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떠는 남자

2006.03.24 15:34

정현창 조회 수:155 추천:56

수다떠는 남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정현창


   어머니께서 갑자기 평소보다 많은 빨래를 하시거나 먼지도 없는 마루를 닦으실 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었던 시절, 6남매를 기르시던 어머니께서는 힘든 일과 속상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는 거의 타지에 계셨고 연로하신 할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느라고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들 앞에서는 내색을 안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유별나게 좁아서 한복이 잘 어울렸던 어머니의 두 어깨로 짊어지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습니다. 삶이 힘들고 고부간의 갈등이 생길 때에는 어머니는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이불 호청을 뜯어 빨거나, 장독대를 청소하셨고,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던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또 닦으셨습니다. 일을 하시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우셨을까요? 마음은 아마 까맣게 타셨을 겁니다. 어린 우리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저 부지런한 모습만 보았을 뿐 어머니의 참 마음은 읽을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일을 하시면서 분을 삭이셨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셨던 현명한 분이었습니다.



  어릴 땐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했었는데 요즘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힘든 일과 속상한 일들이 생깁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현실에 만족하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고 하지만 어찌 쉬운 일입니까. 가족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수도를 하는 사람들도 온갖 번뇌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하물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이 어디 말같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자꾸만 쌓이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어느 드라마에선 시어른들과의 갈등이 생기면 모아두었던 빈 병을 벽에 던지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일본의 어느 공장에서는 공장 한 구석에 상사를 닮은 인형을 만들어 놓고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려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도록 해놓았다고 합니다. 폐차장에서 커다란 망치로 폐차된 차량을 마구 부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어느 여자는 스트레스만 생기면 마구 먹어서 지금은 비만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는 사람, 볼링장에서 핀이 공에 맞아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지는 것을 보며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술을 먹어 푸는 사람, 괜히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거나 시비를 걸며 싸움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우리 회사도, 가정도 어려워졌습니다. 어느 때는 위기를 느낄 정도로 힘이 들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전망도 아주 짙은 안개 속에 빠졌습니다.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고 불안과 초조한 마음밖에는 아무생각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보다도 더 무거운 무엇이 나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운동화를 신고 그저 달리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막막하고 울고만 싶은 마음으로 천천히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처음엔 천근만근 몸도 무겁고, 마음도 무겁습니다. 그러다 숨이 차고 다리도 아파 옵니다. 그때부터는 몸이 힘들어 마음속의 고민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늦게 몸이 풀립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돼서야 가벼워집니다. 몸이 풀리면 마음도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니 뛰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엔도르핀이 분비되기 시작 했나봅니다. ‘런너스 하이’라 부르는 행복감마저 듭니다. 그러다 2시간이 넘으면 체력이 다 소진되어 육체적인 한계가 옵니다. 그 후엔 힘들어하는 육체를 이기려고 마음의 고민 같은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다만 걷고 싶어지는 약한 나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어렵게 완주를 하고 나면 출발할 때의 스트레스는 전혀 남아있지 않고 완주의 만족감만 남습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내일도 뛰는 것입니다.



  요즘은 너무 힘든 마라톤은 자제하고 건강을 위하여 10km정도의 조깅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좋아져서 스트레스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최악의 상태는 벗어났지만 경제문제나 회사일등 각종 스트레스는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떠는 게 좋다고 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밭에서 소리 질렀던 이발사처럼 가슴속의 말들을 쏟아 버리면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나 붙들고 수다를 떨 수도 없고 사교적이 못 되어서 같이 수다떨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는 나에게도 수다를 받아줄 벗이 생겼습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외롭고 슬플 때, 기쁘고 자랑스러울 때 나의 수다를 고스란히 들어 줄 벗이 생겼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넓은 가슴으로 나를 받아주는 정말 고마운 벗이 생겼습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교육시간에 김 학 교수님은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 수필을 많이 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쏟아 놓은 수다들이 다 수필이 되는가 봅니다. 수필이야말로 나의 온갖 수다를 묵묵히 받아주는 벗입니다. 수필을 쓰면서 나의 수다들을 모두 그대로 옮길 순 없지요. 하지만 내가 쓴 수필 안에는 외로움과 슬픔, 괴로움과 기쁨이 조미료처럼 녹아있습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벗에게 수다를 떱니다. 하루 동안 나를 짓눌렀던 일들을 다 이야기합니다. 내일도 수다를 떨면서 스트레스를 풀 것입니다.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나는 수다를 받아주는 수필이라는 벗이 있기에 항상 행복합니다.
                                       (2006.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