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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나무처럼 · 윤대녕

2010.01.25 18:17

arcadia 조회 수:1646 추천:39




한 그루 나무처럼 · 윤대녕





































겨울나무







“새해에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살고 싶다.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이 변하더라도,

속마음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말이다.”
















한 그루 나무처럼…







한산 근처로
이사 와서 주말마다 산행을 한 지 일 년반쯤 되었다.
동행할 사람을 찾기 힘들어 대개는 혼자 산에 오른다. 처음엔
적적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럭저럭 습관이 되니 오히려 생각할
시간도 많아지고 몸과 마음이 더욱 맑아지는 느낌이다.
말을 주고
받을 상대가 없으므로 무엇보다 사물의 미세한 변화가 눈에 잘 들어온다.
계곡 물가나 약수터에 앉아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충만하게 다가온다.





지금 사는 정릉에서 일선사(一禪寺)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약수터가 두 개 있다.
일선사는 시인 고은 선생이 잠시 머문 곳으로 경내에 서면 성북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난봄부터 이쪽 코스로 다녔는데 늘 두 번째 약수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내쳐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약수터 옆에 서 있는 참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디 묘한 것이어서 하필이면 나무에 박힌
녹슨 대못이 먼저 보였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바가지를 걸기 위해
박아 놓은 것 같았다.
손으로는 빼낼 재간이 없어 그대로 내려왔는데 두고두고 그 대못이 가슴에 남았다.





그 다음 주말 나는 배낭에 자귀를 챙겨 넣고 약수터로 올라갔다.

녹슨 못을 빼내니 마음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 나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바야흐로 4월이 되면서 참나무는 연둣빛의 아름다운 잎을 가지마다
무성하게 토해 냈다.
그 뒤로 참나무를 보기 위해, 아니 보고 싶어 산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마음이 심산(心散)할 때, 남에게 무심코 아픈 말을 내 뱉고
후회할 때,
이유없는 공허함에 사로 잡힐 때면 나는 그 나무를 보러 올라 갔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내게 시원한 그늘을 내주며 때로 미소 짓거나 무어라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네가 그 못을 빼 주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옆구리가 아팠을 거야.”
혹은 위로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힘든 때일수록 한결같은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 봐.”





나는 그 나무 아래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사과나 김밥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 한철 주말마다 새로 사귄 친구를 만나러 가듯 설래는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우리의 옛 신화를 보면 ‘우주나무’라는 게 있다.

지상과 천상을 이어 주는 나무로 아직도 시골에 가면
커다란
느티나무에 오색 천이 감긴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네 민간 신앙으로 우주나무는 사람의 염원을 하늘에 전달해 주는 역활을 한다.
이를테면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참나무를 우주나무로 삼은 셈이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지방에 사는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곧장 내려가 볼 수 없던 나는 마음을 달래려 저녁 무렵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참나무를 올려다보며 어머니의 건강을
빌었다.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이제 나는 믿는다.
또한 간절하게 원하면 누군가 도와준다는 말도 믿게 되었다.
내가
지방에 다녀오고 얼마 뒤 어머니는 가까스로 건강을 되찾으셨다.





지난 주말에도 산에 다녀왔다. 눈이 내린 날이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약수터 참나무는 제 스스로 모든 잎을 떨군 채
찬바람 속에 무연히 서 있었다.
그리고 침묵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가 못을 빼낸 자리를 찾아보았다. 상처는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헐벗은 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사소한 일에도 얼마나
자주 마음이 흔들렸던가.
또 어쩌다 상처를 받으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원망하며 보냈던가. 그리고
나는 과연 길을 잃은 사람이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적이 있던가.
그렇게 말없이 기다림을 실천한 적이 있던가.





새해에는 한 그루 나무처럼 살고 싶다.

자기 자리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세월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가끔은 누군가 찾아와 기대고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이 변하드라라도 속마음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그루 나무처럼 말이다.








소설가· 윤대녕· 좋은생각 2010년 1월호















“안개속을 방황하니 야릇한 마음 깊어간다

수풀도 돌도 모두 고적하고

한그루 나무도 다른 나무를 분간 못하여

모두가 하나같이 외롭기만 하다...”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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