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 운동장에서

2007.11.18 10:44

공순혜 조회 수:777 추천:4

어느 가을날 운동장에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공순혜


지금 나는 운동장 트랙을 열 바퀴째 돌고 있다. 아직도 5바퀴 더 돌아야 한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데 4분씩 걸린다.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밖에 나갈 일이 없을 때는 기린봉으로 간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넉넉지 않을 때는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한 시간씩 걷는다.

언젠가부터 초등학교 운동장은 초등학생들보다 노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공부시간이 끝나기 바쁘게 학원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 논술, 피아노, 컴퓨터 등 온갖 학원을 전전해야 겨우 대학이라는 이름의 전당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여운 우리아이들이다. 공부만 잘해 일류학교만 가면 제일 잘난 아들이자 손자들이니 이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놀이와 운동을 하지 않으니 신체는 나약해지고 지구력은 없어져 끈기와 인내심이 길러질 리 없다. 마음껏 뛰놀지 못하니 쌓인 스트레스로 착한 성품이 될 수도 없어 서로 친구끼리 시기질투에 왕따와 폭행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운동장을 돌 때 보니 교실 앞에 아롱이다롱이반이라고 씌어져 있어서 그 앞을 지날 때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이 상상되어서다. 또 역사 교육관이란 곳도 있었다. 거기서는 흐뭇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 세계역사를 배우면 미래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판단력과 가치관이 길러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학교가 끝나기 바쁘게 아이들은 흩어져 제 갈 길로 가고나면 운동장은 텅 빈다. 그 자리를 갈데없고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차지하고 잡담을 나누거나 가끔은 나같이 걷기운동을 한다. 운동장에 할 일 없이 앉아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더 처량하고 가엾기 그지없다. 할아버지들은 무엇을 해야 담뱃값이나 술값을 벌 수 있을지 이 궁리 저 궁리들을 한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할머니들은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단다.  거기에 며느리들의 눈치까지 보아야 하니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고 하소연이다.  어쩌다 사는 세월은 길어져 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실버들의 서글픈 한숨소리가 운동장에 메아리쳐 돌아온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것이 축복만은 아닌 듯싶다.
  
  30여 년 전 푸른 하늘이 높아진 어느 가을운동회 때 우리 딸 수현이가 달리기선수로 뽑혔었다. 운동을 잘하지 못하고 약한 우리 수현이가 달리기선수로 뽑혔다는 것이 기쁨 그 자체였다.  그날 나는 마치 내가 선수라도 된 양 들뜬 기분으로 빨강모자, 빨강점퍼, 빨강운동화에 흰바지를 입고 새로 산 미놀타 수동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온갖 일은 다 제쳐놓고 맛있는 먹을 것들을 몇 바구니 준비해 가지고 일찍 운동장으로 갔다. 드디어 달리기경기가 시작되었다.  안간힘을 쓰며 젖 먹던 힘까지 다 내며 꼴찌로 달리고 있는 귀여운 내 딸.  꼴지라도 좋았다.  선수로 뽑혔다는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이요 환희였다.  나는 연신 계속해서 tu터를 눌러댔다.  지금도 그 때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그 빛바랜 꼴찌로 달려오는 우리 딸의 사랑스런 흑백사진을…….
  그 뒤 10년이 지나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씩씩하며 운동도 잘했다.  운동회 때나  학교행사 때면 전체 학생대표로 선서를 하였지만, 딸이 꼴찌로 달리던 달리기경기 때보다 더 큰 감격과 기쁨은 아니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수현이가 어느 가을날,
“엄마, 오늘 희지 운동회 날인데 희지가 달리기에서 3등을 했어. 너무 귀엽고 예뻐!”
하고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그 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너는 젊고 네 아이는 귀여운 어린애니까. 나도 너 학교 다닐 때 그랬어. 너는 꼴찌를 해도 나는 기뻤고 사랑스러웠었다. 그런데 네 딸은 3등이나 했으니 오죽 좋았겠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흘러간 세월이 아쉽고 그리웠다.
  
  운동장을 돌 때면 우리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쁨의 순간들이 스쳐지나가며 그리움과 서글픔, 외로움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새 15바퀴를 돌고 한 시간이 지났다. 발길을 집으로 돌리며 언제나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공차는 소리와 뛰노는 활기찬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운동장을 걸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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