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느 날

2006.04.28 05:02

염미경 조회 수:66 추천:8

겨울 어느 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염미경




  아프고 무기력해지면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법인지 요즈음들어 부쩍 삶이 무의미해지고, 눈에 보이는 모
든 것에 질투를 느끼듯 매사 뒤틀리는 심사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일요일 하루쯤 집에서 푹 쉬고 싶어하는 남편을 졸라 아들과 셋이서 나서는 길, 미래를 약속하며 남편과
함께 거닐던 곳을 찾아 달콤하고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가져다 집안에 걸어놓고 싶었다. 날마다 이어지는 두통에 어지럼증까지, 몇 달을 벼르고 벼르다 눈앞에 펼쳐질 바다를 생각하니 옅은 설렘이 일었고, 늑장을 부리다 오후에 출발해서 채석강까지 갔다. 오늘은 꼭 일몰을 보고 싶었다.

  “아, 눈부셔라!”

  집안에 갇혀서 지낸 시간들을 아는듯, 유난히 맑은 겨울 햇살에 차창 밖으로 스치는 정경들은 눈이 부시다 못해 안구를 욱신거리게 했고, 곧바로 멀미까지 일게 했다. 햇살 아래 얼굴을 내미는 일조차 힘에 부치는 나는 옆에서 운전하는 남편과 아이 생각은 접어둔 채 맑은 하늘에 비라도 내려주길 속으로 기도하며 차창을 조금 내렸다. 성치 못한 몸으로 세상 밖에 나서는 길엔 길든 짧든 언제나 이렇게 고통이 따른다. 속은 울렁거렸지만 마음은 벌써 바닷가를 거닐었고, 지나는 길에 구경삼아 젓갈이 유명한 곰소시장에 들러서 가기로 했다.

  매서운 바람이 두 볼을 때리는 날이어서 감기에 걸릴까 무서웠지만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
은 욕망에 목구멍이 시리도록 바닷바람을 들이마셨다. 가슴으로 들이마신 바람 탓이었을까. 바다를 배경으
로 펼쳐진 활기찬 광경 속에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느 사이 나는 잃었던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어선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뒤엉켜 파닥이며 주인을 기다리는 싱싱한 물고기들, 몇
날을 누워만 지내던 나에게 거친 손놀림으로 뱃전을 청소하는 선원들의 바쁜 몸짓은, 살아있음을 표현해내
는 의미있는 동작인 것만 같아 눈을 깜빡여가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지치고 생기 잃은 얼굴에 가누기조차 힘든 몸뚱이를 붙들고, 미래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나와는 너무 대조적인 억세고 건강한 모습들이다.

  “후!” 토해내듯 큰 숨을 쉬고,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겠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막으려고 외투의 앞자락을 조이며 나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내 마음에 우울한 그늘이 드리워진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엄마, 엄마, 이게 뭐야?” 파닥거리는 생선이 신기했던지 아이가 나를 불렀다.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 시장아줌마에게 물어보자.”

  모처럼만에 엄마와 함께 나선 길, 활짝 웃으며 즐거워하는 아이와 남편을 보며 내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춥다, 이제 그만 가자.” 길을 재촉하듯 고개를 돌리며 얼른 눈물을 찍어냈다.

  곰소를 지나 채석강으로 향하는 길은 덜커덩거리는 버스를 타고 먼지 풀풀 날리던 때가 더 정겹고 좋았었
다. 하지만 스치는 세월과 함께 아무 때나 불쑥불쑥 찾아와도 늘상 그림 같은 바다를 보여주는 이 길은 나에
게 꿈을 꾸게 하는 곳이다. 자꾸만 와 보고 싶은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
을 수 있을 것만 같고, 뿌옇게 이슬비가 내리는 날엔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로운 바닷가 풍경에 그만 넋을 빼앗
겨 비를 맞으며 한없이 걷고만 싶어진다.

  ‘아무도 몰래 낯선 이의 집에 찾아들어, 파도소리를 친구삼아 창으로 비쳐드는 별빛을 볼 수 있다면 얼마
나 행복할까. 잠들지 못하고 혼자서 지새울 그 밤엔 뒤척이는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괜찮아?, 다 왔어.”

멀미를 잊으려 눈을 감고 끝없는 환상 속에 빠져든 나를 깨우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눈을 뜨니 저만치 바다 위로 불그레한 하늘이 하루해를 내려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려온 짧은 여정에 스르르 기운이 빠져나가 버렸고, 앉아있기 조차 힘에 겨워 식은땀이 솟아났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더욱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을 텐데, 이제 곧 저 바다 위로 붉디붉은 노을이 내
릴 텐데......’    

  손을 잡고 거니는 연인들 사이로 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날리며 뛰다가 걷다가 엄마 주위를 뱅뱅 맴도는 즐
거운 아이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 사이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버린 아들 녀석.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세상 빛을 보던 날부터 앓아누운 엄마를 상대로 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자란 순한 아이다. 유달리 왜소한 체구를 보며 갓난아이일 적에 제대로 먹이지 못한 탓인 것만 같아 항상 죄인 같은 엄마. 다른 아이들이 당연한 듯 누리는 즐거움을 그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엄마의 가슴엔 안쓰러운 눈물이 아프도
록 차오를 뿐이다.

  “가슴이 답답해서 겨울 바다 위로 내리는 노을을 보고싶다.”며 나를 걱정하는 남편을 졸랐었다.
  “여보, 그만 집에 가요.”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내던진 나의 dl 한 마디에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돌려 오던 길로 향했고, 슬픈 노을을 바라보던 남편과 나 사이엔 한동안 우울한 침묵만이 흘렀다.




                                                                                  (1999년 어느 겨울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