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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흙이 드러난 산자락이나 물가 모래밭을 지나다 보면 깔때기처럼 움푹 파인 곳이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만든 걸 알 수 있을 만큼 깔끔합니다. 누가 한 짓일까요?
명주잠자리라는 곤충의 애벌레가 먹이를 잡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함정이자 집입니다.
명주잠자리 애벌레는 깔때기 모양의 함정 아래쪽에 숨어 지내며 먹이가 빠져들기를 기다립니다.
이곳에 단골로 걸려드는 먹이는 개미입니다. 함정에 빠진 개미가 발버둥
칠수 록 고운 흙이 무너져 늪처럼 더 깊이 빠져듭니다.
그러면 명주잠자리 애벌레는 날카로운 턱으로 개미를 물고 체액을 빨아 먹습니다.
한번 함정에 빠진 개미는 살아 나올 수 없어서 이 함정을 ‘개미지옥’,
명주잠자리 애벌레를 ‘개미귀신’ 이라고 부릅니다.
함정을 만드는 것이 지혜로워 보이지만 나에게는 녀석이 미련해 보입니다.
똑똑하기로 치면 한 수 위인 개미가 명주잠자리 애벌레의 함정에 빠질 확률은 낮습니다.
가끔 방심한 개미들이 걸려드는 정도지요. 그래서 함정 속에 숨어
먹이를 기다리는 명주잠자리 애벌레들은 굶어 죽는 일이 많습니다.
흔히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을 사냥꾼, 먹이를 기다리는 동물을 낚시꾼이라고 합니다.
사냥은 꽤 호전적이고 적극적이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 체력만 낭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낚시를 드리우듯 함정을 만들고 먹이를 기다리면 체력 소모는 적지만 자칫 굶어 죽을 수 있습니다.
사냥에 허탕 치고 기운이 쪽 빠지든, 먹이가 걸려들지 않아 배를 곯든 모두 생존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개미지옥을 헤쳐 명주잠자리 애벌레를 꺼내 보면 생김새나 행동이 재미있습니다.
다른 곤충과 달리 발톱이 앞을 향해 나 있고, 관절이 뒤쪽으로 꺾입니다. 나아가기보다 물러서기 위한 다리지요.
땅 위에 내려놓으면 뒷걸음질을 치며 흙 속으로 숨습니다. 뒷걸음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참 안타깝습니다.
사냥에 실패할 것이 두려워 기다리기만 한다면 삶의 주도권은 상대에게 있습니다.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태도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생물의 진화는 발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습관은 더욱 소극적으로 진화합니다. 명주잠자리 애벌레의 나아가지 못하는 발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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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권 |
월간 <자연과생태> 편집장,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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