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집
2007.06.01 16:26
<나의 식도락>
흙집
김 학(金 鶴)
꿀벌이 향기로운 꽃만을 찾아다니며 꿀을 따가듯 맛깔스런 음식점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식도락가라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시간과 돈이 넉넉하면 그럴까 부럽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다고 하여 비싼 음식점만을 찾아다닌다면 진정한 식도락가는 아니다. 값이 싸면서도 맛있는 음식점을 잘 알아야 식도락가라 할 수 있다.
내 친구 ㅈ군은 알아주는 식도락가다. 그는 어느 곳에 가면 어느 식당의 무슨 음식이 값도 싸고 맛있다며 입에서 침을 튀긴다. 자기 조상의 내력을 소개할 때에는 더듬거려도 맛좋은 음식점의 족보는 훤히 뀐다. 그러니 그 친구를 만나면 무엇을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하기야 요즘에는 신문이나 잡지 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리포터를 전국 방방곡곡으로 보내 맛 집을 소개하고 있고, 또 그 자료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그러니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식도락가의 대열에 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전천후 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맛 집만을 즐겨 찾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식도락가가 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원숭이 머리에 뿔나기를 기다리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없어서 못 먹지 음식 맛이 없다며 께질거리지 않는 게 나의 식성이다.
ㅈ군이 두고 쓰는 이야기가 있다. 시골에 가면 면 직원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 가면 틀림없이 맛깔스런 음식을 싸게 먹을 수 있다고. 그 친구의 귀띔을 기억해 두었다가 몇 번 시도해보았더니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사는 전주는 자타가 인정해 주는 음식의 고장이다. 어느 식당이다 들어서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대표적인 음식이라면 한정식과 비빔밥 그리고 콩나물해장국을 들 수 있다. 음식의 고장에서 근무하는 지방공무원에게는 엉뚱한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상급기관에서 전주로 출장을 오는 공무원들은 저마다 아침엔 해장국을, 점심 땐 비빔밥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출장 손님을 안내해야 하는 담당 공무원은 선택의 여지없이 거의 날마다 콩나물국이나 비빔밥을 먹어야 하니 지겹다는 것이다. 손님에게만 콩나물국이나 비빔밥을 권하고 자기는 다른 음식을 주문할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일 수밖에.
맛의 고장 전주에서도 내가 즐겨 찾는 단골집이 한 군데 있다. ‘흙집’이란 옥호를 가진 조그만 식당이다. 그 식당에 드나든 지 어언 20여 년이나 되었다. 그 식당의 주 메뉴는 무밥과 콩나물밥 그리고 한정식이다. 손님들은 대개 무밥이나 콩나물밥만 찾는다. 술은 거의 팔지 않는다. 주로 점심때 찾아가는데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나는 콩나물밥보다는 무밥을 좋아한다. 채처럼 썬 무와 쌀을 섞어 오모가리에 직접 밥을 지어준다. 거기에 양념간장과 게장, 청국장을 넣고 집장(執醬)을 섞어 비벼 먹는다. 그 맛이 일품이다. 밑반찬도 푸짐하여 열댓 가지가 넘는다. 밥 한 그릇만 주문하면 그야말로 백반정식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 ‘흙집’에서 입맛을 돋우는 것은 집장이다. 여느 식당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집장은 즙장(汁醬)이라고도 하는데, 여름에 메주를 주먹만큼씩 빚어 온돌방에서 2~3일 띄운 다음, 볕을 쬐어 말린 뒤 가루로 만들어 찰밥에 버무리고 무, 가지, 풋고추, 쇠고기 등을 장아찌로 박아 작은 항아리에 담는다. 그러고서 간장을 조금 쳐서 밀봉한 뒤 뜨거운 두엄 속에 8~9일 묻어두면 만들어지는 고추장 비슷한 음식이다. 이처럼 만드는 절차가 복잡하니 여느 식당에서나 쉽사리 맛볼 수 없는 우리 고장의 전통음식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견이 불여일식(不如一食)이거늘 내 어찌 필설로서 그 집장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으랴.
단골 식당 근처에 새전주병원이 있어서 아는 이 문병을 갔다가 그 집에 들르기도 하고, 친구나 식구들과 함께 일부러 들르기도 한다. 특히 서울에 사는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가 와도 일부러 그 ‘흙집’을 찾는다.
사실 요즘에는 무밥이나 콩나물밥이 별미 취급을 받지만 6‧25무렵에는 마지못해 먹던 음식이었다. 흉년이 자주 들어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음식의 질보다는 양이 문제였었다. 어떻게 하면 적은 양식으로 식구들의 배를 채우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니 무, 콩나물 분만 아니라 감자, 고구마, 강냉이, 소나무껍질까지도 섞어서 밥을 지었다. 그렇게라도 밥을 지어 먹으면 부잣집이었다. 더 가난한 집에서는 아욱, 고구마 잎, 콩나물, 무, 감자, 늙은 호박, 옥수수 등을 쌀과 섞어 죽을 쑤어 먹었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너도나도 살림형편이 좋아졌다. 배고파 허리가 굽었던 조상들의 후손은 요즘 너무 잘 먹고 살아서 살을 빼려 발버둥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그 음식들이 요즘에는 건강에 좋은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이럴 때 사용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200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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