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2005.05.30 07:08

최화경 조회 수:69 추천:18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최화경




  인류가 발명 한 것 중 획기적인 게 많겠지만 몇 가지만 얘기하라면, 난 수세식 변소와 원터치로 열 수 있는 캔이라고 말하고 싶다. 깡통을 잡고 손바닥의 날카로운 통증을 감수하며, 씨름해야 하는 깡통 따개의 무딘 칼날을 생각하면 원터치 캔의 발명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항상 놀라운 은총처럼 느껴지는 게 수세식 화장실이다. 요즈음 다시금 재래식 화장실을 예찬하면서 그 것만이 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어쨌든 난 모든 배설물이 흔적 없이 씻겨져 내려가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수세식 화장실이 좋다.

얼마 전 영국에서 작품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밖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용변을 볼 수 있게 설계된 화장실이었는데, 외관도 여느 건축 작품 못지 않았다. 밖에 있는 사람은 화장실 안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어있어, 화장실도 예술작품인 세상이 너무 놀라울 정도였다. 예전 공중화장실이 주는 선입견은 지저분하고 역겨운 장소였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와 유원지 화장실이 더욱 불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도로 휴게실은 거의 호텔수준이다. 더운물은 물론이고 냉난방시설에 세면실, 파우더 룸, 기저귀 부스, 비데, 핸드 드라이어까지 설치되어있다. 장애인전용 화장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작고 낮아서 장난감처럼 느껴지는 어린이 전용화장실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유원지 화장실은 또 어떤가. 아무리 깊고 한적한 곳이라도 거의 수세식 화장실로 되어 있다. 그런 골짜기에서도 문화를 느낄 수 있어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축제 마당의 그 멋진 이동식 화장실에서 과학의 위대함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해안 고속도로 고인돌 휴게실 화장실은 노랑색 문과 초록의 화초로 장식되어 화장실이라기보다는 달콤한 분위기의 카페 같다. 이곳에선, 꼭 차를 세우고 노랑색 화장실의 달콤함에 취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서해대교 휴게소 화장실에선 둥근 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 볼 수 있어 로맨틱하다. 수원의 행궁 화장실은 변기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 볼 수 있고 대나무가 심어진 작은 조약돌의 정원을 감상 할 수 있다.
또 있다. 전주시(市)에 새로 문을 연 L백화점 화장실은 차례를 기다리는데 별 다른 인내심이 필요치 않다. 화장실에 그처럼 고급하고 편안한 탁자와 의자가 놓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여서 기다림이 주는 짜증과 조급함은 거의 느낄 수가 없다. 하기야,  창 밖을 바라보며 안락의자에 앉아 순번을 기다리는 화장실은, 처음부터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영화가 끝나고 들르는 극장의 화장실은 휘황하고 고급스러워 거울 속의 내가 방금 본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우아하다.

작가 김훈은 전남 승주의 선암사 화장실을 이렇게 예찬하고 있다. "사랑이여, 쓸쓸함이여, 내세에서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라고. 그는 300년 넘은 건축물인 선암사 재래식 화장실을 자유의 낙원이라고까지 극찬한다. 배설행위가 자유와 해방행위라고 말하는 그로선 할 만한 소리다.


그 옛날  재래식  변소에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침을 뱉으며 용변을 보았듯, 불결한 이미지의 공간을 불결하게 유지하면 한없이 불결해진다. 반면 깨끗하게 단장한 화장실은 휴식공간처럼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습들은 자칫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겉모습에 취해, 속고 속이고 또, 또 속는 아둔함처럼 세상의 모든 이치가 혹, 이런 게 아닐까. 마치 어딘가에 독을 숨긴 채 현란하게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독버섯처럼.

사용 부주의로 인해 방치된 화장실, 혹은 단수로 인한 불편함은 수세식화장실의 최고의 함정이다. 그럴 땐 코를 싸매고 쪼그리고 앉아 불쾌함을 견디며 용변을 보아야 했지만, 이미 익숙해진 냄새와 구조의 정다움으로 인해 재래식 화장실이 그리울 수도 있다. 그립다는 건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일 것이다. 또 잊을 수  없다는 건 그것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다. 혹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여기에 쓰일 수도 있다면 그것처럼 적절한 표현도 없을 듯하다. 아니면, 내 화장실열전(列傳)이 모순이거나 오버센스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