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없이 받은 귀한 선물

                                                  조옥동 시인
봄비가 촉촉이 쓰다듬고 간 자리에 새 생명들이 쏘옥 쏙 새살을 드러내고 있다. 동백이 자지러지고 그 붉은 핏자국 옆에서 자목련이 모르는 척 화관을 쓴다. 어떤 상황에도 자연의 시계는 멈춤이 없다. 아이티의 지진더미에 수십만 생명이 묻혀 신음소리가 퍼지는 곳에 며칠만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호의 손이 닿기 전에 사상자가 몇 배로 늘어 갈 일이 안타깝다.
신체 속에도 유전인자에 입력된 정보를 수행하는 각 세포의 수명을 조절하는 시계가 있다. 생명체 안에는 조직을 이루고 기관을 형성하는 세포의 생성과 죽음이 프로그램 되어 각종 세포의 수가 평형을 이룬다. 세포분열과 발달, 그 사멸은 생리현상이며 조직에서 일정한 세포 수를 유지하려는 반응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포의 사멸을 조정하는 유전자가 비활성화 되면 신호전달이 잘못되어 곧 세포의 생명시계에 고장이 생기고 정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할 세포는 유전자에 의하여 죽음이 유도되거나 반대로 죽을 세포는 계속 분열하여 암 같은 변이가 생긴다. 의학이나 생명과학의 연구는 프로그래머인 절대자로부터 신체 속에 프로그램 된 정보를 얻어내는 일이리라. 다운을 허락받아 조금씩 읽어내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의 원리를 캐는 과정은 생과 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변함없이 다가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재지변이나 테러 그리고 전쟁에 의한 사망과 파괴의 참혹함에는 민감하다. 우리의 신체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일엔 둔하거나 일부러 민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며칠 감기에도 목소리가 변하고 잦아질 듯 솟구치는 기침을 참기 어렵다. 작은 일에서 자신의 인내와 노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때로는 남을 비웃었다. 의지대로 생각대로 할 수 있다고 자만을 떨며 얼마나 열심히 달려 왔던가. 몸은 온전히 내 것이라 여기고 자존심을 입히려 기를 쓰며 머릿속엔 부지런히 지식을 주입했다. 인격까지도 원하는 형의 기준을 세워 놓고 목표를 향하여 달렸다.  
수년 전, 뼈가 부러지는 불의의 사고로 일어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이 몇 개월을 병상에서 살았다. 무릎이 아프고 시력이 변했다. 갑자기 귀속에서 매미가 울고 필름 감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때때로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왜 내가 냉장고 앞에 서 있는지 감감하다.  지녀 온 육신도 정신도 틀림없이 내 것이라고 믿었는데 오장육부, 오관과 기억력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능을 잃어가고 있고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자신의 몸과 정신, 물질을 자신의 뜻대로 관리 할 수 없는 것은 무능력자, 금치산자거나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잘못 소유한 것이다. 모든 것이 값없이 받은 귀한 선물임을 깨닫고 주신 분의 뜻을 헤아렸어야 했다. 인생이 너무 먼 거리를 지나 왔을지라도 잘못된 욕심을 이제 버리고 싶다.
“빌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말자./고개 숙여/ 하늘 앞에 깊이 고개 숙여/다 내려놓겠다고 말하자.”한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는 생명의 회복이다. 우리 생명의 존재가 소멸할 지라도 먼 훗날 다른 생명의 씨앗 속에서 움트고 있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열기 시작한 꽃송이들의 깨끗하고 우아함에 반하여 선한 소망들을 봉우리마다 하나씩 매달아 본다.


2-3-2010 "이 아침에"/미주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