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님께

2007.12.11 08:47

정원정 조회 수:724 추천:2

아우(雅友)님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정원정

                                                            

  고향에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공기도 쌀쌀하고 연기를 퍼질러 놓은 듯, 산도들도 뿌옇게 흐립니다. 하늘마저 옅은 구름으로 덮여있어 개운치 않지만 초겨울인데도 봄날 같은 기분이 연상 되네요.
아우(雅友)님!
정읍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그땐 만나 본 적도 없는 훤칠한 어떤 고등학생이 떠올랐습니다. 검은 교복을 단정히 입은 미소년이었을 아우(雅友)님의 모습입니다. 그 소년이 나가던 교회를 출입했던 나 역시 18세 소녀티를 막 벗은 때였습니다. 그 교회는 내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었지요. 내 오빠와도 잘 아는 생면부지의 아우(雅友)님을 나이 들어 수필창작반에서 글벗으로 만났습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은가 보지요?

벌써 버스는 성내(星內)를 지나고 있네요. 그 옛날 내가 걸어가던 길은 샛길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새로 난 고속도로를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네요. 옛날 저 샛길에는 미루나무 가로수가 서 있었는데 지금은 웬 전신주만 저리도 많이 서 있는지, 논배미에도 넓고 좁은 길 가에도 온통 전신주만 우뚝우뚝 서 있군요.

어느 초겨울이었던가요? 아침나절 나는 자갈이 깔린 신작로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줄줄이 벌거숭이로 서 있는 미루나무를 하나 둘 뒤로하며 걸었지요. 대학교( 그 시절은 전시라 해서 전시연합대학이 부산에 있었음)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성내에 와서 큰언니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날은 20리 남짓한 길을 걸어서 돌아가는 귀향길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버스비도 아껴야 했지만 버스도 드문드문 다니다보니 20리 길쯤은 걸어 다녔습니다. 그 즈음 나는 무릎 밑까지 내려온 짧은 검은 한복치마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구두는 갈색 단화를 신었었지요. 머리는 뒤로 묶어서 반은 시골처녀였지만 손에 든 다색 가죽가방은  도시처녀 같았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이 들고 다니던 접은 가방(일명 오리가방)을 들었으니 대학생 아니면 교사로 보였겠지요. 시골에서 흔치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동네를 막 벗어난 때였습니다. 뒤에서 어떤 군용 지프차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 옆에 찍하고 급정거를 하더군요. 덮개가 없는 차에는 운전병과 네 명의 군인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 중 한 명이 말을 걸어 왔습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부안면까지 가는데요.”
“타십시오.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보아하니 다 내 또래였습니다. 그 중에는 중위 계급장도 보였습니다. 잠시 주춤거리다 도시처녀답게 차에 올라탔습니다. 모두가 젊어서인지 생기발랄했습니다. 내 모습이 추워 보였을까, 그 중 누군가는 장난스레 자기 잠바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고창 소재지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고창이라면 나는 가다가 중간지점인 <흥덕>에서 내려 우리 집까지  10리길을 더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들은 그들은 고맙게도 우리 동네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흥겨운지 시종 주절대며 부안면 오산리 우리 동네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습니다. 그 뒤 동네에서는 원정이가 군인차를 타고 왔다고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마치 금의환향이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시절 시골은 군인 차를 얻어 타고와도 명성(?)을 얻는 때였습니다.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는 사이 내 고향 첫머리에 이르렀습니다. 온갖 세상구경을 하고 영혼까지 찌든 80나이를 바라보는 지금, 아무도 맞아 줄 사람이 없는 동네 초입에 섰습니다. 옛날 꼬맹이들이 그 밑에서 뛰놀던 정자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노구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네요. 아름답던 초가집은 간데없고 슬래브 지붕만 보입니다. 주위의 경관이 산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아름다운 곳은 아닌데도 한 가지 고마웠던 것은 교회가 있어 기독교의 복음을 통해 나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우(雅友)님!
내가 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듯이 늘어놓는 얘긴데 상상이 되십니까? 나는 18세까지 시골에 있으면서 겨우 초등학교만 나왔기에 일본어 책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어는 2학년 한 학기까지만 얼렁뚱땅 배웠으니 까마득히 잊었고 시골에서 쓰는 우리말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8.15광복이 된 다음 해, 18세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어느 날 설교에서 ‘건설적인’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깜박 반했습니다. 뜻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런 멋진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저런 좋은 말이 있었구나 싶어서 가슴에 딱 붙는 단어였습니다. 그때까지 시골에서 유식한 언사를 들어 본 적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도 역시 한글은 읽지도 못했으니 그 말이 얼마나 차원 높게 들렸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설교는 기억에 없는데 그 ‘건설적인’이란 언사만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그 오두막 집 같은 교회도 자리를 옮겨 자취도 없네요.
내가 자라던 집은 흔적도 없고 집터는 복분자 밭이 되어 있군요. 아는 이도 없는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있습니다. 시멘트로 덮여 있는 고샅길은 옛날 같은 흙길은 아니지만 그대로이고, 내가 어렸을 때 저녁이면 깜깜해서 무서워했던 뒷골목도 그대로군요. 멀리 보이는 산도 그대로구요.
이번이 나의 마지막 고향방문일지도 모릅니다. 떠나오면서 보니 동네 어귀에 새워진 큰 돌에 ‘오산리’란 글자가 새겨져 있네요. 왠지 눈물이 핑 도는군요.

  아우(雅友)님! 참 지루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 놓았네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만수무강하십시오.
                                            
                                         (200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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