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그리고 대왕암

2005.05.24 07:31

고명권 조회 수:67 추천:9

감은사지 그리고 대왕암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고명권


우리는 흔히 수학여행이나 경주관광에 나서면 국립박물관과 왕릉 몇 군데 그리고 토함산의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보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에서 경주 불국사를 비롯하여 왕릉 및 석굴암을 돌아본 것이 전부였다. 이후 몇 차례의 경주방문에서도 거의 같은 코스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문관광단지가 생겨 한 곳이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1995년 늦봄이었다. 약 1주일간 경주 출장기회가 생겼다. 나는 평소 출장가면 짬을 내어 출장지 주변의 우리문화유산이나 고적을 답사하는 취미가 있던 터라 이전 경주여행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신라문화에 관한 고적답사를 하기로 했었다.

지인의 안내로 경주시 양북면에 위치한 고찰 기림사와 감은사지 삼층석탑 및 금당 터와 감포 바닷가에 있는 대왕암을 보기로 했다. 경주 보문단지 부근의 덕동호를 돌아 추령고개의 구절양장을 내려가니 천년고찰 기림사가 나왔다. 기림사는 석가모니가 생전에 제자들과 수행하던 기원정사의 숲이라는 뜻이다. 때마침 기림사의 복원불사가 있어 대적광전을 해체한 터라 기림사 관람을 뒤로 접고, 기와 한 장 값을 시주하고 발길을 감은사지로 돌렸다.

넓은 들판에 외로이 서있는 이끼 낀 동탑과 서탑, 두 탑만이 감은사 터임을 알리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 감은사 3층 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목탑형식으로 높이 13미터의 큰 탑이었으나 오랜 세월에 상륜부는 없어지고 쇠로 된 철주만 탑신부에 꽂혀 있었다. 이 절의 금당 터에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휴식할 수 있도록 지하 구조물이 있는 보통의 절터와는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원래 감은사는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도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30대 문무왕이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재위 21년에 이 절을 완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인 31대 신문왕이 완성시켰다. 절 이름은 원래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아버지인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感恩寺)로 바꾼 것이다. 호국불교인 이 절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호국의지가 서려 있어 이를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태종무열왕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에게는 시시때때로 침범하는 왜구(일본의 해적집단)가 항상 걱정거리였다. 문무왕은 큰절을 지어 부처의 힘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하였지만, 문무왕은 이 절의 완공을 보기 전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생전에 아들인 신문왕에게“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나를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 지내다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효심이 지극한 신문왕은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고 절을 완성한 뒤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의미를 생각하여 보았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이 죽으면 거대한 왕릉을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문무왕은 이 같은 형식을 타파하고 자신을 화장하여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는 파격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전 국토의 묘지화 및 호화 분묘설치가 크게 사회문제가 될 것을 예견하고, 이미 1400년 전에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또 화장한 유골을 동해에 뿌리게 하여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의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마침 요즈음 KBS연속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보여주는 임진왜란 당시 도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천리 변방인 의주까지 도피한 선조가 국왕으로서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처사가 아닌가? 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위패를 합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정당화하는 현 일본정부 각료와 우익들의 망언과 망발을 보면서 문무왕의 호국의지가 더 돋보이는 것은 왜일까?

요즈음 시중에서 회자되고 있는 국적법 개정에 따라 병역의무를 기피하려고 국적을 포기하고 있는 사람이 폭증하고 있고, 속칭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들이나 손자들은 질병과 신체허약을 이유로 병역을 기피하는 현실을 보면 돌아가신 문무왕이 분노의 피눈물을 흘릴 일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문무왕과 같은 호국의지가 있을까? 또, 내 아이들이 이 같은 이중국적 문제에 부딪친다면 과연 과감히 외국국적을 포기할 수 있을까? 10년 전 경주 기행을 되돌아보면서 우리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