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 그리고 문지기 섬, 독도
2007.06.28 09:20
<김학의 샘터에서> '동해바다 그리고 문지기 섬, 독도'
김학 칼럼니스트
(Ⅰ)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일개 소대를 이끌고 대간첩작전을 나갔던 나는 모처럼 짬을 내어 낙산해수욕장을 찾았다. 땡볕이 쨍쨍 내리쬐던 1966년 7월 어느 주말이었다. 동해바다의 바닷물이 모래밭으로 밀려왔다 물러나곤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몹시 즐거웠다. 시간 가는 줄도 잊었다.
수영복차림으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나는, 경사가 완만한 서해바다 해수욕장과는 달리 동해바다의 해수욕장은 급경사여서, 내 몸이 자꾸 바닷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었다. 앞에서 부서지면서 내 몸을 핥아대는 파도의 포말들은 자꾸만 내 몸을 애무하였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파도의 애무는 마치 부드러운 연인의 손길 같아서 결코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오래오래 그 애무를 즐기고 싶었다. 그 파도의 애무 때문에 동해바다의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이 서해나 남해보다 더 많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검푸른 동해바다와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바다로 달려가 몸을 내맡긴 채 검푸른 파도를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바다를 찾으면 언제나 가슴이 탁 트이고 후련했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온갖 번뇌도 바닷바람에 씻겨 사라져 버렸다. 동해바다는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유행가 노랫말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그대로 망부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내 몸을 어루만지면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훌훌 나는 기분이었다.
그날 동해바다와 나의 만남은 두 번째 상봉이었다. 그 1965년 10월이던가. 설악산으로 대학졸업기념 수학여행을 가다 강릉경포대해수욕장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처음으로 동해바다를 만났었다.
경포대해수욕장의 송림(松林)과 백사장에는 그날 밤 어찌나 밝은 달빛이 쏟아지던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경포대에는 여러 개의 달이 뜬다더니 그건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경포대 분위기 때문에 술맛 역시 좋았고, 술을 몇 잔씩 마셨으니 그 경포대의 달밤이 얼마나 감미롭고 환상적이었겠는가.
10월의 밤 날씨가 쌀쌀한데도 친구 ㅇ군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바닷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말릴 틈도 없었다.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며, 분위기에 취하여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내가 제대하고 강원도를 떠나 전주로 오면서부터 동해바다와 나는 사이가 멀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자주 만날 수 없자 그리된 것이다. 그 뒤 가끔 서해바다나 남해바다를 찾았지만 나는 결코 동해바다를 잊은 적이 없었다.
서해바다나 남해바다에서도 나는 동해바다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었다. 가뭄에 콩 나듯 부산이나 포항을 찾으면 바로 바다로 달려갔다. 같은 동해바다지만 경포대나 낙산사 앞 바다와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그러다 1999년 8월 주문진항에서 호화여객선 봉래호(蓬萊號)를 타고 망망한 동해바다를 가르며, 늘 가고 싶었고 꿈에 그리던 북녘 땅, 금강산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동해바다와 나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때만 해도 금강산관광객들은 봉래호에서 자고 먹으며 2박 3일 동안 금강산을 오르내려야 했었다. 나는 결국 동해바다에 누워서 이틀 밤이나 잠을 자야 했었다.
(Ⅱ)
▲ 고지도는 대마도가 분명 우리 땅임을 생생히 입증하고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독도의 역사와 지리, 환경을 훤히 알 수 있는 노랫말로 된 대중가요다. 가사가 길어서 나는 감히 배우려고도 하지 않던 노래였다. 그러나 그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을 때마다 울릉도와 독도를 한 번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그 노래가 방송에서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독도문제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외교문제로 부각되면서 그렇게 되었다던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상북도 울릉읍 도동 산63/ 동경132 북위37 평균기온12도 강수량은 1,300 독도는 우리 땅//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 알 물새알 해녀대합실/ 17만 평방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이 노랫말 1절만 기억하면 독도의 지리공부는 만점이다. 팔순을 코앞에 둔 어느 원로 퇴직교육자 A선생은 노래방에만 가면 으레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른다. 애국의 노래만 골라 부르는 A선생이 맨 처음 고르는 게 바로 이 노래다. 화면에서 이 노랫말을 보지 않고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이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들의 고막이 터질 지경이다.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
이 노랫말 2절은 독도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사료(史料)를 근거로 제시하며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있다. A선생은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이 노랫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내가 한때 잊고 살았던 이 노래를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순전히 A선생 덕이다.
A선생을 만나면서부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에서 날마다 들려주어 온 국민이 애창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7천만 겨레의 애창곡이 된다면 어찌 이웃 나라 일본이 감히 우리네 독도를 자기네 땅 ‘다께시마’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Ⅲ)
독도는 울릉도에서 87.4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는 외로운 화산섬이다. 그 독도는 비교적 큰 동‧서 두 개의 섬과 작은 바위섬들로 이루어진 섬으로서 동해바다에 떠있는 마침표 같은 섬이고, 동해바다를 지키는 문지기다. 이 독도란 섬의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을까?
독도가 처음 문헌에 나타난 것은 1906년 광무 10년의 일이다. 울릉군청에 보관된 울릉군수 보고서 광무10년 병오년 음력 3월 5일조에 ‘본부소속독도’라 기록되었으며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광무 10년조에 독도의 명칭이 보인다.
그런데 노일전쟁 때 일본이 이 섬을 강탈한 뒤 독도의 명칭을 없애고 다께시마[竹島]라 불렀다. 또 프랑스는 독도를 리앙쿠르(Liancourt), 영국은 호넷(Hornet)이란 이름으로 해도(海圖)에 표시하였다. 독도의 수난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국제법상 ‘실효적 지배’란 국가가 당해 영토에 대해 행정·입법·사법적으로 국가권능을 평화롭고 충분하게 지속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엄연히 독도라는 이름이 있고, 주인이 잘 보호하고 있는데도 이처럼 엉터리 같은 일이 벌어졌다. 눈 뜨고 코 베어간다더니 이런 경우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원래 다께시마는 1693년(숙종 19년) 이래 일본이 울릉도를 지칭하던 이름인데 고종 때 일본이 슬그머니 울릉도를 마쯔시마[松島]라 개칭하고 다께시마란 이름을 독도에 옮겨 붙인 것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프랑스가 독도를 리앙쿠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849년(헌종 15년)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리앙쿠르호가 이 섬을 발견하여 붙인 이름이다. 또 호넷은 1885년(철종 6년) 영국의 중국함대 소속의 기선 호넷호가 이 섬을 발견하고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희한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이미 조선시대 초부터 그 독도를 우산(于山)‧삼봉(三峰) 등으로 부르고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시켰던 섬이다.
세종실록에는 울진현의 부속도서를 우산도와 무릉도(武陵島:울릉도)로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우산도를 울진현 소속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도의 역사를 대강 간추려 보아도 이처럼 뿌리가 뚜렷하거늘 그 누가 독도를 발견했다고 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또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 있단 말인가. 내일은 A선생과 함께 노래방에 들러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들어야겠다.
◇ 김학 프로필
現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現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KBS 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 역임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월간문학에서 수필가로 등단
‘아름다운 도전' '춘향골 이야기'등 수필집 9권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한국수필상 등 多數
김학 칼럼니스트
(Ⅰ)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일개 소대를 이끌고 대간첩작전을 나갔던 나는 모처럼 짬을 내어 낙산해수욕장을 찾았다. 땡볕이 쨍쨍 내리쬐던 1966년 7월 어느 주말이었다. 동해바다의 바닷물이 모래밭으로 밀려왔다 물러나곤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몹시 즐거웠다. 시간 가는 줄도 잊었다.
수영복차림으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나는, 경사가 완만한 서해바다 해수욕장과는 달리 동해바다의 해수욕장은 급경사여서, 내 몸이 자꾸 바닷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었다. 앞에서 부서지면서 내 몸을 핥아대는 파도의 포말들은 자꾸만 내 몸을 애무하였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파도의 애무는 마치 부드러운 연인의 손길 같아서 결코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오래오래 그 애무를 즐기고 싶었다. 그 파도의 애무 때문에 동해바다의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이 서해나 남해보다 더 많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검푸른 동해바다와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바다로 달려가 몸을 내맡긴 채 검푸른 파도를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바다를 찾으면 언제나 가슴이 탁 트이고 후련했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온갖 번뇌도 바닷바람에 씻겨 사라져 버렸다. 동해바다는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유행가 노랫말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그대로 망부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내 몸을 어루만지면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훌훌 나는 기분이었다.
그날 동해바다와 나의 만남은 두 번째 상봉이었다. 그 1965년 10월이던가. 설악산으로 대학졸업기념 수학여행을 가다 강릉경포대해수욕장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처음으로 동해바다를 만났었다.
경포대해수욕장의 송림(松林)과 백사장에는 그날 밤 어찌나 밝은 달빛이 쏟아지던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경포대에는 여러 개의 달이 뜬다더니 그건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경포대 분위기 때문에 술맛 역시 좋았고, 술을 몇 잔씩 마셨으니 그 경포대의 달밤이 얼마나 감미롭고 환상적이었겠는가.
10월의 밤 날씨가 쌀쌀한데도 친구 ㅇ군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바닷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말릴 틈도 없었다.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며, 분위기에 취하여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내가 제대하고 강원도를 떠나 전주로 오면서부터 동해바다와 나는 사이가 멀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자주 만날 수 없자 그리된 것이다. 그 뒤 가끔 서해바다나 남해바다를 찾았지만 나는 결코 동해바다를 잊은 적이 없었다.
서해바다나 남해바다에서도 나는 동해바다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었다. 가뭄에 콩 나듯 부산이나 포항을 찾으면 바로 바다로 달려갔다. 같은 동해바다지만 경포대나 낙산사 앞 바다와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그러다 1999년 8월 주문진항에서 호화여객선 봉래호(蓬萊號)를 타고 망망한 동해바다를 가르며, 늘 가고 싶었고 꿈에 그리던 북녘 땅, 금강산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동해바다와 나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때만 해도 금강산관광객들은 봉래호에서 자고 먹으며 2박 3일 동안 금강산을 오르내려야 했었다. 나는 결국 동해바다에 누워서 이틀 밤이나 잠을 자야 했었다.
(Ⅱ)
▲ 고지도는 대마도가 분명 우리 땅임을 생생히 입증하고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독도의 역사와 지리, 환경을 훤히 알 수 있는 노랫말로 된 대중가요다. 가사가 길어서 나는 감히 배우려고도 하지 않던 노래였다. 그러나 그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을 때마다 울릉도와 독도를 한 번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그 노래가 방송에서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독도문제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외교문제로 부각되면서 그렇게 되었다던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상북도 울릉읍 도동 산63/ 동경132 북위37 평균기온12도 강수량은 1,300 독도는 우리 땅//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 알 물새알 해녀대합실/ 17만 평방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이 노랫말 1절만 기억하면 독도의 지리공부는 만점이다. 팔순을 코앞에 둔 어느 원로 퇴직교육자 A선생은 노래방에만 가면 으레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른다. 애국의 노래만 골라 부르는 A선생이 맨 처음 고르는 게 바로 이 노래다. 화면에서 이 노랫말을 보지 않고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이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들의 고막이 터질 지경이다.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
이 노랫말 2절은 독도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사료(史料)를 근거로 제시하며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있다. A선생은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이 노랫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내가 한때 잊고 살았던 이 노래를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순전히 A선생 덕이다.
A선생을 만나면서부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에서 날마다 들려주어 온 국민이 애창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7천만 겨레의 애창곡이 된다면 어찌 이웃 나라 일본이 감히 우리네 독도를 자기네 땅 ‘다께시마’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Ⅲ)
독도는 울릉도에서 87.4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는 외로운 화산섬이다. 그 독도는 비교적 큰 동‧서 두 개의 섬과 작은 바위섬들로 이루어진 섬으로서 동해바다에 떠있는 마침표 같은 섬이고, 동해바다를 지키는 문지기다. 이 독도란 섬의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을까?
독도가 처음 문헌에 나타난 것은 1906년 광무 10년의 일이다. 울릉군청에 보관된 울릉군수 보고서 광무10년 병오년 음력 3월 5일조에 ‘본부소속독도’라 기록되었으며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광무 10년조에 독도의 명칭이 보인다.
그런데 노일전쟁 때 일본이 이 섬을 강탈한 뒤 독도의 명칭을 없애고 다께시마[竹島]라 불렀다. 또 프랑스는 독도를 리앙쿠르(Liancourt), 영국은 호넷(Hornet)이란 이름으로 해도(海圖)에 표시하였다. 독도의 수난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국제법상 ‘실효적 지배’란 국가가 당해 영토에 대해 행정·입법·사법적으로 국가권능을 평화롭고 충분하게 지속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엄연히 독도라는 이름이 있고, 주인이 잘 보호하고 있는데도 이처럼 엉터리 같은 일이 벌어졌다. 눈 뜨고 코 베어간다더니 이런 경우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원래 다께시마는 1693년(숙종 19년) 이래 일본이 울릉도를 지칭하던 이름인데 고종 때 일본이 슬그머니 울릉도를 마쯔시마[松島]라 개칭하고 다께시마란 이름을 독도에 옮겨 붙인 것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프랑스가 독도를 리앙쿠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849년(헌종 15년)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리앙쿠르호가 이 섬을 발견하여 붙인 이름이다. 또 호넷은 1885년(철종 6년) 영국의 중국함대 소속의 기선 호넷호가 이 섬을 발견하고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희한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이미 조선시대 초부터 그 독도를 우산(于山)‧삼봉(三峰) 등으로 부르고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시켰던 섬이다.
세종실록에는 울진현의 부속도서를 우산도와 무릉도(武陵島:울릉도)로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우산도를 울진현 소속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도의 역사를 대강 간추려 보아도 이처럼 뿌리가 뚜렷하거늘 그 누가 독도를 발견했다고 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또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 있단 말인가. 내일은 A선생과 함께 노래방에 들러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들어야겠다.
◇ 김학 프로필
現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現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KBS 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 역임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월간문학에서 수필가로 등단
‘아름다운 도전' '춘향골 이야기'등 수필집 9권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한국수필상 등 多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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