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이별

2006.03.26 14:09

김병규 조회 수:131 추천:46

조용한 이별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김병규


큰형님은 언제나 검소하고 청빈하게 생활을 하셨다. 형님은 평생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살아오신 작은 거인이셨다. 때로는 목숨을 건 충성심으로 당신의 소임을 감당하며, 매사에 책임질 줄 아는 분이셨다. 허세를 외면하고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며 자기 분수를 지킨 분이셨다. 남에게 공을 돌리고 자신이 책임 짓는 강직한 분이셨다. 면서기로 출발해서 면장에 이르기까지 한 고장에서 30년 공직생활을 하신 분이니, 늘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6.25전쟁의 혼란기와, 4.19, 5.16, 5.18의 암울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허점 없이 외길인생을 걸어오셨다.

형님은 임종에 임박해서까지 자신의 청빈한 정신과 검소한 생활을 주장하셨다.     "내가 죽거든 주변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히 화장하여 부모님 산소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러라!"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이는 이 시대를 간파한 형님다운 선도적 유언이라 할 수 있으나, 유족들에게는 잔인하게 들렸다. 30년 공직생활에 친구도 많고 내 고향 부안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분이었는데도, 세상을 하직하면서까지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다.

내 동기간이 7남매이고, 큰형님 슬하에도 7남매가 있다. 지금은 저마다 생활터전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니 의견이 분분했다. 동기간이 건재하고 자식들이 7남매나 있으며, 면장으로 공적도 남긴 분을 흔적도 없이 보내드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 있었다. 나 역시 고인의 유언을 수용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고인의 유언을 따르자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온 가족이 고인의 유언을 따르자고 결론을 내렸다.

전주의 '승화원'은 처음 찾는 곳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저승사자처럼 우락부락하고,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섰으나 그 선입견과는 달리 모두가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떨리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상한 것은 '승화원'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나 슬픔이 사라졌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여러 팀이 들어왔는데도 울음소리나 슬픈 내색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마도 마지막 천국에 가는 길을 조용하고 엄숙하게 전송하라는 신의 계시인 듯싶었다.

'승화원' 화장장(火葬場)에는 시신이 들어갈 화구가 제1실에서 제5실까지 5곳이 있었다. 형님의 시신은 제1실로 배당되었다. 아침 9시 도착 즉시 쉴 시간도 없이 형님의 시신은 관에 담긴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시간은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시신이 계속 들어와 화장실은 쉴 틈이 없었다. 들어오는 시신마다 각기 사정이 달랐다. 어린 사람. 젊은 사람. 나이든 사람, 큰형님 같이 80수를 누리다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 등 다양했다. 천수를 누린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더 많았다. 교통사고 등 사고로 비명에 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고사의 비중이 높은 것 같아 안전에 철저해야 하리라 느꼈다.

형님의 시신이 연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동안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1시간 40분이 빠르게도 흘렀다. 수의를 입고 관속에 누워 계셨건만 수의나 관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형님의 시신만이 하얀 재가되어 돌아왔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던 나의 큰형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로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허공을 향하여
훨훨 날아가셨네
나는 시린 가슴으로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이별이 서러워  
허탈한 허공만 한없이 바라보았네.
               (2006.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