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절필하였지만 좋은 수필 많이 쓰라" 애도, 금아 선생!

2007.05.29 00:53

정목일 조회 수:88 추천:9




"난 절필했지만, 오래도록 좋은 수필 많이 쓰라"
수필문학의 금자탑 금아 피천득 선생을 기리며
    오마이뉴스(news) 기자    


25일 저 세상으로 가신 피천득 선생을 그리며 정목일 한국문협 수필분과회장이 오마이뉴스에 보내온 글입니다. <편집자 주>

일 년 중 가장 좋아하시던 오월에 수필문학의 금자탑이신 금아 선생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2007년 5월 25일 오후 11시 40분,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것만으로 행복하였던 스승이셨고, 난초 같이 학 같이 청초하고 고결하게 살다 가신 분이셨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피천득 ‘수필’의 서두)는 수필문학의 격조와 위상을 정립하고 수필의 새 경지를 일깨워준 말이었다. 수필의 성격과 세계를 표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드러낸 말이기도 했다.

금아 선생은 가셨지만 수많은 독자들은 영원히 선생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수필의 감동은 삶과 문장의 혼연일체에서 오는 것임을 보여주신 분이셨다. 금세기 가장 빼어난 문장가였으며 문인으로서 국민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으시며 천수를 누리시다가 눈을 감으셨다.

오월과 장미, 산호와 비둘기, 꽃과 어린이를 사랑하고 인연을 아꼈던 수필가, 시인이셨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고, 맑은 영혼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들리는 분을 이제 어디에서 다시 만날 볼 수가 있으랴.

온화하고 맑은 동심으로 노래하듯 빚어놓은 수필들은 독자들의 마음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게 했으며 아름다움과 행복을 선물했다.

문단에서 최고령자이셨으나 항상 소년처럼 티 없이 맑고 순수하셨던 분, 구순의 나이에 인형을 안고 잠들던 동심을 지니신 분, 자택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자녀의 이름을 방명록에 적게 하시고 꼭 나이를 물어보셨던 금아 선생이셨다.

아흔이 넘어서자 "한 쪽 발은 이승에 있고, 한 쪽 발은 저승에 있다" 하시며 너털웃음을 웃으셨고, 작년 겨울에만도 "이렇게 가다간 백 살 바깥으로 넘어설 것 같다"고 하시더니 홀연히 하늘나라가 가셨다.

'청자연적'이란 인생의 그릇 위에 인연, 오월, 수필 등 명작 수필들이 장미나 앵두 빛깔의 보석으로 놓여 있다. 금아 선생의 일생은 오로지 작품을 통해 1세기 동안 한국 수필문학의 정원을 일궈내셨고 후학들에게 문장의 길과 삶의 깨달음을 주셨다.

금아 선생의 삶은 눈에 띄지 않게 향기를 뿜는 난초였으며, 고독 속에 홀로 있어도 학과 같이 고고하셨다. 금아 선생의 영원한 광채는 읽을수록 향기와 그리움을 주는 수필의 진수일 것이며, 수필에 깃든 삶의 고결, 청초, 순수에서 오는 감동이다. 금아 선생의 문장과 삶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전범(典範)과 같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 그런 분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절필하였지만, 오래도록 좋은 수필을 많이 쓰라."

어느 해 오월, 자택을 방문하였을 적에 격려해 주신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북받쳐 온다. 침실엔 아기 곰 3형제 인형이 있었다. 눈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아기 곰 인형이 잠들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눈가리개로 가려서 자장가를 불러 잠재우고 난 다음에야 주무신다는 금아 선생이셨다.

금아 선생의 오월에 나오는 문구가 귓가에 들려온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그 분은 언제나 오월의 신록 속에, 독자들의 가슴 속에 계실 것이다.

금아 선생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