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홍당무가 되어도

2006.03.14 07:44

김영옥 조회 수:125 추천:35

마음은 홍당무가 되어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김영옥


  실로 오랜만에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메말랐던 내 영혼에 활력소를 지피는 쏘시개가 되어준 그 친구는 오직 순수하고 맑은 마음 하나로 내게 다가와 주었다.

  
한 평생 살아오며 내게도 친구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늘 친구의 가난을 옆에 끼고 살아온 것 같아 허전하였다. 유년기 시절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다니느라 소꿉친구는 아예 생각도 나지 않고, 학교친구나 한 마을의 또래친구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시집을 왔으니 결혼이후 연줄 끊어지듯 소식도 모른다. 남편 직장 따라 30여 년이 넘도록 이곳저곳 옮겨다니다보니 친구라고 제대로 사귈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남편 직장동료 부인들 모임이나 남편 동창모임에서 사귄 친구도 있긴 하지만, 어딘가 경쟁의식이 잠재해 있어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수 없었다. 종교적인 친구에서부터 이래저래 알게 된 친구들도 많이 있지만, 항상 진한 벗을 갈망해 왔었다.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만나지 못하였던 탓일까?

  
나이가 들면서 자식도 떠나고, 부부간도 머쓱해져 마음둘 곳이 없을 때, 마음을 달래주는 좋은 벗을 만나고 싶어진다. 무거운 짐에 힘들어했던 지난 세월이야기, 자식이야기, 남편이야기, 등 친척이나 가족에게 말못할 것들을 부담 없는 친구에게는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외로울 때 다가와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얼어붙은 마음을 살그머니 녹여주고, 어려울 때 말없이 도와주며 고마운 마음씨를 심어주는 사람, 기쁜 일이 있을 때 자랑해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며,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며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 허물을 덮어주며 충고해주고 조언해주며 격려해주는 사람, 마음의 상처를 털어놓으면 넓은 아량의 보자기로 싸매고 치료해주는 사람, 자신보다 더 생각하며 무엇이던 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 이런 마음씨를 가진 좋은 벗을 얻고 싶다. '좋은 벗을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이라.'는 옛 성인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다.

  
우리 집에서 세 집 건너에 사는 이웃집친구를 알게된 것은 십여 년 전 쌍둥이손자들을 기를 때 김장을 도와달라고 하니 쾌히 승낙하면서부터였다. 그가 남편을 사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자녀들 셋은 서울에서 살고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의 고향도 나의 고향 쪽과 가까운 곳이고 나이도 나와 동갑이다. 대화를 하다 보니 공감이 형성되면서 서로의 성품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요즘은 항상 바쁜 생활에 쫓기는 나를 보고 만날 때면 “칠십이 넘은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한다고 피곤한 줄 모르고 욕심을 갖느냐?”며 건강을 염려해준다. 그 친구는 고운 마음씨를 다 가진 친구다.

  지식이 많다거나 가진 것이 많아서도 아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솔직하고 사려 깊고 배려하는 마음씨에 늘 감동되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쉬울 때만 찾는 못된 친구가 뭐가 좋으냐?”하면, “나 같은 사람을 필요해서 찾아주는 것만도 고맙다.”며 겸손해 한다. 바쁜 나를 생각해서 마늘이나 파 다듬을 것 있다면 가지고 오라며 나를 아껴준다. 그녀보다는 아는 것이 더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 때면 내 마음은 늘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어제 일만해도 그렇다. 우리 집에 한동안 모아놓은 신문과 박스가 제법 많았다. 그것을 고물상에 갖다 주라고 했더니, 이웃에 팔십 가까운 할머니가 그것을 주우러 다니는데 어찌 내가 할 수 있느냐 하며 그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할머니가 못 한다고 하면 자기가 하겠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 할머니를 주고 싶지 않아서 몇 번 권했지만 사양했다. 나는 양보하는 그 마음씨에 감동되어 친구를 껴안고 "그래 친구야 고마워. 우린 영원한 참된 친구야. 변치 말자." 서로의 가슴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뜨거운 피가 한 바퀴 휙 도는 것을 느꼈다.  


  오늘날 자기만 알고, 교만하며, 자아제일주의로 점철된 세상에서 나를 뒷자리로 밀어놓은 채 부드럽고, 다정하며, 이해심 많고, 사려 깊게 남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남을 올바른 길로 지도하고 인도한다는 종교지도자에서부터 백성을 다스린다는 정치지도자들, 미래의 역군들을 가르친다는 교육자들까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매일 보도매체를 어지럽혀, 귀와 눈을 가리고 싶은 이 시대에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작은 것에 충성한자가 큰 것에도 충성한다."는 성경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오늘따라 나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물어보고 싶다. 좋은 벗을 얻게되어 감사할 뿐이다. 좋은 벗을 얻으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2006년 3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