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바람은
살랑이고 햇살은 고즈넉한 주말 저녁에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름를 가진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을 보고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한인 어린이들의 합창단이다.
곱디
고운 목소리,
맑고
환한 얼굴로 노래하는 아이들의 공연은 자리를 가득
메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같이 노래하게 할
만큼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아이들의
타고난 천진스러움이 청중들로 가득찬
공간을 매우고 가슴까지 채워서 삶에 이리저리
부대낀 어른들의 굳은 감성을 녹혀주는가 싶었다.
향긋하게
감싸도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
감동을 고스란히 가지고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아들과 마주앉았는데 불현듯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어린이 합창단에 가입시키려
오디션을 봤던 기억이었다.
한
20년
전 아들도 그런 노래를 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토막토막 떠올랐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
어떻게 되었니...??
이것
저것 생각들의 연결이 자꾸 어긋나기에 그 날들의 일을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아들은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단호히
말을 잘랐다.
아니야,
잘
기억해봐...
그
때 부른 노래가 산이라는 노래 아니었니...
네
목소리가 우렁찼는데...
점점
둥그레지던 아들의 눈이 차츰 근심이 서려지는 얄궂은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내 머리 속의 생각들이
갑자기 엉키어들면서 그림들이 서로 엇갈려 날라다니기
시작했다.
아뿔싸~~
필름이
리와인드 되면서 뭔가 다른 그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20년이라는
공간을 건너뛴 옛기억들이 헛갈려들고 있었다.
아들이
아니라 막내 남동생을 오디션 뵈려 언니와 같이 했던
그날의 일들이 하나하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거리며 올랐던 남산 KBS
가는
길.
그리고
마지막 순서였던 동생의 오디션.
동생의
힘찬 목소리의 산이라는 제목의 노래...
남동생과
아들,
그
둘의 나이 차가 거의 20년이나마
되거늘 그마만큼의 시공간을 넘어선 둘의 기억이 이렇게
헛갈려들다니 갑자기 하늘 빛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얼마 전, 친구의 집에서의 일이다.
잘 정돈 된 부엌 쪽 높은 선반 위에서 탐스럽게 자란 화분 두개가 양옆으로 싱싱한 잎을 드리우며 푸른 기운을 온 집안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화분을 잘 키우는구나, 참 보기 좋아, 기분이 산뜻해지는게 이것보다 더 나은 인테리어가 없다며 한참을 칭찬 겸 소감을 늘어놓았다. 그 때 어이없이 큰 소리로 터질듯 친구가 웃었다. 그거 네가 우리 이사할 때 사다준 것 아니니! 두개 가져다주면서 양쪽으로 올려놓고 정답게 잘 키워보라더니...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내 머리 속에는 그 기억이 전혀 없었다.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지고 화분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어떤 그림도 어떤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과 1,2년이 지난 일일 뿐인데 말이다.
아직도 나는 기억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잊혀지지 않아서 그 기억들이 한번씩 마음을 휘젖어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아서는 바람에 잊고자 기를 쓰고 있다고 여겨왔었다. 내 안에 더께로 차곡히 앉은 지난 날들의 아픈 기억을 다 비워버리고 구름처럼 가볍게 흐르듯 앞으로 나아가기를 갈망하던 나였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이것들이 내가 그려놓은 궤도대로 제대로 돌지 못하고 서로 엇갈린 길을 찾아든 것인지 잊고 싶은 기억은 늘 내 곁을 빙빙 돌며 떠나지 않는데 기억하고 싶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은 금새 잊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다정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지워지고 그들과 웃으며 떠들고 놀던 골목길이 정감은 헐리고 뜯겨진 폐허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과 그 세월은 가슴을 뚫고 휘돌아나가는 한 줄기 바람되어 내게서 멀어지고 만다. 작지만 귀했던 옛 추억의 편린들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바라만 보아야 하는 안타까움 뿐 아니라 그리 오래지 않은 날들의 따뜻했던 사연들도 기억에서 앗아가고 있다.
옛날 앨범을 들추어보면서 그 날로 돌아가 가물거리는 이야기를 기어이 되살려내려는 시도를 해 보지만 그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무지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과 장소는 물론이고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미소를 날리던 화사한 순간은 그저 그림이고 기록일 뿐 그날의 감동을 기억하지 못한다. 까맣게 잊혀져 뇌리에서 사라졌던 것들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가슴은 서늘해지면서 막막해진다.
기억하는 것들과 잊혀지는 것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수많은 조각의 퍼즐을 맞추듯 정성과 시간을 들여 그림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신묘한 명약이 있어 기억을 되살리거나 오래토록 간직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머리 속의 기억이 조금씩 비워져 기억할 수 있는 지난 일들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방도를 나는 찾지 못한다. 하루에도 수차례 깜빡거리며 머리 속에서 민첩하게 튀어나오지 않는 생각이나 기억으로 저지르는 실수들과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속수무책의 건망증까지 곁들인 나이이고 보면 부질없는 희망으로 마음만 내려앉게 될 것이다. 나이가 느는 만큼 잊히는 것들이 늘어나는 건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아파할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할 뿐이다.
유리처럼 투명한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시간, 그 아이들만큼 어렸던 나의 시절과 지난 날들을 떠올리던 자리에서 엉클어진 나의 기억으로 인해 터무니 없음과 서글픈 마음 자락이 이리저리 빙빙 원을 그리듯 내 주위를 맴돌고 다닌다.
머리 속 쫌쫌한 주름 속 깊이, 너무 깊어서 배어나오지 못하는 기억들... 무엇으로 그 깊은 속을 파내어 그날의 일들을 살아나게 할까.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안의 아름다운 노래 가락처럼 순간순간 흘러들게 하여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을 항상 내 곁에 머물게 할 수는 없을까.
서글픈 바램은 외줄기 외침이 되어 멀리 산너머 메아리로 흩어지고 흩어진 외침은 한 조각의 기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원하며 한 조각의 기억을 위해 오늘도 나는 지난 날의 이야기를 찾아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