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꾸미의 탈출

2005.04.11 07:07

유영희 조회 수:51 추천:4

주꾸미의 탈출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유영희


제사를 모시러 오시는 고모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이다. 부지런한 올케들의 수고로 두 손녀딸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부안까지 이십분이면 갈 수 있으니 주꾸미나 사러갈까?" 그렇게 해서 큰언니와 우리 부부는 부안 수산시장을 찾게 되었다.
생선을 파는 골목 입구에서부터 비릿한 바다 냄새가 묻어난다. 기실 이곳에서 바다를 보려면 최소 십여 분 정도 차를 더 몰고 나가야 하지만 여기에 오면 늘 갯가의 냄새를 맡곤 하였다. 생선가게들마다 먹물을 시커멓게 토한 주꾸미들이 좁은 고무통속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자신들이 유영[游泳]하던 드넓은 바다를 떠나 좁고 고무 냄새나는 통속에 왜 갇혀야 하는지 그들은 이유를 알까?

일요일이라 그런지 한산하던 어시장 골목을 들어서자 여기 저기서 호객행위가 벌어졌다. 주인의 인상이 넉넉해 보이는 가게 앞에 발을 멈추고 흥정을 시작하였다. "1킬로에 15,000원인디 14,000원만 주어~. 겁나게 싸게 주는 것이당개~." "아따! 그러지 말고 13,000원씩해서 줘부러요." "워어메! 그럼 본전도 안 되는디. 그란디 을마나 살라고 그려?" 본전도 안 된다고 엄살을 피우던 아주머니는 벌써 비닐 봉지를 가져다 주꾸미를 건지고 있었다. 그새 옮겨온 곳이 제 터전이라고 자리를 잡은 모양인지 주꾸미는 바닥에 8개의 다리를 턱 붙여 놓고 떨어지려 들지를 않는다. 아주머니의 손길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녀석들의 몸을 들어 벌써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큰 걸로만 골라 담았응개 맛있게 드시쇼이?"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진 주꾸미들은 김제까지 오는 내내 꼼지락거리는 소리들을 냈다. 그나마 자리한 안식처에서 갑자기 끌려가는 몸이니 불안을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햇빛이 차단된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가는 방향을 알아내고자 하여도,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비릿한 바다 냄새며 소금냄새가 점점 희미해진다는 사실뿐이리라.

모인 식구 수에 비해 부족할 듯 싶은 주꾸미 봉지를 열고 일 때문에 오시지 못한 큰 형부의 몫을 챙겼다. 형부 몫을 챙기라니 욕심은 나면서도 8개의 다리를 내 젖는 주꾸미 몸에 언니는 손도 대지를 못한다. 남편이 비닐봉지를 열고 제법 큰 걸로 분가를 시켜 놓는다. 봉투를 언니 손에 쥐어 주었건만 보아하니 그 끝도 제대로 묶지를 못한다. 챙겨 주었으니 알아서 단속을 하라며 큰오빠 집으로 들어섰다.

멀리에서 오신 고모님들은 조카들보다 주꾸미가 더 반가우신 모양이다. 각자의 식성대로 아직 꼬무락거리는 주꾸미 다리를 초장에 찍어 먹던가 혹은 데친 주꾸미를 복분자주 한 잔과 곁들여 먹는다. 친정 할아버님 기일에 막내 손녀의 느닷없는 활약으로 모인 식구들은 물론이려니와 할아버지께서도 모처럼 주꾸미 맛을 보셨으리라. 밥상 앞에 마주한 얼굴에는 여기저기 서로 발라 준 고추장 흔적이 베란다에 만개한 동백꽃처럼 붉다. 드넓은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주꾸미는 붉은 동백꽃으로 채색을 하고 사람들의 입 속에서 그들의 흔적 마저 지운다.

남편이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려는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리며 숨가쁜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 주꾸미가 다 탈출하고 한 마리밖에 없어." 입구를 시원찮게 묶더니만 비닐봉지 안에서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여 전부 대 탈출을 시도해 버린 모양이다. 아침 주꾸미를 데치려 봉지를 열어보니 눈에 보이는 건 달랑 한 마리의 주꾸미. 행여 냉장고에서 탈출한 건 아닌가 하여 모든 박스들을 꺼내놓고 수배를 했지만 봉지에 든 한 마리 외에는 흔적도 없더란다.

바가지를 들고 시동을 건 차를 막아섰다. "여보! 주꾸미가 서해바다로 갔는지, 동해바다로 고래 잡으러 갔는지 전부 탈출하고 없대요." 뒷좌석 문을 열어보니 바닥에 온 몸이 축 늘어진 채 죽어 있는 주꾸미들이 보였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서 죽어 있는 주꾸미의 몰골은 흉측하다 못해 징그러웠다. 손도 대지 못하는 아내 대신 남편은 휴지로 주꾸미를 집어 바가지에 담아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숫자가 부족하다. 의자를 앞뒤로 제켜가며 찾아도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나?

제 동료들이 동백꽃 같은 붉은 옷을 걸치고 영혼의 바다를 향할 때, 녀석들은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 탈출을 시도했나보다. 바다를 꿈꾸며 봉지를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찌든 기름냄새와, 먹어 치우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사람들의 살기를 느꼈으리라. 바람 한 점 통하지 않고 그 몸을 축여 줄 물 한 방울 없는 마른 바닥에서, 여덟 개의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살기 위한 탈출통로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들은 바다를 향한 기수를 잡지도 못한 채 바닥에 비통하게도 얼굴을 묻었으리라. 마지막 숨을 들이킬 때 언뜻 비릿한 고향의 냄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밟았던 수산시장 바닥은 온통 비린내 천지였으니까.

안식처를 찾아 목숨을 건 투쟁과 탈출이 어디 주꾸미뿐일까? 최소한의 안식을 위한 일터를 잃어버린 가장은 오늘도 바다로 향하는 길을 찾아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는 모든 세대들이 그들이 꿈꾸는 아름답고 푸른 바다를 속히 만나기를 기원해 본다.
                      (2005.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