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너는 아니 / 이해인

2008.07.06 09:54

강학희 조회 수:757 추천:18






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 앓이를 하고 싶다.




F. Warwick Topham(1838-1924): Young Girl on a Swing. Oil on canvas. 1891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 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Jean F. Chaigneau(1830-1906): Le Jardin de l’artiste. Oil on canvas





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 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William Mark Fisher(1841-1923): In the Garden. Oil on canvas. 1912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 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Daniel Ridgway Knight(1839-1924): A Pensive Moment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 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




Guillaume Seignac(1870-1924): Reflections. Oil on canvas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 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Leon Herbo(1850-1907) - La Charmeuse. Oil on canvas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꼽 동무를 불러내어

나란이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William A. Bouguereau(1825-1905): La Frileuse. Oil on canvas. 1879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




Leon Jean Basile Perrault: Nature's Mirror





봄이 오면 나는
풀향기 가득한 잔디 밭에서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Leon Jean Basile Perrault: The Apple Picker, 1879





함게 산 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 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 오던
소녀 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Arthur Drummond(1871-1951): Victorian Fantasy. Oil on canvas



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 우표를 사고
답장을 미루어 둔 친구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래 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Leon




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Daniel Ridgway Knight(1839-1924) - En Vendanges. Oil on canvas. 1905
Perrault Leon Jean Basile - Venus A La Colombe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읽다가 만 책,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봄을 맞고 싶다.




Tom Mostyn(1864-1930) -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 Oil on canvas.



사계절이 다 좋지만 봄에는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 무늬의 옆 치마를 입고 싶다.




Alexander M. Rossi(FL.1870-1903): Forbidden Books. Oil on canvas. 1897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가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Alexander M. Rossi(FL.1870-1903): May I Have This Dance?





먼지를 털어낸 나의 창가엔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 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 삽도 한 개

걸어 두었다가 꽃 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Louis Marie de Schryver(1862-1942): A Young Man's Fancy. Oil on canvas. 1898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 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해인 수녀




친구야 너는 아니 / 이해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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