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폼페이
2007.11.21 06:19
비운의 폼페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이의
세기 초의 도시를 21세기 현대에 갔다 놔도 하나도 손색이 없는 도시 폼페이가 사라진지 16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AD79년 8‧ 24. 정오 무렵 3시간이 넘는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가 갑자기 덮쳐 인구 2만 명중 2천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 행적을 모르다가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의 뜰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그 정체가 들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한 모양이다. 폼페이의 입구 왼쪽에는 목욕탕이 있고 위로 공창이 있었다고 한다. 입구로 향한 비스듬히 오르는 길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명확했다. 이태리 관광지 어디를 가나 도로나 광장에는 네모난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곳 길도 역시 사각의 돌로 깔려있었으며, 길은 일방통행으로 구부러지는 곳마다 말을 그려 통행 표시를 하고 있었다. 마차바퀴가 할퀴고 간 자욱 깊이 연대를 추정한 고고학자에 따르면 BC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라고 했다. 집들은 대개 2층으로 건축되어 있었는데 1층은 상가였으며 2층은 주거지였다고 한다.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그러한 주거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항구도시 폼페이는 상업이 발달하여 풍족한 휴양과 환락의 도시로서 황금시대를 구가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화려한 벽화가 상인의 집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으며, 내부의 구조도 훌륭해 보였다. 번화한 거리에 창녀촌이 다른 집과 달리 앞쪽에 발코니를 달아 유혹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며, 이런 장소에 함께 공존함도 당시의 퇴폐적인 사회를 말해주고 있었다. 상업이 번성한 도시답게 계측소에서 돌 추를 사용하였던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고, 공동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목욕문화가 발달하여 지금의 고급 사우나, 헬스장을 무색케 할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영장은 냉탕과 온탕을 겸비하고 있었고, 목욕탕은 2중 벽 속에 주석을 넣어 따뜻한 공기를 보존하도록 한 놀라운 시설이었다. 중간에 헬스장이며 불가마 시설도 훌륭하였다.
유물들이 있는 전시장을 둘러보니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였다. 자연에 의한 발생인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의 저주인지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미라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임산부가 아기를 보호하려고 엎드려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시체, 똑바로 누워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시체, 졸지에 날벼락을 맞고 쪼그리고 앉아 죽어간 최후의 의식 끝자락엔 무슨 생각들이 스쳤을까? 남녀가 필사적으로 껴안고 있는 모습은 죽음의 순간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환락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얼마나 순간적인 죽음이었기에 몸부림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은 모습 외에는 미라에서 다른 동작을 찾을 수가 없었다. 16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당시의 모습을 있는 대로 보고 넘기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듯하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느 골목길에는 큰 술독이 있어 와인 바가 번성했던 그때를 말해주고 있었으며, 한 쪽에는 세탁소가 보였다. 그런가하면 주식인 빵을 만드는 장소에는, 밀을 가는 맷돌, 대형 오븐, 빵을 판매하던 장소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도시 한 편에는 지금의 호화콘도를 무색케 하는 화려한 휴양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많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는 야외 공공장소도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쓸쓸한 폐허의 자리에도 잡초는 자라고 있었고, 무심한 바람도 그냥 스쳐 지나지 못하고 잠시 머물다 가는 듯하였다.
휘돌아 내려오다 보니 지금도 계속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엇하던 곳인지 큰 원형 기둥이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3/5정도만 발굴되어 도시를 완전 복원하려면 얼마의 세월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폐허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마음이 숙연해져 묵묵히 걸었다. 비운의 도시 폼페이는 내 기억 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듯싶다.
다음 행선지는 아름다운 소렌토, 모처럼 활짝 갠 햇살이 바다위에서 반짝이고 배에서 들려오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란 노래가 선창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2007. 11. 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이의
세기 초의 도시를 21세기 현대에 갔다 놔도 하나도 손색이 없는 도시 폼페이가 사라진지 16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AD79년 8‧ 24. 정오 무렵 3시간이 넘는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가 갑자기 덮쳐 인구 2만 명중 2천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 행적을 모르다가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의 뜰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그 정체가 들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한 모양이다. 폼페이의 입구 왼쪽에는 목욕탕이 있고 위로 공창이 있었다고 한다. 입구로 향한 비스듬히 오르는 길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명확했다. 이태리 관광지 어디를 가나 도로나 광장에는 네모난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곳 길도 역시 사각의 돌로 깔려있었으며, 길은 일방통행으로 구부러지는 곳마다 말을 그려 통행 표시를 하고 있었다. 마차바퀴가 할퀴고 간 자욱 깊이 연대를 추정한 고고학자에 따르면 BC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라고 했다. 집들은 대개 2층으로 건축되어 있었는데 1층은 상가였으며 2층은 주거지였다고 한다.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그러한 주거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항구도시 폼페이는 상업이 발달하여 풍족한 휴양과 환락의 도시로서 황금시대를 구가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화려한 벽화가 상인의 집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으며, 내부의 구조도 훌륭해 보였다. 번화한 거리에 창녀촌이 다른 집과 달리 앞쪽에 발코니를 달아 유혹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며, 이런 장소에 함께 공존함도 당시의 퇴폐적인 사회를 말해주고 있었다. 상업이 번성한 도시답게 계측소에서 돌 추를 사용하였던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고, 공동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목욕문화가 발달하여 지금의 고급 사우나, 헬스장을 무색케 할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영장은 냉탕과 온탕을 겸비하고 있었고, 목욕탕은 2중 벽 속에 주석을 넣어 따뜻한 공기를 보존하도록 한 놀라운 시설이었다. 중간에 헬스장이며 불가마 시설도 훌륭하였다.
유물들이 있는 전시장을 둘러보니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였다. 자연에 의한 발생인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의 저주인지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미라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임산부가 아기를 보호하려고 엎드려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시체, 똑바로 누워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시체, 졸지에 날벼락을 맞고 쪼그리고 앉아 죽어간 최후의 의식 끝자락엔 무슨 생각들이 스쳤을까? 남녀가 필사적으로 껴안고 있는 모습은 죽음의 순간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환락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얼마나 순간적인 죽음이었기에 몸부림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은 모습 외에는 미라에서 다른 동작을 찾을 수가 없었다. 16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당시의 모습을 있는 대로 보고 넘기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듯하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느 골목길에는 큰 술독이 있어 와인 바가 번성했던 그때를 말해주고 있었으며, 한 쪽에는 세탁소가 보였다. 그런가하면 주식인 빵을 만드는 장소에는, 밀을 가는 맷돌, 대형 오븐, 빵을 판매하던 장소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도시 한 편에는 지금의 호화콘도를 무색케 하는 화려한 휴양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많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는 야외 공공장소도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쓸쓸한 폐허의 자리에도 잡초는 자라고 있었고, 무심한 바람도 그냥 스쳐 지나지 못하고 잠시 머물다 가는 듯하였다.
휘돌아 내려오다 보니 지금도 계속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엇하던 곳인지 큰 원형 기둥이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3/5정도만 발굴되어 도시를 완전 복원하려면 얼마의 세월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폐허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마음이 숙연해져 묵묵히 걸었다. 비운의 도시 폼페이는 내 기억 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듯싶다.
다음 행선지는 아름다운 소렌토, 모처럼 활짝 갠 햇살이 바다위에서 반짝이고 배에서 들려오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란 노래가 선창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2007.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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