써 이 시는 의미의 구조가 바로서고, 동시에 잎이 지는 소리를 알레고리로 설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것이 사람 사이의 일에 다름 아님을 이중의 부정 다음에야 깨우치도록 하는 고난도의 표현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조는 그것이 비록 고시조라 하여도 창사성과 표현체제를 동시에 완성시키고 있는 완벽한 시형식이다. 그것이 현대시조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서구시에 경도해 외형적인 정형성의 논란에 함몰되면서 완벽한 시형식에 합당한 내용 변화를 감내하지 못하였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현대시조가 현대시와 변별성을 가지고 한국시로서의 한 장르의 위상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시조가 가지고 있는 내적 의미구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조는 그 내적 구조상 최소한의 의미단위가 이루어지는 구수율을 지니고 있으며, 전체 12음보의 음보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초장, 중장, 종장 속에 펼쳐지는 4단의 의미구조를 더 큰 형식의 의미율로서 정립시킴이 어떠할까 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기해 본다. 3장의 짧은 내용 속에 현대시 1편의 의미구조를 담아 낼 수 있는 내적 틀을 갖추고 있는 것이 시조이기 때문이다.
시조의 3장은 현대시의 3행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것이며, 한 행을 이루는 2구의 성격도 현대시에서의 한 행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시조는 장과 장 사이, 구와 구 사이의 내적 의미의 연결성이 현대시에 비해 매우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황진이의 시조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기승전결의 시적 논리가 한 편의 시조 속에서 완벽하게 구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종장에서 현대시의 전환과 결말을 포괄하는 의미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은 시조의 특장으로써 그 미학적 특성을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를 도식화하면 초장(도입부와 전개부)의 A, 중장(도입부와 전개부)의 B, 종장(전환과 마무리)의 C로 크게 3등분된다. 또한 A와 B가 연속적일 때보다는 A와 B가 변증법적인 대립형태를 취할 때 C의 기능이 증폭된다. 특히 C에서 전환과 마무리를 동시에 담당함으로써 3장의 시가 갖는 단조로움을 피한 채 오히려 입체적 효과를 증폭해내는 장치야말로 시조의 탁월한 특장이랄 수 있다. 요즘 많이 씌어지고 있는 연시조의 경우에도 각 수마다 개별 작품의 의미구조를 수렴하면서 전체적 통일성이 이루어져 할 것이다. 시조의 이러한 표현체제가 현대시조에 내적 율격으로써 정립된다면 현대시와의 변별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리라 본다.
그러나 현재 씌어지고 있는 현대시조를 볼 때 이러한 시조의 특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게 여겨진다. 이미 몇백 년 전에 씌어진 황진이의 시조처럼 종장에서의 확연한 시적 전환과 결말의 묘미로써 시조의 미학적 특성을 잘 표출해 낸 작품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시조 종장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초장, 중장의 내용이 전환의 의지 없이 종장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의 3번째 행의 역할과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시조가 자수만 간신히 맞추어 놓은 듯하고, 현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되 오히려 고시조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긴밀한 의미구조를 견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히려 황진이의 시조가 내용은 옛것이되, 그 시적 구조는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어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시조 역시, 단형의 서술 길이가 갖는 탄력성을 잃어버리고 평면화되어버린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된다. 記寫 형식마저 자유롭게 풀어 쓴 경우 형태상으로 현대시와의 차별성이 없어진 데다 그 내적인 의미체계마저 허물어져, 이것이 시인지 시조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시조의 표현체제를 현대시의 그것과 대비할 때, 장형의 서술 길이에서는 의미 체계가 평면화되거나 시간과 장소와 화자의 빈번한 대립으로 시적 긴장도를 낮추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대시조가 단지 자수에 제한만 받을 뿐 그 내용이나 의미 체재가 현대시와 차별성이 없다면, 과연 현대시와 다른 장르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만든다.(이러한 의구심이 곧 현대시조의 아킬레스건으로서 시조단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시조가 자유시를 대신하여 전통적 율격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자각하고 있다면, 이제는 고시조가 보여준 의미의 완벽한 표현체제에 주목, 현대적으로 복원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현대시조는 이미 율격상의 체제는 완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장 6구 12음보의 외형율이 고착되어 있는 만큼 앞서 논술한 내적 의미구조의 체계를 시조의 기본적인 의미율로써 정립해 나간다면 외형과 내용면에서 현대시와의 확연한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한다. 3장 속에 함축된 4단의 의미구조를 내적인 율격으로 정립하고, 이러한 표현체제의 기능을 창작교육에 도입하여 시조 창작자와 그 향수자층을 확대해 나간다면 현대시와의 변별성을 확고히 하면서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훌륭한 작품은 내용에 걸맞는 형식을 창출한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형식의 습득, 파괴, 창출의 변증법적 순환을 거치면서 현대시조의 독자적인 사고체계가 작품화된다면, 시조는 우리 민족 특유의 시형식으로서 그 위상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漢詩가 서구 이미지즘 시의 활력적인 소프트웨어로 제공되고 일본의 하이꾸가 옥타비오 빠스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듯이, 세계의 시문학이 새롭게 충전할 수 있는 시창작 소프트웨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전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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