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이 가도 변함없는 한지처럼 오랜 친구사이
2007.11.18 11:33
천년이 가도 변함없는 한지처럼 오랜 친구사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정원정
*위 제목은 2001년 5월 5일 전북제일신문에 사진과 함께 어느 구석에 실린 꼭지 글이다.
한지대전이 열리고 있는 전북예술회관 1층 전시실에서다. 친구와 나는 55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동창생이었다. 그 친구가 가까스로 나를 찾아 전화를 주었을 때 그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여 처음 만난 것이다. 내 작품이 입선해서 그곳에 가게 된 날로 약속날짜를 정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신문기자의 눈에 띄었을까? 사진기자를 대동한 여기자가 자꾸만 가까이 와서 인터뷰한 것이 이렇게 소개되었다.
“머리 희끗한 채로 55년 만에 ‘친구 찾기’에 성공한 이들의 모습이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한지마냥 곱다.
그렇다. 우리는 초등하교 때 단짝이었다. 친구는 넉넉하게 사는 약방 집 손녀였다. 얼굴이 하얗고 포동포동하여 깔끔해 보이는 아이였다. 한동안 그는 등굣길에 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함께 가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눈깔사탕을 내게 몇 개 쥐어 주기도 했었다. 그 시절 눈깔사탕은 귀한 것이었는데 아마 저 먹을 것을 아껴서 건네주는 것 같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도 그렇게 살가운 데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 누구나 그 시절 시골에서, 스무 살도 못 되어 결혼했듯이 그도 결혼하게 되었다. 내게 원앙침 수를 놓아달라고 했었다. 첫날밤부터 부부가 함께 베는 원앙침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수를 놓아 주는 게 그 시절의 풍습이었다. 나는 며칠을 그의 집에서 머물면서 원앙침을 수놓아 준 기억이 있다. 기나긴 세월을 거치면서 그 뒤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가 나를 수소문해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세상 풍상 고단하게 넘어온 우리가 이제는 그나 나나 자식들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며,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우리는 전주와 정읍을 오고 가며, 옛 이야기를 풀어 놓고 허물없이 다시 가까워졌다. 교통이 편한 그의 집, 전주를 내가 더 찾아 다녔다. 그는 원앙침을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내가 수(繡)만 갖고 싶다고 했더니 서슴없이 뜯어 주었다. 내가 10대에 수놓은 솜씨를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였다.
그는 그런대로 건강해 보였고, 자녀들도 다 성공하고, 자녀들로부터 극진히 효도를 받으며 부부가 해로하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는 참 유복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은 것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어서였단다. 맛있는 것을 사먹으면서 여행을 다니자고 했다.
그는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다. 한 번은 내가 힘들게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혼자 못 먹어서 그렇다며, 더러 가면 이것저것 싸주는 바람에 무거워서 정읍의 택시를 호출해서 싸들고 오기도 했었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김장김치도 해마다 보내주었다.
그렇듯 든든하고 건강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입원을 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병원을 찾아 갔다. 돌아오면서 문병 왔던 그의 친척으로부터 들으니 골수암이라 했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재발 꿈이기를 바랐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퇴원한 뒤에 나는 한약처방과 고가의 공진환 처방을 한의사인 내 아들한테 받아서 전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기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잉어를 고아서 두어 차례 보냈었다. 원래 그는 시댁이나 친정이 한약방 집안이라 한약을 만들기도 하고 비싼 약재는 가지고 있었다. 경옥고도 집에서 고아서 복용했던 터라 처방전만 건네주어도 되었다. 병원에서 4개 월 시한부로 진단을 받았다는데 한약이 도움이 되었을까, 1년을 넘게 투병하다 약으로는 더 버틸 수가 없었는지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 날이 지난 9월 2일이었다.
처음 그의 병명을 알았을 때 나는 허방에 빠진 듯 허둥댔다. 그리고 기어이 가버린 비보를 들었을 때 눈물감당을 못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만이라도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막상 장례식에는 참석도 못했다. 그의 두 딸이 일부러 안 알린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전화를 해 주었다. 그전에 임종이 가까운듯해서 한 번 더 병문안을 가려 했더니 두 딸이 극구 말리더니만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던 것을…….
그 엄마의 그 딸이듯, 지금 그들이 나를 극진히 챙겨 주어서 감격에 겨울 때가 있다. 저희들의 엄마가 살았을 때는 나와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으니 모른 척해도 되련만……. 내가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온기 넘치는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누구 못지않게 살펴 주는 그들의 고운 마음을 무엇으로 보답하랴 싶다. 살아서 아낌없이 정을 쏟아준 친구, 그의 딸들이 그가 떠난 하전한 뒷자리를 거꾸로 따뜻하게 채워 주다니…….
나는 누구에게 이처럼 두터운 정을 전해 준 일이 있었던가, 받기만 하지 않았던가, 생활에서 본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온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멀리멀리 가버렸다. 그가 묻혀있는 먼 산허리에 소슬한 바람이 스치는 이 깊은 가을에 다시 눈물로 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2007. 11. 19.)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정원정
*위 제목은 2001년 5월 5일 전북제일신문에 사진과 함께 어느 구석에 실린 꼭지 글이다.
한지대전이 열리고 있는 전북예술회관 1층 전시실에서다. 친구와 나는 55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동창생이었다. 그 친구가 가까스로 나를 찾아 전화를 주었을 때 그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여 처음 만난 것이다. 내 작품이 입선해서 그곳에 가게 된 날로 약속날짜를 정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신문기자의 눈에 띄었을까? 사진기자를 대동한 여기자가 자꾸만 가까이 와서 인터뷰한 것이 이렇게 소개되었다.
“머리 희끗한 채로 55년 만에 ‘친구 찾기’에 성공한 이들의 모습이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한지마냥 곱다.
그렇다. 우리는 초등하교 때 단짝이었다. 친구는 넉넉하게 사는 약방 집 손녀였다. 얼굴이 하얗고 포동포동하여 깔끔해 보이는 아이였다. 한동안 그는 등굣길에 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함께 가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눈깔사탕을 내게 몇 개 쥐어 주기도 했었다. 그 시절 눈깔사탕은 귀한 것이었는데 아마 저 먹을 것을 아껴서 건네주는 것 같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도 그렇게 살가운 데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 누구나 그 시절 시골에서, 스무 살도 못 되어 결혼했듯이 그도 결혼하게 되었다. 내게 원앙침 수를 놓아달라고 했었다. 첫날밤부터 부부가 함께 베는 원앙침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수를 놓아 주는 게 그 시절의 풍습이었다. 나는 며칠을 그의 집에서 머물면서 원앙침을 수놓아 준 기억이 있다. 기나긴 세월을 거치면서 그 뒤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가 나를 수소문해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세상 풍상 고단하게 넘어온 우리가 이제는 그나 나나 자식들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며,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우리는 전주와 정읍을 오고 가며, 옛 이야기를 풀어 놓고 허물없이 다시 가까워졌다. 교통이 편한 그의 집, 전주를 내가 더 찾아 다녔다. 그는 원앙침을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내가 수(繡)만 갖고 싶다고 했더니 서슴없이 뜯어 주었다. 내가 10대에 수놓은 솜씨를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였다.
그는 그런대로 건강해 보였고, 자녀들도 다 성공하고, 자녀들로부터 극진히 효도를 받으며 부부가 해로하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는 참 유복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은 것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어서였단다. 맛있는 것을 사먹으면서 여행을 다니자고 했다.
그는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다. 한 번은 내가 힘들게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혼자 못 먹어서 그렇다며, 더러 가면 이것저것 싸주는 바람에 무거워서 정읍의 택시를 호출해서 싸들고 오기도 했었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김장김치도 해마다 보내주었다.
그렇듯 든든하고 건강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입원을 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병원을 찾아 갔다. 돌아오면서 문병 왔던 그의 친척으로부터 들으니 골수암이라 했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재발 꿈이기를 바랐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퇴원한 뒤에 나는 한약처방과 고가의 공진환 처방을 한의사인 내 아들한테 받아서 전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기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잉어를 고아서 두어 차례 보냈었다. 원래 그는 시댁이나 친정이 한약방 집안이라 한약을 만들기도 하고 비싼 약재는 가지고 있었다. 경옥고도 집에서 고아서 복용했던 터라 처방전만 건네주어도 되었다. 병원에서 4개 월 시한부로 진단을 받았다는데 한약이 도움이 되었을까, 1년을 넘게 투병하다 약으로는 더 버틸 수가 없었는지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 날이 지난 9월 2일이었다.
처음 그의 병명을 알았을 때 나는 허방에 빠진 듯 허둥댔다. 그리고 기어이 가버린 비보를 들었을 때 눈물감당을 못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만이라도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막상 장례식에는 참석도 못했다. 그의 두 딸이 일부러 안 알린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전화를 해 주었다. 그전에 임종이 가까운듯해서 한 번 더 병문안을 가려 했더니 두 딸이 극구 말리더니만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던 것을…….
그 엄마의 그 딸이듯, 지금 그들이 나를 극진히 챙겨 주어서 감격에 겨울 때가 있다. 저희들의 엄마가 살았을 때는 나와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으니 모른 척해도 되련만……. 내가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온기 넘치는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누구 못지않게 살펴 주는 그들의 고운 마음을 무엇으로 보답하랴 싶다. 살아서 아낌없이 정을 쏟아준 친구, 그의 딸들이 그가 떠난 하전한 뒷자리를 거꾸로 따뜻하게 채워 주다니…….
나는 누구에게 이처럼 두터운 정을 전해 준 일이 있었던가, 받기만 하지 않았던가, 생활에서 본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온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멀리멀리 가버렸다. 그가 묻혀있는 먼 산허리에 소슬한 바람이 스치는 이 깊은 가을에 다시 눈물로 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2007. 11. 19.)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514 | 노송동, 그 추억의 행복창고 | 김학 | 2007.12.18 | 758 |
| 513 | 비단 꽃 넘세 | 정원정 | 2007.12.17 | 736 |
| 512 | 종강하던 날 | 오명순 | 2007.12.17 | 724 |
| 511 | 수필을 배우면서 | 조규열 | 2007.12.11 | 755 |
| 510 | 아우님께 | 정원정 | 2007.12.11 | 724 |
| 509 | 광어회 | 김영옥 | 2007.12.10 | 727 |
| 508 | 난 사람과 된 사람 | 조규열 | 2007.12.05 | 743 |
| 507 |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 이윤상 | 2007.12.05 | 745 |
| 506 | 어머니와 아궁이 | 배영순 | 2007.12.03 | 741 |
| 505 | 대한문학 신인상을 받고 | 이수홍 | 2007.12.01 | 736 |
| 504 | 만남 | 오명순 | 2007.11.30 | 730 |
| 503 | 배꼽시계 | 최정순 | 2007.11.26 | 748 |
| 502 | 비운의 폼페이 | 이의 | 2007.11.21 | 798 |
| » | 천년이 가도 변함없는 한지처럼 오랜 친구사이 | 정원정 | 2007.11.18 | 798 |
| 500 | 어느 가을날 운동장에서 | 공순혜 | 2007.11.18 | 777 |
| 499 | 우리 집의 가을걷이 | 정원정 | 2007.11.15 | 725 |
| 498 | 까마귀 얼어죽은 날 | 신기정 | 2007.11.15 | 762 |
| 497 | 꿈에 그리던 금강산 | 박귀덕 | 2007.11.15 | 728 |
| 496 | 단수수와 수수깡 | 김세웅 | 2007.11.14 | 732 |
| 495 | 물의 도시 베니스 | 이의 | 2007.11.13 | 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