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황송문 시인
2006.03.01 06:43
<나와 황송문 시인>
시골 아저씨 같고 막걸리 같이 텁텁한 황송문 교수
김학(수필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 이사장)
황송문 시인에게는 부를 호칭이 많아서 좋다. 시인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교수, 문학박사,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사계 발행인……. 그러니 황송문 시인이 선문대학교 인문대 국문과에서 교수로서 정년퇴직을 한다해도 호칭이 없어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년퇴직을 하면 명예교수라는 호칭이 또 부여될 테니 자유로운 사회생활을 통해 더 많은 호칭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황송문 시인은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獒樹)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나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며 경쟁하는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 둥지를 틀고 그곳에서 밀려나지 않고 이름을 날리며 사는 걸 보면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촌사람이 크게 출세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렇게 버티기까지 혼자서는 시시때때로 속울음을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참 잘 버텨왔다는 느낌이다.
나와 황송문 시인과는 오랜 인연이다. 10대 초반에 만났으니 벌써 반 백년이 더 지났다. 황 시인은 나보다 중학교 1년 선배다. 그런데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대학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할 때부터였다. 어디서 만나면 얼굴은 본 듯 싶은데 그 황 시인이 선배인지 후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자리에서 졸업횟수를 따져보니 나보다 1년 선배였다.
황 시인은 그의 모교인 전주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에 시간강사로서 강의를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전주에서 여관에 묵었는데 가끔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황 시인은 서울에서 폭넓은 문단생활로 지인이 많았기에 내 원고를 문예지나 사보에 발표해주고 그 작품이 게재된 문예지나 원고료를 가지고 와서 내게 건네주곤 했었다.
또 1999년에는 자유문고 이준영 사장을 소개해주어서 내가 여섯 번째 수필집 <오수 땅, 오수 사람들>을 출간하기도 했었다.
황 시인은 정이 많은 분이다. 그렇다고 생색을 내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소리 소문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몇 년 전부터는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사계를 발행하면서 작품 청탁서를 자주 보내주곤 한다. 전국에 내로라 하는 문인이 많고 인심 쓸 문인들도 많을 텐데 후배라고 나를 잘 챙겨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전주에 온 황 시인이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때 마침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내 큰아들 정수가 집에 다니러 왔기에 아파트 근처 포장마차에서 우리 부자가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황 시인이 택시를 타고 달려와서 셋이 합석을 하게 되었다. 소주를 마시다 나에게 건네주려고 가지고 온 문예지가 있어서 즉흥 시 낭송대회를 갖게 되었다. 황 시인과 나, 내 아들 정수, 그리고 포장마차 여주인도 시를 한 편씩 읽었다. 그런 뒤 우리 자리 옆에서 젊은 부부가 술을 마시고 있기에 부탁을 했더니 서슴없이 문예지를 받아들고 시를 읽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문학소년 문학소녀였던 것이다. 포장마차 시 낭송대회는 즉흥적이었지만 즐거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그때 황 시인은 우리 부자가 오순도순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게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황 시인도 호주에 유학 간 아들이 돌아오면 우리 부자처럼 술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과연 그 뒤 황 시인도 우리처럼 부자유친의 술자리를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내 아이들 2남1녀가 서울의 봉천동 아파트에서 자취를 할 때 아이들 집에 들렀다가 사당동에 살던 황 시인과 황 시인의 단골집이던 사당동 어느 순대집에서 만나 코가 비뚤어지게 소주를 마신 적도 있었다. 이 모두가 지나고 나니 아름다운 추억들이 되고 있다.
인생은 추억 만들기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느냐에 따라 노후에 풀어볼 보따리가 크거나 작을 것이다. 그러기에 젊어서는 꿈을 키우고 늙어서는 추억을 풀어보며 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황 시인은 대단한 분이다. 고려시대부터 의견(義犬)의 전설이 전해오고, 해마다 의견제(義犬際)를 지내는 전라도 오수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사람이다. 그런 황 시인이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세 나라를 넘나들며 문학의 길, 학문의 길을 걷는 걸 보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황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하고 선문대학에서 교수가 되더니 중국에 건너가서는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연변대학까지 진출하여 강의를 하고,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를 하는 걸 보면 황 시인이야말로 바로 세계인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황송문 시인은 교수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가 저술한 책이 대학교재와 시집, 소설집, 수필집, 문학평론집 등을 포함해서 40여 권이 넘는다. 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독자를 사랑하는 문인으로서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게 인생을 살아왔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문학의 경우도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한 가지에만 매달린 게 아니라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셈이니 놀라운 저력이 아닐 수 없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하루가 24시간이다. 그러니 황송문 시인,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창작과 학문연구를 했으리란 짐작이 간다. 이런 자랑스런 선배가 곁에 있기에 나는 덩달아 행복할 수 있다. 비록 교수로서 일선에서 물러나더라도 더 넓고 더 큰 세상에서 더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황송문 시인의 영예로운 정년퇴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만수무강을 빈다.
시골 아저씨 같고 막걸리 같이 텁텁한 황송문 교수
김학(수필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 이사장)
황송문 시인에게는 부를 호칭이 많아서 좋다. 시인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교수, 문학박사,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사계 발행인……. 그러니 황송문 시인이 선문대학교 인문대 국문과에서 교수로서 정년퇴직을 한다해도 호칭이 없어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년퇴직을 하면 명예교수라는 호칭이 또 부여될 테니 자유로운 사회생활을 통해 더 많은 호칭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황송문 시인은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獒樹)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나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며 경쟁하는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 둥지를 틀고 그곳에서 밀려나지 않고 이름을 날리며 사는 걸 보면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촌사람이 크게 출세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렇게 버티기까지 혼자서는 시시때때로 속울음을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참 잘 버텨왔다는 느낌이다.
나와 황송문 시인과는 오랜 인연이다. 10대 초반에 만났으니 벌써 반 백년이 더 지났다. 황 시인은 나보다 중학교 1년 선배다. 그런데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대학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할 때부터였다. 어디서 만나면 얼굴은 본 듯 싶은데 그 황 시인이 선배인지 후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자리에서 졸업횟수를 따져보니 나보다 1년 선배였다.
황 시인은 그의 모교인 전주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에 시간강사로서 강의를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전주에서 여관에 묵었는데 가끔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황 시인은 서울에서 폭넓은 문단생활로 지인이 많았기에 내 원고를 문예지나 사보에 발표해주고 그 작품이 게재된 문예지나 원고료를 가지고 와서 내게 건네주곤 했었다.
또 1999년에는 자유문고 이준영 사장을 소개해주어서 내가 여섯 번째 수필집 <오수 땅, 오수 사람들>을 출간하기도 했었다.
황 시인은 정이 많은 분이다. 그렇다고 생색을 내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소리 소문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몇 년 전부터는 계간 종합문예지 문학사계를 발행하면서 작품 청탁서를 자주 보내주곤 한다. 전국에 내로라 하는 문인이 많고 인심 쓸 문인들도 많을 텐데 후배라고 나를 잘 챙겨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전주에 온 황 시인이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때 마침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내 큰아들 정수가 집에 다니러 왔기에 아파트 근처 포장마차에서 우리 부자가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황 시인이 택시를 타고 달려와서 셋이 합석을 하게 되었다. 소주를 마시다 나에게 건네주려고 가지고 온 문예지가 있어서 즉흥 시 낭송대회를 갖게 되었다. 황 시인과 나, 내 아들 정수, 그리고 포장마차 여주인도 시를 한 편씩 읽었다. 그런 뒤 우리 자리 옆에서 젊은 부부가 술을 마시고 있기에 부탁을 했더니 서슴없이 문예지를 받아들고 시를 읽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문학소년 문학소녀였던 것이다. 포장마차 시 낭송대회는 즉흥적이었지만 즐거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그때 황 시인은 우리 부자가 오순도순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게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황 시인도 호주에 유학 간 아들이 돌아오면 우리 부자처럼 술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과연 그 뒤 황 시인도 우리처럼 부자유친의 술자리를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내 아이들 2남1녀가 서울의 봉천동 아파트에서 자취를 할 때 아이들 집에 들렀다가 사당동에 살던 황 시인과 황 시인의 단골집이던 사당동 어느 순대집에서 만나 코가 비뚤어지게 소주를 마신 적도 있었다. 이 모두가 지나고 나니 아름다운 추억들이 되고 있다.
인생은 추억 만들기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느냐에 따라 노후에 풀어볼 보따리가 크거나 작을 것이다. 그러기에 젊어서는 꿈을 키우고 늙어서는 추억을 풀어보며 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황 시인은 대단한 분이다. 고려시대부터 의견(義犬)의 전설이 전해오고, 해마다 의견제(義犬際)를 지내는 전라도 오수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사람이다. 그런 황 시인이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세 나라를 넘나들며 문학의 길, 학문의 길을 걷는 걸 보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황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하고 선문대학에서 교수가 되더니 중국에 건너가서는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연변대학까지 진출하여 강의를 하고,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를 하는 걸 보면 황 시인이야말로 바로 세계인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황송문 시인은 교수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가 저술한 책이 대학교재와 시집, 소설집, 수필집, 문학평론집 등을 포함해서 40여 권이 넘는다. 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독자를 사랑하는 문인으로서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게 인생을 살아왔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문학의 경우도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한 가지에만 매달린 게 아니라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셈이니 놀라운 저력이 아닐 수 없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하루가 24시간이다. 그러니 황송문 시인,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창작과 학문연구를 했으리란 짐작이 간다. 이런 자랑스런 선배가 곁에 있기에 나는 덩달아 행복할 수 있다. 비록 교수로서 일선에서 물러나더라도 더 넓고 더 큰 세상에서 더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황송문 시인의 영예로운 정년퇴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만수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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