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2005.07.10 20:52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이은재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란 ‘고귀한 신분에 따른 도덕상의 의무’를 뜻한다. 초기 로마는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가장 잘 이행되었던 모범적인 사회였다.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싸움에서 패색이 짙어가고 있을 때 로마의 귀족들은 솔선하여 싸움터에 나가 싸웠다. 또 기부금과 고액의 세금도 자진 헌납하여 바닥난 국고를 채웠다. 이에 고무된 평민들도 앞다퉈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로마군은 맹위를 떨치며 카르타고를 물리쳤다. 카르타고는 화의를 청하였고 거액의 배상금과 시칠리아 섬을 넘겨주었다.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절제된 행동과 규범으로 평민보다 솔선수범 상류층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나라의 초석을 다졌던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위험한 조종사로 참전하여 상류층의 의무를 다했다. 빌 게이츠는 그의 뛰어난 도전정신과 재능으로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지만, 그를 부자로 만든 건 컴퓨터를 사용하는 인류사회의 구성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자신의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이들은 상류층의 권리만을 향유하지 않고 도덕적 의무도 솔선하여 평민들의 귀감이 되었다. 지도층이 먼저 본을 보이지 않으면 일반계층은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한국의 상류층 자제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병역을 기피하고, 또 면제받는 특혜는 과도한 권리만을 향유하려는 상층부의 권리 남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옛날 우리나라의 운조루(雲鳥樓)에서도 상류층의 도덕정신을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에서 살았던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고왔을까. 그 호방한 명성만큼이나 가진 자의 겸손함이 무엇인가 보여준 한 선비의 보석 같은 삶에 가슴이 뭉클하다. 권세 있는 자들의 만용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목마른 사막을 구원할 단비 같은 얘기, 가난하여도 금도(襟度)를 지키며 지조와 의리가 있었던 선비정신을 실천한 운조루엔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일까.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숨결을 멈추고 결국을 이룬 지리산, 지리산은 자손만대 부귀영화를 누려보려고 명당을 찾는 만석꾼이나 새로운 세계를 시도하다 쫓기는 반란군에 이르기까지 말없이 감싸주던 후덕한 산이었다. 그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나온 샘물이 모여 흐르는 섬진강은 또한 생명의 발원지가 아닌가. 그 섬진강을 따라 오미리 들녘을 달리다 보면 풍요의 땅 구만들이 나온다. 구만들은 금귀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의 3대 명당이 있는 곳으로 운조루는 최고의 명당인 금구몰니 터에 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다.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첫머리 두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 류이주가 낙안군수 시절에 7년여에 걸쳐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전체를 운조루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子形)의 배치형식으로 지어진 99칸의 양반가옥으로 지금은 60여 칸만이 전해지고 있다.
운조루 들머리에 들어서면 맑은 연못이 기와집과 어우러져 운치를 준다. 연못 안에 분재처럼 수형 잡힌 소나무 한 그루가 선비의 지조를 엿보게 한다. 물옥잠 위에서 오수를 즐기는 청개구리의 여유가 평화롭기만 하다. 이 연못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니 운조루를 지키기 위한 유비무환의 정신이 놀랍기만 하다. 낙산사에도 이만한 연못이 있었다면 천년고찰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연못을 따라 운조루에 들어서면 멋들어지게 서 있는 솟을대문이 양반가의 저택임을 느끼게 한다. 행랑채 곳간에는 백미 2가마 반이 들어가는 목독이 있다. 통나무를 파내어 만든 원형 목독은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려는 쌀뒤주다. 원형 뒤주의 하단엔 가로 5㎝ 세로 10㎝ 정도의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써 놓았다. 타인능해란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마을사람과 지리산을 지나는 과객은 누구라도 쌀을 가져다 밥을 지어먹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주인이 직접 쌀을 퍼 주지 않고 굳이 타인능해의 뒤주를 만들어 쌀을 퍼가도록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쌀을 가져가는 사람이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가져가도록 하려는 깊은 배려였다. 주인의 이 같은 마음에 감화를 받아서인지 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쌀의 양 1~2되 분량 외엔 그 누구도 몰래 더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가난하여도 양심이 살아있었던 사회였다. 한 때 가난한 이들의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도 배부르게 하였을 저 쌀뒤주가 오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운조루의 또 다른 아름다움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해서 만든 낮은 굴뚝이다.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는 걸 알면서도 1미터의 낮은 굴뚝을 세운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 끼니를 지을 수 없는 가난한 이웃들이 운조루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마음에 상처받을 걸 염려한 것이었다. 이 댁 주인은 또 매달 그믐날에 쌀뒤주가 텅 비어 있지 않으면 며느리를 불러 호통을 쳤단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 뒤주에 들어간 쌀은 일 년에 36가마 정도였는데 이는 주인이 수확한 쌀의 20%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명당 터 덕으로 권위를 누렸던 양반가의 영화도 한때인가. 10세손이 살고 있다는 운조루 안채 들마루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균열이 나 있고 그 사이로 먼지만 빼곡했다. 한 때 수십 명의 식솔을 책임졌을 무쇠 가마솥은 황토 빛 녹을 안고 구멍이 난 채 부엌 한 구석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가고 없는데 마당에 있는 맷돌, 절구통은 풍화에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양반가의 영화가 부엌데기로 멸시받던 절구만도 못하다니, 인생사가 이렇게 쓸쓸한 걸까.
무심코 바라본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운조루 대 저택에 가득하였던 사람들도 저 구름처럼 흘러가 버린 것일까. 사랑채 벽에 기대고 서서 흐드러지게 농익은 산수유 열매를 바라보다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연지에 투영된 햇살이 억겁의 세월을 유추하게 한다. 오미리 사람들이 난리가 일어날 때마다 안산으로 받들며 위안을 받았다는 오봉산이 오늘 내게도 평화롭게 다가온다.
운조루 연당 옆에서 물건을 파는 노인이 준 안내장엔 그 옛날 운조루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노인은 행랑채 밖 논배미에서 금가락지 형상을 하고 있는 대나무 숲을 가리키며 "저 곳이 금환락지(金環落地)입니다. 사람들은 운조루만 보고 저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갑니다." 라고 들려주었다. 정말 그랬다. 나도 지난번 3월에 왔을 때 저 곳에 집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었다. 금가락지처럼 돌담과 대숲으로 둥그렇게 위장을 한 금환락지는 그렇게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명당 금환락지도 세월 앞에선 한계를 드러낸 것일까. 넓은 뜨락엔 인적도 고요하고 발길이 닿지 않은 마당엔 잡초만 무성했다.
지리산만큼 역사의 수레바퀴가 진하게 밟고 지나간 곳도 없으리라. 지리산은 민란과 동학, 여순반란사건, 6.25의 중심에서 쫓고 쫓기는 사람들을 어미 닭처럼 날개로 품어 주었던 포용의 산이었다. 구전에 따르면 운조루 사랑채는 빨치산들이 쉬어가던 아지트였다고 한다. 어쩌면 운조루의 주인은 어떤 이념을 넘어 배고프고 지친 사람은 누구나 와서 배부르게 먹고 쉬어가도록 배려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온갖 난세를 겪으면서도 운조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베풀며 살았던 사람에게 내린 하늘의 보상이 아니었을까. 운조루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베풀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한 선비정신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이기와 집단이기가 팽배한 이 시대에 운조루 얘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상류층이 도덕적 의무를 솔선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을 실천해 온 국가가 오늘날 선진사회를 이룬 세계 역사의 교훈에서 우리 사회가 우선해야 할 덕목은 바로 상류층의 도덕정신이 아닐까. 부와 권력의 남용으로 사치스러움에 목이 굳은 사람들이 한 번쯤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며 운조루의 선비정신을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따뜻할까. 수많은 난리 속에서도 운조루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베풀며 살았던 타인능해의 목독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 운조루 얘기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난한 이웃을 어떻게 배려하고 보살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가난한 백성을 살펴봄은 공직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포흠에 앞장서는 공직자가 얼마나 많은가. 운조루 얘기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건 나 또한 공직자이기 때문이리라. 한국사회에 부자는 많아도 귀족은 없다는 상류층의 부재가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 옛날, 타인능해의 선비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선정을 펼쳤던 운조루의 덕목을 나도 이어갈 순 없을까.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이은재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란 ‘고귀한 신분에 따른 도덕상의 의무’를 뜻한다. 초기 로마는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가장 잘 이행되었던 모범적인 사회였다.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싸움에서 패색이 짙어가고 있을 때 로마의 귀족들은 솔선하여 싸움터에 나가 싸웠다. 또 기부금과 고액의 세금도 자진 헌납하여 바닥난 국고를 채웠다. 이에 고무된 평민들도 앞다퉈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로마군은 맹위를 떨치며 카르타고를 물리쳤다. 카르타고는 화의를 청하였고 거액의 배상금과 시칠리아 섬을 넘겨주었다.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절제된 행동과 규범으로 평민보다 솔선수범 상류층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나라의 초석을 다졌던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위험한 조종사로 참전하여 상류층의 의무를 다했다. 빌 게이츠는 그의 뛰어난 도전정신과 재능으로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지만, 그를 부자로 만든 건 컴퓨터를 사용하는 인류사회의 구성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자신의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이들은 상류층의 권리만을 향유하지 않고 도덕적 의무도 솔선하여 평민들의 귀감이 되었다. 지도층이 먼저 본을 보이지 않으면 일반계층은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한국의 상류층 자제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병역을 기피하고, 또 면제받는 특혜는 과도한 권리만을 향유하려는 상층부의 권리 남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옛날 우리나라의 운조루(雲鳥樓)에서도 상류층의 도덕정신을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에서 살았던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고왔을까. 그 호방한 명성만큼이나 가진 자의 겸손함이 무엇인가 보여준 한 선비의 보석 같은 삶에 가슴이 뭉클하다. 권세 있는 자들의 만용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목마른 사막을 구원할 단비 같은 얘기, 가난하여도 금도(襟度)를 지키며 지조와 의리가 있었던 선비정신을 실천한 운조루엔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일까.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숨결을 멈추고 결국을 이룬 지리산, 지리산은 자손만대 부귀영화를 누려보려고 명당을 찾는 만석꾼이나 새로운 세계를 시도하다 쫓기는 반란군에 이르기까지 말없이 감싸주던 후덕한 산이었다. 그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나온 샘물이 모여 흐르는 섬진강은 또한 생명의 발원지가 아닌가. 그 섬진강을 따라 오미리 들녘을 달리다 보면 풍요의 땅 구만들이 나온다. 구만들은 금귀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의 3대 명당이 있는 곳으로 운조루는 최고의 명당인 금구몰니 터에 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다.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첫머리 두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 류이주가 낙안군수 시절에 7년여에 걸쳐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전체를 운조루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子形)의 배치형식으로 지어진 99칸의 양반가옥으로 지금은 60여 칸만이 전해지고 있다.
운조루 들머리에 들어서면 맑은 연못이 기와집과 어우러져 운치를 준다. 연못 안에 분재처럼 수형 잡힌 소나무 한 그루가 선비의 지조를 엿보게 한다. 물옥잠 위에서 오수를 즐기는 청개구리의 여유가 평화롭기만 하다. 이 연못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니 운조루를 지키기 위한 유비무환의 정신이 놀랍기만 하다. 낙산사에도 이만한 연못이 있었다면 천년고찰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연못을 따라 운조루에 들어서면 멋들어지게 서 있는 솟을대문이 양반가의 저택임을 느끼게 한다. 행랑채 곳간에는 백미 2가마 반이 들어가는 목독이 있다. 통나무를 파내어 만든 원형 목독은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려는 쌀뒤주다. 원형 뒤주의 하단엔 가로 5㎝ 세로 10㎝ 정도의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써 놓았다. 타인능해란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마을사람과 지리산을 지나는 과객은 누구라도 쌀을 가져다 밥을 지어먹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주인이 직접 쌀을 퍼 주지 않고 굳이 타인능해의 뒤주를 만들어 쌀을 퍼가도록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쌀을 가져가는 사람이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가져가도록 하려는 깊은 배려였다. 주인의 이 같은 마음에 감화를 받아서인지 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쌀의 양 1~2되 분량 외엔 그 누구도 몰래 더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가난하여도 양심이 살아있었던 사회였다. 한 때 가난한 이들의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도 배부르게 하였을 저 쌀뒤주가 오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운조루의 또 다른 아름다움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해서 만든 낮은 굴뚝이다.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는 걸 알면서도 1미터의 낮은 굴뚝을 세운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 끼니를 지을 수 없는 가난한 이웃들이 운조루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마음에 상처받을 걸 염려한 것이었다. 이 댁 주인은 또 매달 그믐날에 쌀뒤주가 텅 비어 있지 않으면 며느리를 불러 호통을 쳤단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 뒤주에 들어간 쌀은 일 년에 36가마 정도였는데 이는 주인이 수확한 쌀의 20%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명당 터 덕으로 권위를 누렸던 양반가의 영화도 한때인가. 10세손이 살고 있다는 운조루 안채 들마루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균열이 나 있고 그 사이로 먼지만 빼곡했다. 한 때 수십 명의 식솔을 책임졌을 무쇠 가마솥은 황토 빛 녹을 안고 구멍이 난 채 부엌 한 구석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가고 없는데 마당에 있는 맷돌, 절구통은 풍화에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양반가의 영화가 부엌데기로 멸시받던 절구만도 못하다니, 인생사가 이렇게 쓸쓸한 걸까.
무심코 바라본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운조루 대 저택에 가득하였던 사람들도 저 구름처럼 흘러가 버린 것일까. 사랑채 벽에 기대고 서서 흐드러지게 농익은 산수유 열매를 바라보다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연지에 투영된 햇살이 억겁의 세월을 유추하게 한다. 오미리 사람들이 난리가 일어날 때마다 안산으로 받들며 위안을 받았다는 오봉산이 오늘 내게도 평화롭게 다가온다.
운조루 연당 옆에서 물건을 파는 노인이 준 안내장엔 그 옛날 운조루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노인은 행랑채 밖 논배미에서 금가락지 형상을 하고 있는 대나무 숲을 가리키며 "저 곳이 금환락지(金環落地)입니다. 사람들은 운조루만 보고 저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갑니다." 라고 들려주었다. 정말 그랬다. 나도 지난번 3월에 왔을 때 저 곳에 집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었다. 금가락지처럼 돌담과 대숲으로 둥그렇게 위장을 한 금환락지는 그렇게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명당 금환락지도 세월 앞에선 한계를 드러낸 것일까. 넓은 뜨락엔 인적도 고요하고 발길이 닿지 않은 마당엔 잡초만 무성했다.
지리산만큼 역사의 수레바퀴가 진하게 밟고 지나간 곳도 없으리라. 지리산은 민란과 동학, 여순반란사건, 6.25의 중심에서 쫓고 쫓기는 사람들을 어미 닭처럼 날개로 품어 주었던 포용의 산이었다. 구전에 따르면 운조루 사랑채는 빨치산들이 쉬어가던 아지트였다고 한다. 어쩌면 운조루의 주인은 어떤 이념을 넘어 배고프고 지친 사람은 누구나 와서 배부르게 먹고 쉬어가도록 배려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온갖 난세를 겪으면서도 운조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베풀며 살았던 사람에게 내린 하늘의 보상이 아니었을까. 운조루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베풀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한 선비정신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이기와 집단이기가 팽배한 이 시대에 운조루 얘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상류층이 도덕적 의무를 솔선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을 실천해 온 국가가 오늘날 선진사회를 이룬 세계 역사의 교훈에서 우리 사회가 우선해야 할 덕목은 바로 상류층의 도덕정신이 아닐까. 부와 권력의 남용으로 사치스러움에 목이 굳은 사람들이 한 번쯤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며 운조루의 선비정신을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따뜻할까. 수많은 난리 속에서도 운조루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베풀며 살았던 타인능해의 목독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 운조루 얘기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난한 이웃을 어떻게 배려하고 보살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가난한 백성을 살펴봄은 공직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포흠에 앞장서는 공직자가 얼마나 많은가. 운조루 얘기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건 나 또한 공직자이기 때문이리라. 한국사회에 부자는 많아도 귀족은 없다는 상류층의 부재가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 옛날, 타인능해의 선비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선정을 펼쳤던 운조루의 덕목을 나도 이어갈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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