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수필 청탁원고] 자작수필 해설

2007.06.17 15:56

김학 조회 수:140 추천:22

耳目口鼻(이목구비)
                                                                                                                                              김 학



耳目口鼻! 사람의 얼굴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중요부위들이다. 아니 소나 돼지, 개 등 동물들도 다 가지고 있으니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선인들은 왜 ‘귀․눈․입․코’로 순서를 매긴 것일까?
“사람의 몸이 열 냥이라면 눈이 아홉 냥”이란 속담을 생각하면 눈이 가장 중요할 듯싶다. 그렇다면 目耳口鼻라고 해야 옳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란 속담을 보면 입이 더 중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口耳目鼻라고 해야 옳다. 말하는 기능과 먹는 기능을 가진 입이야말로 훨씬 중요할 테니까. 그런데 왜 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서 耳目口鼻라고 한 것일까?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을 귀머거리,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을 봉사, 입으로 말을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라 한다. 또 코로 숨을 쉬지 못한 사람을 시체라 하지만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은 또 무엇이라고 부를까?
귀머거리라고 하면 언뜻 ‘헬렌 켈러’, 봉사하면 심청 아버지 ‘심학규’, 벙어리하면 ‘벙어리 삼룡’이가 떠오른다.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익히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구라는 역경을 딛고서 우리 앞에 우뚝 선 과거인물이거나 가상인물들이다.
만약 이목구비가 고장 나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귀나 코에 이상이 오면 이비인후과를, 눈이 고장 나면 안과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입이 고장 나면? 목구멍이 아프면 이비인후과로, 이빨이 아프면 치과로 가야한다. 이것으로 미뤄보더라도 눈이 가장 소중하다고 해야겠는데 왜 귀 다음 순서에 배치했는지…….    
나는 때때로 이목구비가 고장 난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꼴이 신문․방송에 나오면 못 보고 못 듣는 봉사나 귀머거리가 부럽고, 오염된 공기나 구린내를 만나면 코가 고장 난 사람이 부럽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정치인들이나 말을 잘못해서 오랏줄에 묶여 가는 사람들을 보면 벙어리가 낫겠다 싶다. 이래서 일체유심조일까?


<자작수필 해설>
색다른 나의 수필 찾기
                                    김 학


과학자와 수필가는 늘 의문부호(?)를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새로운 발명과 발견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e-수필> 편집실에서 자작수필 해설을 써달라고 주문한 작품이 비교적 짧은 5매 수필 ‘이목구비(耳目口鼻)’였다. 어쩌면 <e-수필>이 바로 작가인 나의 창작의도를 제대로 꼬집어낸 게 아닌가 싶어 반가웠다.
나는 평소에도 뒤집어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다. 서양 문학이론에서 말하는 낯설게 하기나 다를 바 없다. 평소 내가 매사에 많은 의문을 갖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몇 번 미인대회 심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미인대회 입상자의 순서가 진선미정숙현(眞善美貞淑賢)이란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미인을 뽑는 잔치이니 마땅히 미(美)가 1등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 여섯 글자는 모두가 좋은 뜻을 가진 글자들이고,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글자들이다. 그런데 미인대회가 성행하면서 진선미정숙현이란 서열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기억의 창고에서 그런 사례를 찾아내자면 꽤 많다.
매란국죽(梅蘭菊竹)도 마찬가지다. 1년생과 다년생 식물을 뒤섞어 서열을 만들어 버렸다. 이 식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왔는데도 말이다.
동서남북(東西南北)도 예외는 아니다. 왜 이런 순서가 매겨졌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길을 보면 동서쪽보다는 남북 쪽이 더 잘 개발되어 있다. 철길은 물론 자동차도로나 소로도 다를 바 없다. 어느 곳에서나 서울로 가는 길을 우선적으로 개설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지난 6월 초 전주에서 경상북도 문경까지 갈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전주에서 문경까지 가려니 직접 가는 기차나 버스가 없었다. 나는 전주에서 대전을 거쳐 점촌까지, 점촌에서 문경읍까지, 문경읍에서 문경새재까지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남북에 비해 동서의 교통이 훨씬 불편했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동서남북이 아니라 남북동서라고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착상을 하게 된 것이 ‘이목구비’였다. 나는 처음엔 19세기 중엽 어떤 부인이 썼다는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처럼 쓰고 싶었다. 우리의 얼굴에 붙어있는 귀‧눈‧입‧코가 서로 자기가 잘났고 자기의 역할과 기능이 몸 주인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식의 희곡기법으로 쓸 요량이었다. 그런데 5매 수필 청탁을 받는 바람에 이렇게 압축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목구비쟁론기(耳目口鼻爭論記)’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의인화한 일곱 가지 바느질 도구들이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 풍자적인 재미를 주듯 그렇게 써보고 싶은 것이다.
이목구비!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면서 욕실의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다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65년 동안이나 날마다 세수를 하면서 거울을 보았는데도 그날따라 갑자기 왜 순서를 이‧목‧구‧비라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그것이 착상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한 편의 수필은 순간적인 착상에 따라 씌어지기도 한다.
사람의 이목구비를 생각하노라니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동물의 이목구비가 그 생김새는 달라도 기능은 대동소이하려니 싶다. 그러나 동물들은 저희들이 스스로 이목구비니 뭐니 표현하지 않으니 문제가 없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는 사람들만이 말과 글로 이목구비라고 떠벌이니 그게 문제다. 나는 이 글에서 속담과 실존인물,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들까지 끌어들여 재미를 더해주려고 했다. 수필은 그 길이가 길든 짧든 독자에게 어느 정도 재미를 주어야 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이목구비가 고장 나면 어떤 병원을 찾아야 하는지 내 생각의 영역을 넓혀 보았다. 눈은  단일 진료과목의 안과가 있지만 귀와 입, 코는 세 가지가 합쳐져야 이비인후과를 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눈[目]을 맨 앞에 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결미부문에서는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깔았다. 짧은 수필이지만 말장난에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때때로 이목구비가 고장 난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꼴이 신문․방송에 나오면 못 보고 못 듣는 봉사나 귀머거리가 부럽고, 오염된 공기나 구린내를 만나면 코가 고장 난 사람이 부럽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정치인들이나 말을 잘못해서 오랏줄에 묶여 가는 사람들을 보면 벙어리가 낫겠다 싶다. 이래서 일체유심조일까?”






*김 학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아름다운 도전>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9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동포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전주시예술상 등 다수 수상/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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