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동인상수상작 : 감자의 몸/길상호

2006.11.12 01:40

강학희 조회 수:545 추천:11

구멍에 들다/길상호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버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사라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감자의 몸

- 길 상 호 -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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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이수익

서로들 비슷한 연대에 등단했고 오래 동안 활동을 해온 친구 사이인데도 <현대시 동인상> 심사 때마다 작품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자리가 시끄럽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동인 누구에게도 일말의 사심이라곤 없고 오로지 좋은 후배에게 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뿐이니, 우리는 싸워도 끝까지 같은 동인일 뿐이다.
심사기 있기 바로 얼마 전에 나는, 내가 나가고 있는 모대학교 사회교육원 시창작반에서 길상호의 시 <구멍에 들다>를 수강생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소재에 대한 치밀한 접근과 정치한 표현력, 깊이 있는 사유의 힘이 시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길상호가 지닌 장점과 호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감각과 인식이 세련되어 있고 안정적이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안겨다주는 점이있다.
길상호와 함께 마지막 단계에서 논의되었던 박후기 역시 만만치 않은 표현력과 사유의 깊이를 지닌 시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심사 자료집에 실린 작품으로 한정해보자면 그 중 몇 편의 시는 다소 단순하거나 평면적이어서 오히려 실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그런 아쉬움마저 들었다.
이번 심사에서 아깝게도 밀려난 김행숙,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개성적인 표현세계를 높이 산다. 현실 속의 대상들에게 환상의 옷을 입히는 그의 시적 언술은 다각적이면서도 정교하고 또한 경쾌한다. 그의 탈락을 아쉽게 생각한다.
길상호 수상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의 앞날이 현대시 동인들의 기대를 뛰어넘기를 바란다.

<수상소감> - 길 상 호

머리를 식히러 혼자서 계곡에 갔습니다. 모처럼 시원하게 떨어지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다가 한참 일을 하고 있을 친구도 좀 상쾌해질까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내가 특별한 선물을 하려고 전화를 했지. 들어봐!>
<어딘데 이렇게 차가 많이 다녀? 시끄러워 죽겠네.........상호야! 전화 왜이래?>
물소리를 선물하려다 난감해진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앉아 내가 써왔던 시들을 생각했습니다. 맑은 물소리가 휴대폰 하나를 거쳐 시끄러운 소움이 된 것처럼 나의 시들도 내 머리를 거치면서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더러운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오래 도록 물살에 마음을 씻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 시인이란 이름이 주어졌던 날을 떠올려 봅니다. 마냥 기쁘고 마냥 우쭐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나니 서서히 저의 글들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서 풀어가려고 했던 글들, 머리로는 사람과 자연이 어울리는 글을 써야지 하면서 그것이 마음에까지 닿지 않아 마찰을 일으키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마음에 닿았다 하더라도 그 글들은 제대로 된 것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걸림돌 없이 깨끗한 마음이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끄러운 시를 쓰고 있는 저에게 이렇게 큰 상의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님들 가르침도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비우고 비워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시를 쓰라는.....지금의 시끄러운 시들이 언제쯤 제대로 된 소리로 바뀔지 모르겠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떠올리겠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누구보다도 감사를 드리고 부족하지만 제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켜봐 주시는 많은 분들, 시작의 시작을 열어준 청림문학동인회 , 그리고 많은 도움으로 함께 해 주신 선생님들과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수상 소식을 접하기 전날 큰형님의 삼우제를 마쳤습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것들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형님을 떠나보내야 했는데 다른 공간에서라도 흐뭇한 소식 들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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