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아줌마

2006.05.01 06:55

염미경 조회 수:148 추천:12

진달래 아줌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초반 염미경



  “내일 점심이나 같이 먹자.”
  “왜? 무슨 일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기로 하고 이만 끊을게.”
  세 명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다들 한결같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나와 같이 등산을 다니는 세 명의 친구들은 엊그제 만나서 한참이나 수다를 떨고 헤어졌으니 무슨 일이냐고 물을만하리라.

  집안에 일이 있어 약속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만나자고 했어?”
  “으응. 왜냐면, 내가 고마워서. 간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게 나왔어. 얼마나 다행인지, 다 너희들이 나를 재미있게 해주고 많이 웃게 해주었기 때문인 것 같아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한 친구가 대꾸하기를 “난 또, 우리가 뭐 해준 게 있다고. 너만 건강하면 되는 거지.” 수다를 떨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 놀다 내일 선운사로 등산을 가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봄, 가을 두 계절에 친구들과 자주 찾는 선운사. 말이 등산이지 몸이 허약한 나 때문에 모두 정상까지의 등반을 포기한 채 산책로 같은 가까운 길을 2시간 정도 걷다가 쉬다가 ‘도솔암’에서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저녁밥 지을 시간이 다 될 무렵 전화가 걸려왔다. 나와 헤어진 뒤 셋이서 쇼핑을 갔는데 마음에 드는 점퍼가 있어 넷이서 똑 같이 입기로 하고 샀다는 것이다.
  “회비로 샀으니까 옷가게에 가서 찾아가지고 내일 꼭 입고 나와. 알았지?”
  “응, 걱정하지 마. 알았어. 꼭 입고 나갈게.” 서로의 맘이 통한 것일까. 사실은 이틀 전에 내가 미리 가서 입어보고 그냥 나왔었는데 어떻게 내 맘을 알고 그 옷을 샀을까. 통화를 하는 도중에도 친구와 둘이서 실컷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우연치고는 흔치않은 일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새 옷이 생겼다는 기쁨에 더 웃음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을 먹고 출근을 서두르던 남편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나를 보더니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공짜로 생긴 새 옷을 입고 친구들과 등산가기로 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 셋이서 똑같은 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또 웃음이 터져 나와 진분홍색 점퍼를 입어 훨씬 예쁘고 밝아 보이는 친구들과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며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화사한 색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넷이서 똑같은 옷을 입어 그랬을까. 선운사에 도착해서 산책로를 오르는 내내 우리는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갑게 받으며 들뜬 기분이 되었다.

  “보기 좋습니다.”
  “오매, 징허게 이쁘요 잉?”
  “네 분이 다 친구인가요?”  우리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건네주는 기분 좋은 이야기는 우리들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우리는 또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하하하, 깔깔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큰소리로 웃고 말을 많이 한 탓일까. 도중에 기운이 빠진 나는 산책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쉬며 도솔암까지 올라간 친구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놀란 듯 쪼르르 이리저리 뛰며 달아나는 다람쥐의 모습을 보며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는커녕 혼자서 자연을 맘껏 느낄 수 있었고 느긋한 여유를 맛볼 수 있었다.

  오늘은 선운사 뒤란 붉은 동백꽃이 짙푸른 잎사귀 사이로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찾아왔다. 하지만 공사 때문에 계단이 막혀 동백 숲 가까이에 가 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서 아쉬움만 달래야 했다. 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추위 때문에 벌 나비와 같은 곤충들이 꽃가루를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동백나무의 꿀을 좋아하는 아주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겨주어 열매를 맺게 해준다 하여 ’조매화’라고도 부른다. 남쪽 지역에서 피는 꽃과는 다르게 4월 하순에 절정에 이르는 선운사 동백꽃, 봉우리 째 뚝뚝 떨어지는 애절한 동백꽃을 꼭 보고 싶었는데∙∙∙∙∙∙.
혼자서 느긋하게 누리는 4월의 싱그러움에 조금 전의 아쉬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고개를 들어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두런두런 시끌시끌 친구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넷이서 함께 걷는 길엔 즐거움뿐이었다. 이것도 우연일까. 오르던 길에 만났던 일행들을 선운사 천왕문 앞에서 다시 만났다.

  “어, 진달래꽃 아줌마들을 또 만나네.”
  “진달래 아줌마들이여 진달래. 옷이 참 이쁘요.”
  “하하하, 호호호.” 그저 우리 넷은 웃기만 하고 그렇게 지나치는 우리들을 또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

  부러움이었을까. 아니 낯선 사람들이 건네는 실없는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어도 여자인 까닭에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가 보다. 친구들과 넷이서 진분홍색 점퍼를 입고 나선 오늘, 우리는 큰 소리로 목젖을 보여 가며 진달래 아줌마가 되어 기분 좋게 참 많이도 웃었다. 새 옷을 입고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진달래 아줌마'란 별명까지 얻어가며.

  바람이 머물던 길가엔 우리들이 두고 온 웃음소리가 여전히 맴돌고 있을 것만 같다.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며 이별을 고하기 전에 연초록 아래 피어난 진달래꽃 같은 친구들과 선운사 숲길을 또 한 번 걸어보고 싶다.
                                                      (2006년 4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