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서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눈오는 지도 (地圖) / 윤 동 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사랑의 전당 / 윤동주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든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古風)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길 / 윤 동 주
잃어버렸읍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src=http://www.donga.com/photo/news/200801/200801040049.jpg>
바람이 불어 / 윤 동 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단 한 여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눈 오는 지도 (地圖)의 시평]
어떠한 고백체 예술이든지 그것은 끊임없는 고뇌와 자기 폭로의
열정이 동반될 때 가능하기 마련이다.
윤동주는 우리 시사(詩史)에서, 서정시가 고백체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임을 그 누구보다 진정성 있는 언어로 보여 준 시인이다.
물론 그런 그도 구체적 사랑의 흔적을 고백한 일은 좀처럼 없다.
오히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윤동주 시편에서도 ‘순이’라는 여인이
세 번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 (‘소년’)이라든가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사랑의 전당’) 등의 진술을 통해 그의 시편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 사랑의 전당에 들어왔던
그녀가 이제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시인을 떠나고 있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듯한 함박눈의 환각 속에서 그녀는 떠나고,
시인은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눈이 녹으면 그녀가 남긴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필 것이고,
시인은 그녀의 발자국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랑과 이별의 기억을 내내
간직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별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오랜 기억 속에 간직하려는 상상적 행위가 이 시의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싸늘하게 옥사한 후 나온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1948년)가 올해로 회갑을 맞았다.
하지만 연희전문 38학번 청년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사랑스런 추억’)라는
자신의 예언처럼 불멸의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사랑과 젊음의 마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는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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