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주체>요약

2019.04.17 07:11

정국희 조회 수:97

라캉의 주체요약

                                                                          정국희

 

 

      라캉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주체성 이론을 제시한다. 인간주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내몰려는 대부분의 후구조주의자들과는 달리 라캉은 주체성 개념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1<언어와 타자성>;

      환자가 분석가의 사무실로 들어와 안락의자에 앉는다. 그는 분석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하다 어느 지점에 들어서는 바로 단어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 실수란 바로 합당한 용어를 쓰려고 했는데 그만 비슷한 다른 언어가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담화는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다. 말실수는 한 가지 이상의 담화가 같은 입을 통해 동시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즉각 일깨워준다. 여기서 두 개의 변별적 층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 화자가 말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던혹은 말하려고 의도했던것으로 이루어지는 의도적 담화의 층위, 그리고 변형되거나 왜곡된 단어다. 자아의 말과 어떤 다른 종류의 말이다. 라캉의 타자는 가장 기초적인 층위에서 다른 종류의 말과 관계된다. 왜냐하면 그 말들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심리학적 장소로부터 온다고도 가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두 개의 장소란 자아 혹은 타자이다.


자아 / 자기담화 다른담화 / 타자의 담화

의식적, 의도적 무의식적, 비의도적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그가 대담하게 무의식 사고라고 불렀던 어떤 것을 지배하는 메커니즘들을 밝히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라캉은 그의 논문 <무의식에서 문자의 심급>에서 특유의 전치와 응축이라는 프로이드 개념들과 환유와 은유라는 언어학적 개념들의 관련성을 지적했다. 라캉은 그 외래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담화의 세계 안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을 담화나 언어의 세계로 태어난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다라고 매우 단순하게 진술한다. 언어가 무의식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라캉이 반복해서 말했듯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주어진 언어에서 그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관계들이 무의식적 요소들 사이에 존재한다. 욕망이 언어 안에 거주하는 한 그리고 라캉의 이론틀 안에서 언어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 욕망 같은 것은 없다. 무의식은 그런 외래적 욕망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따금씩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 일하고 있다던가, 성취동기가 전혀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목표를 떠벌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욕망은 담화를 통해서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우리는 무의식은 타자의 담화라는 라캉의 진술을 아주 적접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의식은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대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표, 열망,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프로이드 세대의 분석가들은 어떤 무감각증, 신체의 특정 부위에 마비가 오거나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의 사례들을 종종 이야기했다. 그런 무감각증은 신체의 어떤 부위에 있는 특정한 신경 말단 부분에 의해 결코 규제되지 않았고, 그 대신 일상어로 정의되는 바로서의 신체의 어떤 부분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 가에 관한 대중적 통념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의 동일한 신경이 한 사람의 팔 전체를 통과해서 손가락 끝까지 흐를 수도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팔의 특정한 부위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그 부위에서 예리한 고통(신경통)을 느낄 수도 있다. 아무런 생리학적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어느 전쟁에서 그 사람의 아버지가 팔의 바로 그 부분에 총상을 입었던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상상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가 어느 팔에 총상을 입었는지에 관해 잘못된 정보를 얻었으며 무감각함이나 예리한 고통이 그 다른 팔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일화들의 신체는 기표들로 쓰여지며 그리하여 신체는 외래적이고 타자적이라는 관념을 인정한다. 베르그송의 표현을 빌자면 언어는 살아 있는 것 위에 덮여 있다그리고 신체는 언어로 덧쓰여지며, 덧탑재된다.”고 되어 있다.

 

      프로이드는 아이의 다형도착적인 리비도가, 용변 연습을 통해서 , 즉 부모들이나 부모 역할을 하는 인물들에 의해 아이에게 말로 표현되는 요구들을 통해서, 어떻게 점차적으로 특정한 성감대 (, 항문, 성기)로 흘러드는지(그래서 성감대를 창조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신체의 상이한 부분들은 사회적으로나 부모에 의해 결정된 의미를 띠게 된다. 신체는 정복된다. 우리의 동물적 본성은 죽고 언어가 그 대신 생명을 얻고 우리는 산다. 말하자면 신체는 다시 쓰여지고, 생리학을 기표의 길을 내준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 쾌락들은 모두 타자에 대한 관계를 함축 내포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적 쾌락 또한 타자에게 내밀하게 묶여 있다. 실로 라캉의 초기 작업에서 주체는 본질적으로 상징적 질서에 대한 관계 언어나 법으로서의 타자와 관련해 취하는 자세이다.

 

2<무의식적 사고의 본성, 혹은 다른 절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언어는 기능한다. 언어는 그 어떤 인간 주체와도 독립하여 살고 숨 쉰다. 말하는 존재들은 단순히 언어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언어에 의해 이용된다. 언어는 자기 자신의 생을 영위한다. 타자로서의 언어는 규칙들, 예외들, 표현들 그리고 어휘목록들을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언어는 또한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가 단어를 선택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말하거나 쓰도록 사실상 강요당한다. 어떤 이미지나 은유는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구성하려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강력하게 스스로를 들이밀어서 우리는 그것을 재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한 표현들과 은유들은 의식과는 다른 자리에서 선택된다. 라캉은 그 과정을 (비유적인 의미에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두 담화 사슬이 있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

---------------> 무의식적 사고

 

      우리는 윗선을 말해진 단어들의 사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말하기, 언표행위, 혹은 언표하기의 사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발화된 각각의 단어와 그 앞뒤에 오는 단어들 간의 문법적이고 맥락적인 연계를 상기시키기 위해 사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림의 아랫선은 무의식적 사고 과정들의 진행을 나타내는데, 이는 시간상의 말의 진행과 동시적으로 발생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과 독립되어 있다. 대화를 하면서 달리다가 어떤 것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 도중 단어를 잘못 말 할 수도 있는데, 이는 어떤 다른 층위에서(무의식 층위에서) 또 다른 사고를 선점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언어도 형식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자크 알랭 밀레의 말처럼 언어의 구조는 근본적 의미에서 암호화이다.” 라캉의 생각에 무의식은 유시 수학적 기입들의 사슬들로 이루어지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수학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이용하는 상징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버트란트 러셀의 생각을 빌자면 무의식적 형성물이나 생산물들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3<말의 창조적 기능: 상징계와 실재>

 

      사고는 언제나 상징계 내에서의 우리의 위치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정된 말 이전의 시간, 우리의 상징계가 제공하는 범주와 필터를 사용하면서, 상징계 내부로부터 고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말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즉 호모 사피엔스의 발달이나 우리 자신의 개체적 발달에서의 일종의 선상징적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려고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고하는 한, 언어는 불가결한 것으로 남는다. 그러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에 어떤 이름을 실재라고 부여한다.

 

      라캉은 우리에게 문자는 죽인다라고 말한다. 문자는 문자 이전에, 단어 이전에, 언어 이전에 있었던 실재를 죽인다. 예컨대 실재는 상징계의 지배에 처하기 이전의용변 연습을 하고 세상의 방식들을 배우기 이전의 유아의 신체이다. 사회와 과정에서 점차로 그 신체에는 기표들이 기입되거나 덧기입된다. 우리는 프로이드의 다형적 도착성이라는 개념을 그 극단으로까지 가지고 간다. 그리고 유아의 신체를 그 어떤 특권화된 지대도 없으며 어떤 영역도 없는 다만 단절 없는 하나의 성감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또한 라캉의 실재에는 지대들도, 하위구분들도, 국부화된 높낮이도, 혹은 틈새도 없다. 그것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만큼이나 아이의 신체에도 적용되는 일종의 매끄럽고 이음새 없는 표면 내지는 공간이다. 상징적 질서는 말하자면 실재의 매끄러운 겉면을 자르고 들어가서, 틈새들과 구별 가능한 존재자들을 만들어내며 실재를 안장 시킨다. 즉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상징되는 상징들 속으로 실재를 잡아끌거나 빨아들여서 실제를 무화시킨다. 따라서 실재는, 언어를 앞서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실재의 얼굴 중 하나는 외상이다. 만약 우리가 실재를 아직 상징화되어야 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어는 분명 실재를 결코 완벽하게 변형시킬 수 없으며, 실재 전부를 상징계로 배출시킬 수 없다. 어떤 목적으로 외상은 고착이나 봉쇄를 함축한다. 고착은 상징화되지 않은 어떤 것을 언제나 내포한다. 우리는 실재가 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상징화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초의” “본래적실재가 점점 더 적게 남겨지게 된다. 비록 전체가 다 배출되어버리거나 중화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상징계와 나란히 존속하는 잔여물은 언제나 존재한다. 

  

해석은 윈인을 맞힌다해석에 대한 라캉의 이론은, 어느 정도까지는, 카푸트 모르툼의 것과 유사한 정식화에 기초한다. 분석상황에서 말하고 있는 분석자는 종종 어떤 것들을 말하거나 정식화하거나 인출해 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분석가에 의해 해석의 형식으로 도입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해석은 원인을 맞힌다라고 말할 때 라캉이 의미하는 것이다. 해석은 분석자가 단어로 옮기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던 바로 그것을 맞힌다. 그렇다고 외상적 원인이 어떤 단어나 표현이었다는 것을 함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가는 분석자로 하여금 그 단어를 향해 도약하도록 흔들어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상징화를 향한 첫 걸음이다.

 

      제멋대로인 말이나 융합된 단어들은, 제대로 접합된 어구라기보다는 언어의 재료라고 해야 할 어떤 것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며, 상징계와 실재 사이의 다리 같은 것으로 이바지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산출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들은 그 어떤 사회적으로 인정된 의미도 갖지 못하면서도 영향력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들은 리비도적으로 투여되어 있을 수 있으며, 단어들이 여태껏 말해줄 수 있는 것보다 주체에게 더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라캉은 원인들의 잡다한 음소를 포함시킨다.

 

4<라캉적 주체>

 

<라캉적 주체>개인혹은 영미 철학의 의식적 주체가 아니다. 영어에서는 일반적으로 분석자를 환자, ”개인으로, 혹은 고객으로 부르는 반면에 프랑스어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체로 부른다. 이런 맥락에서는 주체라는 용어의 사용에 특별히 개념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전혀 없다. 라캉의 주체는 개인도 아니고 또한 의식적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분석철학에서 지칭되는 주체도 아니다.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주체는 자아 심리학 학파에서 이해되는 바로서의 자아와 전반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라캉에 의하면 자아는 이상적 이미지들의 결정화나 침전으로서 생겨난다. 그것은 어떤 고정되고 물화된 대상에 상당하는 것으로서, 아이는 그것을 동일시하는 법을,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법을 배운다. 이 이상적 이미지들은 아이가 거울 속에서 보는 자신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 거울 이미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단계(6개월에서 18개월) 아이는 조율되어 있지 않고 실로 감각들과 자극들의 비조직화된 뒤범벅에 불과한 반면에, 거울 이미지는 훨씬 더 유능하게 조율되어 있고 강력한 아이 부모의 외양과 유사한 어떤 통합된 표면상의 외양을 보여준다.

 

<프로이드적 주체>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 일상생활의 병리학 농담과 무의식 등에 대한 초기 연구에서 라캉은 어떤 특수한 국면에서 쇄도하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해준다. 온갖 종류의 실수들에게서처럼 말실수에서도 어떤 종류의 외래적 의도가 무대에 올라오거나 침입한다. 프로이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침입들을 무의식과 연결하도록 이끌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모종의 의도성이나 심급이나 심지어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잠정적으로 우리는 이 침입자를 어떤 의미에서 프로이드 주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단계에서 프로이드는 무의식을 어엿한 심급으로 자체의 의도와 의지를 부여받은 심급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분명 무의식을 정상적 사태 흐름을 무언가로 제시하지만 무의식을 하나의 심급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데카르트적 주체와 그것의 반전>

     라캉은 데카르트적 주체 (코키토) 가 이와 유사한 일시적 존재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나는 생각한다”(I am thinking) 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때마다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주체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서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말을 자신에게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 말을 멈추는 순간, 그의 확신은 불가피하게 증발해버린다. 데카르트는 신데카르트적 우주 속에서 그토록 많은 것들에 대한 보증인을 도입함으로써 그의 주체를 위해 좀 더 항구적인 존재를 보증해줄 수 있다. 하지만 라캉은 데카르트적 주체의 점적인 (punctual) 순간적인 본성에 분석의 초점을 맞춘다.



사고 존재

      데카르트느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위의 두 개의 원을 이용한다. 그는 사고와 존재가 중첩되는 가운데 지점을 개념화한다. 데카르트적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할 때, 존재와 사고는 순간적으로 일치한다. 그의 존재의 토대로서 기여하는 것은 그가 생각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 지점에서 그는 사고를 말하는 주체 에 결합한다. 라캉의 생각에 그와 같은 견해는 다소 유토피아적이다. 주체는. 라캉의 그 용어를 이해하는 바로는, 사고와 존재가 일치하는 어떤 목가적 순간 속에서 은신처를 찾을 수 없으며, 오리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제 받는다. 그는 사고와 존재 둘 중 하나를 가질 수 있으나 동시에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5<주체, 그리고 타자의 욕망>

 

      <소외와 분리> 라캉의 소외 개념에서 관련된 두 편인 아이와 타자는 매우 불균등하게 맺어져 있으며, 아이는 거의 불가피하게 둘 사이의 투쟁에서 패한다. 하지만 타자에게 복종함으로써 아이는 무언가를 얻는다. 라캉의 두 번째 작용인 분리는 소외된 주체가 이번에는 언어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타자와 대면하게 되는 것을 내포한다. 세계 속의 주체가 물리적으로 현존하게 되는 원인은 부모 편에서의 무언가(쾌락, 복수, 성취, 권력, 불멸, 등등)에 대한 욕망이었다. 두 부모 모두 둘 중의 한명은 무언가를 원했다. 그리고 아이는 이러한 원함의 결과이다. 사람들이 아이를 갖는 동기는 종종 매우 복잡하며 다층적이다. 그 복잡한 동기들이 무엇이건 그것들은 세계 속에 아이가 물리적으로 현존하게 되는 원인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는 타자의 욕망에 의해 야기된다

 

       <소외>는 항구적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과정이며, 일정한 시기에 발생하는 작용이다. 소외는 존재의 순수한 가능성을 낳는다. 즉 주체를 발견하리라 기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상태로 남아 있는 자리를 낳는다. 소외는, 어떤 의미에서, 아직까지는 아무런 주체도 없는 것이 분명한 자리를, 무언가가 분명히 결여되어 있는 자리를 낳는다.


주체의 첫 모습은 바로 이 결여이다. 라캉의 저술에서 결여는, 일정한 정도까지는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 그것은 무 너머로 나아가는 첫 단계이다. 무언가를 텅 비어 있는 것으로 수식하는 것은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고, 그것이 달리 보면 채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채워짐과 텅 빔 너머로 모종의 실존을 갖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종의 상징적 구조 내부에서만 자리를 갖는다. 소외는 상징적 질서의 설치를 나타내며 거기에서 주체에게 자리가 할당됨을 나타낸다.


6<은유와 주체성의 재촉>

 

앞에서 기술된 주체성에 대해 구성적인 세 계기는 세 가지 대체나 자체적 은유로서 도식화될 수 있다. 소외에서 타자는 주체를 지배하거나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다. 분리에서 타자의 욕망으로서의 대상 a는 전면으로 나서서 주체에 우선하거나 주체를 예속한다. 그리고 환상의 횡단에서 주체는 자신의 실존의 원인 (타자의 욕망, 대상a)을 주체화 하며 일종의 대상 없는 순수한 욕망 욕망함(desirousness)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타자 대상 a S/

S/(빗금친S) S/ 대상 a

 

      이러한 방식으로 진술했을 때, 우리는 주체 구성의 이 세 가지 근본 계기들을 은유화의 세 계기로 볼 수 있다. 라캉의 대체적 은유들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취소되어 버리는 것은 라캉적 메타심리학의 뿌리에 있다. 여기서 주체는 은유(혹은 일련의 은유들)로부터 결과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은유는 새로운 의미를 낳는,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낳는 것으로 이해되며, 새로운 혹은 근본적으로 다른 주체를 낳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나의 주요 논제 가운데 하나는 응결물(precipitate)로서의 주체와 틈(breach)으로서의 주체다. 첫 경우 주체는 한 기표를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것에 의해, 혹은 한 기표가 다른 기표에 (하나의 다른 상징화된 사건) 의해 미치는, 사후적 효과에 의해 결정되는 의미들의 침전물에 불과하다. 둘째 경우 주체는 두 기표들 사이의 연계를 확립하면서 실재 안에 틈을 낳는 어떤 것인데, 이때 (응결물로서가 아니라 재촉으로서) 주체는 바로 그 틈의 다름 아닌 것이다.

 

<정신분석적 주체의 두 얼굴>

 정신분석적 주체의 두 얼굴(의미들의 응결물, 그리고 틈), 어떤 측면에서는 의미와 존재 사이의 분열에 조응한다. 여기서 분열은 무의식적 의미와 자아의 거짓된 존재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 의미와 일종의 틈 속의 존재혹은 라캉이 한 지점에서 말하듯이 실제 속의 주체사이에 있다.

 

<기의로서의 주체>

실재 속의 주체는 분석자가 이야기하는 인물, 즉 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상이한 행동 방침 가운데서 결정을 내릴 수 없고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친구나 연인이나 제도나 문화, 종교적 성장배경 등에 좌지우지되는 인물이 아니다. 이 인물은, 프로이드와 라캉 양자 모두에게서 오는 매우 애매한 개념을 차용하자면 거세된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 무엇이다. 거세된 주체는 언어 안에 존재하게 된 주체이다. “부적합하게혹은 불충분하게거세된 주체란 분리가 완전하지 않은 주체에 해당한다. 따라서 거세된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주체화하지 않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자신의 증상적 복종에 전염되어 있지만 그로부터 부차적 이득을 얻는 주체이다. 거세된 주체는 언어 안에 존재하게 된 주체이다.

 

      1960년 초부터의 라캉의 용어로는 황상 속에서 타자의 요구(D)를 타자의 욕망(a)으로 착각하는 주체(/녀의 환상은“ S/ a” 대신에“ S/ D ”에 해당한다) 자신의 거세를 타자의 향유에 희생하기를 거절하는 주체 자신의 거세를 타자의 향유에 희생하기를 거절하는 주체(에크리 826) 는 환상의 횡단으로 알려진 추가적 분리를 겪지 않은 주체이다. 왜냐하면 원인이 주체화가 발생하려면 거세는 표기되어야 하고 혹은 양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대상 (a) : 욕망의 원인>

 

<상상적 대상들, 상상적 관계들>; 대상 a와 더불어 라캉은 정신분석에 자신이 가장 의미심장한 공헌을 했다고 느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그토록 다양한 관점들에서 이루어진 , 그토록 많은 변경을 요구하는 개념도 드물 것이다. 최우선적인 상상적 대상은 자아이다. 자아는 상상적 산물이며 개인의 자기 신체의 이미지들이나 타자들에 의해 그/녀에게로 되반영된 자기이미지들의 결정화이거나 침전물이다. 그 대상은 여타의 대상들처럼 리비도 투여되며 , 그리하여 유아 자신의환경 안에 있는 여타의 대상들보다 반드시 더 리비도 투여되는 것이 아니다. 이 상상적에서 이해된 바로서의 그 대상은 리비도가 그것을 향하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철수되기도 하는 대상이다. “상상적관계는 환영적 관계(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들 간의 관계인데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대립(동일한과 상이한 대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동일한 부모 형상과의 관계에서 두 개의 상이한 부모 형상과의 관계에서

동일한 상황에 있는 두 동기 동일한 상황에 있는 두 아이

부모형상 부모형상 부모형상

↕ ↕ ↕ ↕

a a a ---------------a

 

 

      위에 그림처럼 상상적 관계는 당신이 다양한 이유로 자신 같다고 간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내포한다. 이는 당신들 그 둘이 아주 많이 닮아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이가 유사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기타 등등이다. 유아의 경우 그것은 가족이 대가족이나 친구 집단 안에서 체구나 나이나 관심에서 그 유아와 가장 비슷한 아이, 그리고 부모 형상이나 권위자 형상에 대한 관계에서도 유사성이 있는 아이이다. 그리하여, 누가 유사하며 누가 유사하지 않은지에 대한 결정은 또한 상징적 구성성분을 내포한다.

 

<실재적 대상들, 새재와의 조우들>

 “욕망은 만족에 대한 갈망도 아니고 사랑에 대한 요구도 아니다. 욕망은 후자로부터 전자를 뺄 때 결과하는 차이다. 즉 그것들의 분열 현상 자체이다. (라캉 에크리691) 욕망은, 엄밀히 말해서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욕망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탐색이며,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이 불을 끌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대상도 없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기표에서 그 다음 기표로의 변증법적 운동에 붙잡혀 있으며, 고착과는 정반대다. 오히려 그것 자체의 지속이거나 진전이다.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a는 욕망을 이끌어내는 무엇이다. 그것은 욕망의 도래에, 문제가 되는 욕망이 취하는 툭수한 형태에, 그리고 그것의 강렬도에 책임이 있다 그려보면 이렇다.


원인욕망하나의 대상에서 다음 대상으로의 환유적 미끄러짐

 

아이에게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은 특정한 대상이나 사람을 향할 때 그쪽으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 욕망이 아니다. 순수한 욕망으로서의 욕망이다.

 

<잉여가치, 잉여향유>

라캉은 대상 a를 마라크스의 잉여가치 개념과 등치시킨다. 주체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으로서 대상 a은 이전의 금본위와, 즉 다른 모든 가치들의 특정 기준이었던 가치와 연관된다. 잉여가치는 양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이익이나 이윤이라고 불리는 무엇에 상응한다. 그것은 자본가가 고용인들에게 지불하는 대신에 자신을 위해 따로 챙겨놓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느슨하게 말해서 고용인의 노동의 결실이다. 어떤 사람이 신탁된 어떤 특정한 재산이나 결실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할 때, 그것에 대한 생성된 이윤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소유의 권리가 아니라 향유의 권리이다.

 

8<성적 관계 같은 것은 없다>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은 성적 차이, 혹은 성구분(sexuation)의 공식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주제에 대한 불어권과 영어권 양쪽 모두의 문헌에서는 라캉의 논의가 all some 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종종 잘못 이해되고 있다. allsome의 변증법은 옳든 그르든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보통인 반면 부분part 과 전체whole 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헤겔의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라캉의 것은 약간 뒤틀린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이다. 전체는 결코 전체가 아니다. 부분은 정의될 수도 없으며 전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래서 라캉의 변증법은 보다 전통적인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보다는 수학자들에게 훨씬 이해되기 쉬울 것이다.

 

<거세>

 라캉의 작업에서 거세는 소외와 분리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라캉의 거세 개념은 본질적으로 음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향유의 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

<남근과 남근기능> 정신분석적 실천은, 다른 실천들이 그러하듯, 서구문화 일반에서 그 기표가 남근이라고 제안한다. 그것이 선입관에 불과하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하지만 정신분석은 그것이 임상적 관찰이며 그 자체로 우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근의 사실상에 지위에 대해 어떤 이유에서 제한되든 우리 문화에서 남근이 일반적으로 욕망의 기표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남근은 단지 기표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상 a는 실재적인 말할 수 없는 욕망의 원인인 반면 남근의 욕망의 이름이고 따라서 발음될 수 있다.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 라캉에 따르면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는, 그들이 남자이고 여자인 한에서 그 어떤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남자로서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로서 남자에게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항상 무언가가 끼어들어 그들의 상호작용을 어긋나게 한다.

 

9<네 가지 담화>

 

      “전체는 없다. 그 무엇도 전체이지 않다.” “담화의 우주 같은 것은 없다.” “메타언어 같은 것은 없다.” 등등 라캉적 정신분석은 매우 강력한 이론을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실천을 구성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지배적인 담화는 분명 권력의 담화이다. x,y,z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권력,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위한 권력의 담화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심리학 학파들에 따르자면 정당화될 수 없는 권력인데, 그러한 학파들에서 고객의 자율성은 신성불가침한 것이어서 족쇄를 채워서도 도전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라캉의 네 가지 담화들 간의 구조적 차이들을 설명하자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이한 담화들의 작용을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라캉은 담화들 가운데 하나를 히스테리자 담화라고 부르지만 어떤 주어진 히스테리자가 언제나 불가피하게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채택한다거나 그 안에서 기능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담화들은 의지대로 쓰고 벗을 수 있는 모자 같은 것이 아니다. 담화의 변동은 일반적으로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것을 요구한다.

 

      라캉의 담화들은 어떤 의미에서 주인의 담화에서 시작된다. 역사적인 이유에서도 그렇고, 또한 그 담화가 우리 모두가 종속되어 있는 기표의 소외 작용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주인은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되며, 따라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적 거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숨겨야 한다. 네 가지 담화들 각각에 있는 여러 위치들은 이제 다음과 같이 지칭될 수 있다.

 

행위자 →→→→ 타자

진리 산물/


     이 네 위치들 중 하나에 라캉이 어떤 수학소를 놓든지 간에 그것은 그 위치에 부여된 역할을 맡는다. 나머지 세 담화들은 첫 번째 담화의 각 요소를 시계반대방향으로 4분의 1만큼 회전 혹은 공전시킴으로써 그 첫 번째 담화로부터 생성된다.

 

10<정신분석과 과학>

 

과학은 하나의 담화다라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프로이드는 합리성합리화로 번역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라캉의 담화이론은 상이한 담화들이 있는 것과 동일한 상이한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학은 거짓이라는 지칭들에 의존한다. 하지만 이 지칭들은 명제 논리나 기호 논리 안에서만 의미를 띤다.

 

<정신분석의 지위>

 “정신분석은 설사 과학이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취해져야 한다좌분극화된 담화와 우분국화된 담화에 대한 라캉의 논의는 네 가지 담화가 상상가능인 유일한 담화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이 네 가지 담화는 상당한 부분의 지반을 커버하며, 또한 다양한 담화들의 주요동인과 목적을 검토하는 데 극히 유용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윤리>

정신분석의 윤리적 한계들은 그것의 실천의 한계들과 일치한다.” 라캉은 이론상의 진보들에 토대하여 분석의 목적들을 한층 더 검토하려고 했다. 그리고 분석의 목적들에 대한 교정된 견해들에 토대하여 이론화를 한층 더 발전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제공한다. 그것을 향유의 프락시스이며, 향유는 결코 실용적이지 않다. 그것은 자본, 건강보험회사, 사회화된 건강관리, 공공질서, 성숙한 성인관계 등의 필요들을 무시한다. 정신분석이 향유를 다루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기법들은 시간은 돈이라는 원리와 직무행위에 관한 인정된 관념들을 파괴한다. 우리 사회에서 치료사들은 현대의 지배적인 사회적, 심리학적 담화들이 환자들 자신들의 선을 위한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목적은 정신분석이라는 프락시스에 대해 구성적이다.


라캉의 주체를 읽고 느낀 점

 

책의 후기에 보면 아무나 이 책에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쓰여있다. 또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내가 그를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면, 그는 생각해볼 가치가 없다”.(p277) 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라캉의 주체를 읽고 느낀 점은 그의 다른 책들 자크라캉이나 자크라캉 세미나그리고 욕망이론보다는 내용이 더 어렵고 복잡했다. 특히 도처에 나오는 그림과 상징들 그리고 수사학과 은유 개념들은 오히려 애매해서 더 헷갈리게 만들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다 읽고 난 뒤에도 무슨 소리인지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이 책이 원고의 상태에 있을 때 출판사는 이런 불평을 했다고 한다. “라캉을 읽는 것은 분통 터지는 일이다” “그는 언제나 곧바로 말하지 않으며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똑바로는 쓸 수가 없고 똑바로 사고할 수는 더더욱 없다등등 온갖 말들로 비판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라고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론 이 책을 옮긴이가 말 한 것처럼 이 모든 진술들이 참인 동시에 거짓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를 더 그렇게 믿게 했을 것이다, "자크라캉은 아들러나 융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주체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풍요롭게 만들었고 그것을 심화시켰다. 또한 라캉은 현대의 사유체계 내에서 정신분석에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자크라캉 (p351)>

 

개인적으로 나는 정신분석이 라캉에 의해 크게 진보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많은 연구들이 인류에게 실제로 더 가치 있게 도움이 되기를, 그리고 라캉을 통해 퐁요로운 삶의 방식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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