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항아리

2006.06.21 04:20

유봉희 조회 수:44


유봉희 - [저, 항아리]
















저, 항아리
유 봉 희






목 깊은 백색 큰 항아리

꽃도 물도 담아 보지 못한

서재 한구석에 무거운 몸, 들여다보지 않았어도

품고 있는 것은 묵은 어둠뿐일 터

이제 어둠도 굳어서 나무등걸처럼 되어 있으려나

저 항아리, 때때로 목숨을 던져서라도

속어둠을 확 깨 버리고 싶은 적이 있을까

속울음 터트리고 싶은 적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물이 넘치면 흘러서 샛길을 내듯

항아리 속 어둠도 길을 트는가

밤마다 어둠을 타고 흘러나와

책장을 슬슬 넘겨보다가 그것도 덤덤해지면

창가에서 울어대는 밤새의 날개에 업혀

물비린내 자옥한 강가를 몇 번이고 돌아보고

마을 어귀의 묘지, 오래된 어둠도 만나보는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불빛 사그라지는 어떤 창가, 고뇌에 찬 이마에

살포시 손을 내렸다가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속 캄캄 어둠 품고 있는 저 무거운 몸이

청청 푸른 이마로 깊은 사유의 시간을

뿌리 내리고 있는지,



















유봉희 제 2 詩集 몇 만년의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