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룻날의 소회

2006.04.25 21:03

이은재 조회 수:58 추천:8

어느 하룻날의 소회
                                                                                             이은재(행촌수필문학회)



나만 힘들고 어려운 것 같아도 돌아보면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도 많다. 내 시야엔 잘난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걸인연천(乞人憐天)’이란 말이 생각나곤 한다. 거지가 하늘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격에 맞지 않는 걱정을 이르는 말이다. 어쩌면 저들보다 내 처지가 더 불쌍할지도 모르니까.

이미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재산가치가 없음에도 세입자들을 끌어들여 돈을 유용하다가 나몰라라 방관하는 집주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친척언니도 전세금 4.000만 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배움 없이 기술 하나 익힌 것이 이발기술이었다. 남편과 결별하고 3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양육하려고 이발사 일을 해 왔다. 뭇 남성들의 머리를 깎고 손이 부르트도록 머리를 감겨주며 궂은 일을 했다. 그렇게 근근이 모아 만든 전세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확정일자만 해 놓고 전세 사는 곳으로 주소를 옮겨 놓지 않았던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때 나를 믿고 찾아와 하소연하였지만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아팠는지 모른다.

그 일이 있은 뒤 확정일자를 받으러 온 민원인에게 전세 사는 곳으로 주소를 옮겨 놓았는지 물어보았다. 어쩌면 공무원인 우리가 영세 임차인들을 위해 그런 것 하나쯤은 물어보아야 할 의무가 있는게 아닐까. 생활에 필요한 법 정도는 현대인에게 지식이 아니라 상식인지도 모르겠지만, 법 없이도 순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갖 법률은 그저 무의미한 선언일 뿐이다.

얼마 전, 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 경매계 앞에서 슬프게 울고 있는 한 촌부를 보았다. 전세금 4,500만 원을 한 푼도 못 받고 울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도 남편이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근근이 모아 마련한 전세금이었다고 했다. 전세금이 4,500만 원이라 주택임대차보호법에서 정하는 소액임차인보호 금액인 3,000만 원을 넘어 그 보호에서도 제외되었다. 배당하는 날 돈 한 푼 못 받고 황사바람 부는 계단에 엎드려 하루 종일 울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아팠다. 주머니를 털어서 다만 얼마라도 보태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날 봄볕이 따뜻하게 내려쪼였지만 그 촌부의 가슴엔 비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소리 없이 울며 들썩거리는 아낙의 등을 봄바람은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었지만, 나는 그 어떠한 위로도 해 주지 못했다.

불쌍한 민원인도 많다. 한 순간의 실수로 저지른 범행이나,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고 하소연하러 온 민원인도 많다. 답답한 그들은 법원에 와서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때로는 말 같지도 않은 궤변으로, 때로는 상스런 욕설과 고함으로 화풀이를 해 보지만 우리는 그걸 받아주기에 인색하지 않았을까. 공무원이기 이전에 우리도 동등한 인격체이며 부당한 횡포를 감내할 이유가 없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픔을 안고 달려온 민원인들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들의 궤변이나 화풀이에 좀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민원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선행될 때 친절할 수 있을 것이다.

애꾸눈을 가진 흉측한 왕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은 전국의 화가들을 불러 자신의 얼굴을 그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후환이 두려운 화가들은 어떤 모습으로 왕을 그려야 화를 면할까 고민했다. 애꾸눈 그대로 그린 화가도 있었고, 차마 흉측한 모습 그대로 그릴 수 없어 두 눈이 정상적인 모습을 한 왕의 얼굴로 그린 화가도 있었다. 그림을 본 왕은 몹시 진노하며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살아남은 화가가 있었다. 그는 왕의 옆모습을 그렸다. 정상적인 한 쪽 눈만 보이도록 옆모습을 그렸다. 그는 왕의 얼굴을 사실대로 그렸으면서도 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배려였다. 그 화가는 적어도 상처를 안고 있는 왕에게 어떻게 하면 상처를 보이지 않게 그림을 그릴까 고민했을 것이다.

다양한 민원인들을 만나면서 예의 없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떠나 감정이 대립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같이 맞서지 않고 대응하는 법을 안다. 그래서 친절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친절은 친절이라기보다 공직자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기본덕목이 아닐까.

논산지원에도 짜증나는 민원인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말도 안 되는 전화를 걸어 힘들게 하는 민원인이다. 사무과에서 민원전화를 많이 받는 나는 우스갯소리로 논산지원에서 오래오래 근무하려고 했었는데 그 민원인 때문에 빨리 가야겠다고 했다. 그때 옆에 있는 직원이 이런 말을 했다.
"그 민원인은 우리에게 전화를 하면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그 하소연을 들어줌으로써 답답한 민원인의 마음이 풀린다면 좋은 거지.”
악성민원인이라고 치부하였던 내 자세와는 달리 본 받을 만한 말이었다. 이미 단골이 되어버린 그 민원인의 궤변에 사무과 직원들은 토를 달지 않는다. 과장님도, 내가 대응해 줄 테니 전화를 돌려달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끝까지 들어주고 기다려줌으로써 악성민원인에게 조차도 배려를 한다. 바쁜 업무에 민원인의 푸념을 들어주다 보면 정말 짜증이 나지만, 내가 힘들어도 소외된 민원인의 마음이 치유가 된다면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견뎌야 할 사명인지도 모른다.

버릇없는 민원인과 맞서 싸우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예의 없는 민원인을 잘 다루는 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고 지혜가 아닐까. 많은 화가들이 애꾸눈을 가진 왕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또 거짓으로 그렸다가 죽음을 면치 못하였지만 지혜 있는 화가는 왕의 심상을 꿰뚫어 보았다. 결국 자신의 지혜가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슬프게 우는 애처로운 촌부를 보면서 민원인은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보듬어 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하룻날의 소회를 글로 옮기면서 그간 친절하지 못했던 나 스스로 반성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울고 있는 아주머니의 등을 봄바람이 토닥여 주었듯이 이젠 공무원인 내가 토닥여 드려야겠다. 회사의 자산은 '상품'에 있지만 공무원의 자산은 '민원인'에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