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그린 자화상 / 장석남

2009.10.08 14:23

강학희 조회 수:541 추천:24



<작가가 그린 자화상>장석남의 ‘부끄러운 사람’



헤럴드경제 | 입력 2009.10.08 07:02

 
























열예닐곱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화상이라는 걸 그려 책상 모퉁이에 올려놓고 지냈다. 송진 냄새가 좋았다. 아마도 고흐를 흉내냈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귀를 깎아내고도 제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런저런 거 다 떠나서 얼마나 아팠을 것인데….


리얼리티를 따지지 않았던, 아니 손이 따를 수 없었던 기묘한 형상이 지금도 어렴풋하다. 개나 말을 그리기보다 귀신 도깨비를 그리는 것이 훨씬 쉽다는 고사(古事)가 한비자(韓非子)에는 전한다지만 그때 나는 내 데생 능력 밖에서 내 내면의 어떤 유령을 그리려 했었는지. 모가지가 길었고 눈이 쾡했던 당시의 모습에 더해서 밤새 담배를 물고 지금 기준으로 하면 명을 재촉하는 삶을 꿈꾸던, 제멋에 겨운 소년의 나름대로의 내면이었으리라.





어느 날인가, 두어 평의 내 방 냉골에서 나는 벌떡 일어나 먹을 타서 벽과 청장에 온통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사람의 긴 그림자들이었다. 수십 개의 그림자들을 마구 어지럽게 그려놓았는데 고분(古墳)의 벽화와도 같은 것이 되었다. 남주작(南朱雀)이니 북현무(北玄武)니 하는 것도 알 턱이 없던 어린 아이는 그런 광기 비슷한 것을 풀어내야만 했던 내면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우연히 내 방문을 열어보고 아연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 '현분벽화(現墳壁畵)'는 곧바로 처리되지 않고 꽤 오래 유지돼 친구 후배들에게도 발견되어 혀를 차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동업자로 살고 있는 형준이나 기인, 홍섭의 기억에서 그것이 어떠했던지 넌지시 물어보고 싶다.


이후에도 나는 노트의 여백마다 사람의 옆얼굴을 스케치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또한 내모습을 환기하며 나름 객관화시키려 한 낭만의 선(線)들이었다. 알고 보면 그 낭만이라는 괴물이야말로 우리를 펄펄 살게 하는 상상의 동물들인 셈이다. 고대인들에게 그것은 용이나 주작이나 해태와도 같은 저쪽 세계의 동물들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것은 객기였고 제대로 분출되지 않은 열정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나는 시의 형식으로도 그것을 만들고 있었다.


"무쇠 같은 꿈을 단념시킬 수는 없어서/구멍난 속옷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여행 가방처럼/종자로 쓸 녹두자루 하나밖에 아무것도 없는 뒤주처럼/ 그믐 달빛만 잠깐 가슴에 걸렸다 빠져 나가는 동그란 문고리처럼/나는 공허한 장식을 안팎으로 빛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 봉지같이/비닐 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알았어도/다시 외로운,/…만돌린처럼 외로운 삶/고드름처럼 외로운 삶"(졸시 '자화상' '젖은 눈' 중에서)





나는 떠도는 한 조각 비닐 조각 같다고 느꼈었다. 참을 수 없는 그 하찮음은 그러나 때로 소나무 가지에 걸려서 소나무를 웃긴다. "오후나 되어야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서편 산 아래 길가의 작은 소나무 한 그루는 참 익살스럽기도 하지. 가지 사이에 날려온 비닐을 달고는 비닐 속에다 대견한 듯 제 저녁의 모습 일부를 비춰보고 있으니. 발가락 열 개를 활짝 벌리고 발가락 사이에 바람을 쏘이는 표정으로"(졸시 '익살꾼 소나무')


인간은 스스로를 볼 수 없다. 그저 사물에 투영해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내가 바라보고 가끔 문장으로도 옮겨보는 모든 사물은 내 모습의 또 다른 형상이리라. 일체 만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새삼 씻긴 언어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때로 고드름이 나 같기도 한 것이다.


가끔 진품명품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는 조상의 것을 어찌 돈으로 환산하겠느냐고 가격 0원을 그려놓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인물들을 볼 때면 개운찮은 웃음이 비어져 나오곤 했는데 이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을 자화상이랍시고 만들어 내미는 스스로가 그런 씁쓸한 웃음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민망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비자의 그 에피소드 같은 것이다. 그리기 어려우니 편의(便宜)가 그렇게 한 것이다. 한마디 덧붙여 뻔한 해설이지만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그래도 나쁘지 않다. 스스로 염치없이 살지 말자는 의미로 읽힌다면 다행이겠다.


"손가락 사이로 몰래 엿보니 당신은 슬픈 표정이군요!"
가을볕이 얼굴에 따갑다.







▲작가 장석남은

....1965년 인천 출생,1986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맨발로 걷기'가 당선돼 등단. 2003년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젓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산문집 '물의 정거장' 등. 김수영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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