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삶과 죽음의 변증법'
2021.04.09 16:02
삶과 죽음의 변증법
김승희론
정국희
1, 죽음과 한계의식
세상의 모든 것엔 끝이 있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탄생은 없다. 만일 탄생과 죽음이 별개로 존재한다면 우주의 모든 기능은 철저히 다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인생에 삶과 죽음이 적대적으로 존재하듯 시에도 적대적인 두 개의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태어남’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근원적 물음인 ‘죽음’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죽음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꿈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문학사에서 이런 꿈이 대개 종교적, 철학적 신념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까닭은 신념 없이 죽음을 넘어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모든 대상이 죽음으로 한 부분을 구성한다면 치명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진실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죽음을 테마로 엮은 『DEATH』의 저자인 예일대 교수 셸리 케이건은 죽음이란 삶의 끝이며 “모든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가장 위대한 목적” 이라고 쓰고 있다. 어둠 없는 빛이 없듯 죽음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언어는 다르다. 살아있을 때도 언어이지만 죽어서도 언어는 남아 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서 몸을 바꾸는 것이지만 존재 수단의 에너지인 언어는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승희의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물의 순간순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하나하나의 사물들은 스스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을 관찰하는 존재가 됨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하찮은 생명체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작은 풀꽃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삶의 총체적인 국면을 발견하고 각각의 사물에게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이는 곧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극대화했음은 물론 구차한 삶이 아니라 온몸을 던지므로 삶의 고양을 추구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김승희가 『도미는 도마 위에서』를 끌고 가는 가장 중심적인 시의 이미지는 죽음의 의식이다. 그 어느 것으로 해석하든 무기력함과 쓸쓸함은 전혀 없다. 다만 죽음이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시집의 소재들은 존재의 전환을 이뤄낸 자의 새로운 인식의 표현이다. 마치 부정적으로 굴곡졌던 공간이 긍정적 현실로 새롭게 발전된 실존적 서정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 편으로 『도미는 도마 위에서』는 심장, 칼, 그리고 꽃 등을 삽입하여 고유한 존재의 질문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전체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기미를 드러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의 높이를 지닌 작은 것들이 빛을 잃어가는 소멸의 장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그런 힘들이 회동하는 비밀스러운 생명을 바라보며 미래의 죽음을 엿본다. 위를 향한 찬란한 욕구와 요동치는 에너지 속에서 엿보는 죽음, 이런 찰나적 생각들이 분출되는 이미지들이 시의 통로가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죽음의 문제는 죽음 혼자 풀 수 없고/ 삶의 문제도 혼자서 풀 수가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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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문제도 낮 혼자 풀 수 없고/ 밤의 문제도 밤 혼자 풀 수가 없다
밤의 문제를 밤 혼자 풀 수가 없어/ 새벽이 오고 태양이 뜨고 대낮이 오듯이
하늘은 바다를 그리워하고/ 모래도 모래를 그리워할까
[<아무도 아무것도>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시에 대한 현상학적인 다양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바슐라르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시적 흐름을 “혼의 울림”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시적 이미지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때의 울림은 존재를 생성케 하여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어를 흔들어서 깊은 내면을 건드리는 것은 존재를 원초에 가져다 놓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이미지가 우리들 내부에 뿌리를 내려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것이 돼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은 죽음의 본질을 넘어서 일반적인 생각의 허구를 파헤쳐버림을 느낄 수 있다.
우주를 중심으로 현상학적 차원에 기반을 둔 이 시는 “죽음의 문제는 죽음 혼자 풀 수 없고 삶의 문제도 삶 혼자서 풀 수 없듯이 낮의 문제도 낮 혼자 풀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피해갈 수 없는 우주의 질서를 자연의 질서로 통합하여 삶을 철학적으로 관망하고 있는 시다. 그것은 또한 화자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즉, 죽음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할 때 죽음의 세계를 지각하고 자신은 독립적이면서 독립적이 아닌 존재로 교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리가 아닌 살아 있는 몸이 우주를 대상으로 어떻게 죽음을 풀어나가는지 다음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도미가 도마 위에 올랐네 /도미는 도마 위서 /에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건들거리고 산적도 있었지 /삭발한 달이 파아랗게 내려다보고 있는 도마 위 도미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도미는 도마 위에서 맵시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종말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될까/ 비늘을 벗기고 보면 다 피 배인 연분홍 살결
그래도 고종명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되느니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도미는 도마 위에서>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김승희는 ‘도마 위’가 바로 삶의 화려함을 가장 뜨겁게 경험할 수 있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시공간이 되는 거다”고 했다. 작가가 암시하고 있는 말은 벗어남도 도피도 아니다.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채로 그냥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자발적인 능동적 체념은 다른 부분의 수동적 영역을 상승시킨다. 이때의 능동적 행동이란 반대편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작가가 사물을 대할 때는 새로운 이미지를 삽입하여 전혀 다른 이질성을 묘사하던가, 아니면 비슷한 “동일성(identity)” 을 설정한다. 김승희 역시 한 사물과 자연과의 일체감 혹은 객관적 상실과 자아의 재발견으로 자신을 설정하였다.
이미지의 현상학과 같은 정신적인 효과, 독서 체험의 영혼적인 깊이를 드러낸 때의 그 감동의 체험을 바슐라르는 ‘혼의 울림’ 이라고 함.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14~15, 50쪽 1,'동일성’은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으로서 외부세계의 충격에 유기체가 반응할 때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예; 시애틀추장이 미합중국에 보낸 편지) 조셉 캠벨, 이윤기옮김 「신화의 힘」, 21세기북스, 2017, 79쪽 2. 현대사회의 동일성은 주체자로서 자아와 타인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화폐의 양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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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는 뭔가를 자르는 받침대로서 최후의 순간을 뜻하는 말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마치 도마 위에 놓인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 작가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죽어가는 시간을 반어의 진리로 형상화 하였다. 굳이 해석하자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것의 기반이며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죽음, 그 죽음을 통해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태연하게 한순간을 누리고 있는 행세를 표현했다. 예를 들면, 이 시에서 김승희는 도마 위에서 세상을 보며 완강한 기존 세계를 부인하는 일종의 뒷걸음질 치는 “에이 인생은 다 그런 거지 뭐”라고 포기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강원도 깡촌/ 그래도 혼이 끊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곳/ 내가 죽었다 살아난 곳
몇 번을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곳/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곳
쓰러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 일어선 곳에서 곰배령 들꽃으로 다시 태어난 곳
죽었다 살아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권하는 곳
잊으려 해도 잊으려 해도 바람의 양지쪽에 환하게 반짝이게 나를 묻고 돌아서는 곳
[<인제군 기림면 진동리>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인용시에서 시적 대상은 강원도 깡촌이다. 작가는 이곳을 자신이 ‘몇 번을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곳’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장소는 누구에게나 원초적인 힘을 솟구치게 한다. 그 장소는 물론 고향이다. 고향은 포근한 품속 같은 곳이며 그 곳에서 꿈꾸던 어린 시절의 계보를 다 가지고 있다. 이 시는 단순히 죽음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진실과 인생의 의미, 그리고 삶의 원리에 대한 인간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죽었다 살아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살짝 갔다 와도 되는 곳, 고향은 죽음이 무섭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승희 시는 ‘물질적 상상력’에서 온 이미지가 많다. 바슐라르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적 흐름은 물질적 상상력에서 기인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시인이 창조하는 이미지들은 시인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건져내었다. 실제로 시인이 살아냈던 경험들이 끊임없이 상상의 원천을 넘나들며 빚어낸 것임이 분명하다. 마치 하나를 봄으로써 열개의 미시적인 변화를 찾아내므로 예측 불가능으로 이미지를 불러온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문학적 상상력이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느닷없이 연결시켜 자기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공간의 시학」을 통해 바슐라르는 “관념론적인 상상력” 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사원소론이 그 첫째이고, 둘째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며, 셋째는 원형론이다. 참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상력에 의한 상상의 공간을 통해서만 영혼의 자유로운 비상을 꿈꿀 수 있다고 그의 또 다른 저서 『촛불의 미학』 에서도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매우 다른 두 축 위에서 전개된다고 한다. 그 하나는 ‘새로움 앞에서 비약을 찾는 것’과 다른 하나는 ‘원초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찾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형식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이다. 그는 이 두 가지에서 물질적 상상력을 더 강조했다.
「시론」, 삼화원, 2014, 393쪽. 3, 헤겔의 「논리학」에 나타나 있는 변증법적 논리에 의하면 동일성은 구별과 차이성으로 이행하고 이 차이성은 다시 대립으로 이행함. 한국헤겔학회, 「헤겔과 포스트 구조주의」, 동과서, 2004, 86쪽 이미지의 현상학과 같은 정신적인 효과, 독서 체험의 영혼적인 깊이를 드러낸 때의 그 감동의 체험을 바슐라르는 ‘혼의 울림’ 이라고 함.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14~15,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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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속에 잘게 잘린 나무껍질, 파편들, 손톱이 차 있는 것 같다
부러진 손톱들, 해변의 모래알갱이들 바위의 혈족 같은 박토를 뚫고
어쨌든 봄에는 씨앗이 솟아난다
화분 속에 부러진 손톱, 갈라진 손톱, 바늘 손톱, 톱날 손톱들이 가득한데....
그 선혈을 먹고... 손톱은 자신의 찌른 피의 맛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
손톱이 가득한 심장에서 사랑의 봄이 흘러나오는 날이 있을 게다
[<손톱으로 가득찬 심장>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손톱은 ‘기지機智’ 를 통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화분을 통해 손톱으로 비유된 것들 또한 기지의 이미지들이다. 헤겔은 ‘기지’를 “의미와 형태가 분리하는 데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수법”으로 보지만 문학의 본질적 성질로 따지면 서로 낯선 종류의 표상들을 의표로 찌르는 방법이다. 즉,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개별적인 것을 결합하는 의식적 기지인 것이다. 따라서 김승희는 화분 속에 있는 자잘한 파편들을 다 손톱으로 비유했다. 손톱을 먹고 자라서 화려한 꽃으로 피어나고, 손톱으로 가득 찬 심장에서 사랑의 봄이 흘러나오는 것은 바로 김승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단순히 상상으로서 손톱 속에 윤곽과 관계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손톱을 통하여 심장을, 그리고 인간의 존재 자체를 구성하였다.
손톱이란 이미지로 현상학을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또한 몸과 자연의 경계를 지우고 서로 간의 결합을 만들고 있다. 김승희는 손톱을 사유의 주체로 놓고 몸과 흙이 교감하면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사물을 발견한 다음 유추한 만큼의 느낌으로 그 내력을 확대하여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엄청난 단순성과 무한한 복잡성으로 자신의 앎을 토해낸 것이다.
2, 삶과 죽음의 시적 공간
<<사랑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 손으로 잡으면 다치는 것
사랑은 가슴 위로 떨어지는 피 피하려고 해도 꼭 적시는 것 >>
[<오른편 심장 하나 주세요>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1,‘기지’란 ‘여러 가지 수단의 적용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강조함, 참된 시적인 표현은 단지 미사여구만을 늘어놓는 알맹이가 없는 기지를 배척함. 대상의 내적인 것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 헤겔, 최동호역, 「헤겔 시학」, 서정시학, 2015, 49쪽
2, 기지는 지적인 표현이라고 함. 일반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골계적 표현이나 단순한 재담으로 보지만 참다운 기지란 이질성 사물성에 동일성을 발견해 내는 것이며 현대시에 반어를 낳는다. 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 사, 2014,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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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시적 공간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에 있다. 그러나 시적 공간이 내밀의 팽창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사실 공간은 어디에고 없다. 공간은 바로 작가 자신의 내부에 있다. 내밀한 공간에 부여된 대상은 모두 시적 공간이며 그 공간은 또한 전 공간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랑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칼이라는 모순된 단어를 사용하여 으스스한 느낌을 하나의 시적 공간으로 보여 주고 있다. 칼이 지니고 있는 기존의 생각을 벗어나도록 외부공간을 제시하고 독자들이 시적공간을 발견하게 만드는 수법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칼 같은 끔찍한 묘사가 오히려 더 생동감 있는 시적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칼과 피를 내세운 것 또한 내밀한 공간의 확장으로 역시 일관된 정서를 깨는 수법이다.
문학에서 시적 공간이란 무엇보다 먼저 문학적 재미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따라서 시적 공간은 재미(말초적 재미가 아닌 정신적)를 불어넣기도 하지만 인간과 사회 문제 속에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보충해 주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저서에 따르면, “시적 공간은 그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에 팽창expansion의 가치를 얻는다” 고 했다. 각각의 물질마다 그것이 자리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공간은 중심이 되었다가 가치가 되자마자 사라지기도 한다. 한 마디로 공간은 보이지 않으나 무수한 공간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보여주는 삶과 죽음의 시적 공간이란 무엇일까.
해바라기 꽃잎 속에 고개를 파묻고 꿀벌은 성경을 읽듯이 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집중에는 이상하게도 서러움과 성스러움이 있었다/ 죽어도 좋아
가난한 꿀벌은 등은 등 뒤에 걸린 칼날을 찰나찰나 예감하고/ 파르르 떨리기도 했을 것이다
꿀에 머리를 박고 고요히 등 뒤의 칼날을 느끼며/ 꿀송이에 빠져 있는 깊은 꿀벌의 모습이
아프도록 슬픈 서자의 사색 어린 모습과/어딘지 닮아 있던 것이다
[<해바라기와 꿀벌>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김승희는 이 시에서 등 뒤에 칼날을 느끼면서도 꿀송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꿀벌의 상태를 조명하였다. 작가는 꿀벌이 집중 하고 있는 상태의 서러움과 성스러움 사이를 시적 공간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는 꿀벌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렇지만 부르르 떨고 있는 몸의 상태가 훤히 보인다. “죽어도 좋아”라는 말은 단순하면서도 아주 단호한 말이다. 이런 말은 대게 어떤 일에 온 힘과 정성을 쏟아놓을 때 하는 말이다. 시적 화자가 지각을 통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뱉어낸 것 같은 이 말은 한편으론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시적화자가 대상에게 몸을 맡기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은 객관적인 시적 공간이다. 작가는 어떤 행위를 강조하므로 그 순간을 죽음으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크게 보면 서로간의 교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붉은 갑옷을 두르고 싱싱하게 몸부림치면서
푸른 바다에서 헤엄쳐왔건만 너는 도마 위에서 끝난다.
각각의 물질마다 그것이 자리하는 공간이 있음. 각각이 제 공간을 쟁취하고 기하학자가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면 그 외면 너머로 '팽창'하려고 한다는 뜻. 바슐라르, 곽광수옮김,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41~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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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홍빛 갑옷을 벗기우고
칼 앞에 부드러운 속살이 뭉클거린다.
웃음, 그렇다 설핏 웃음기 같은 것이 흘렀다.
속없는 웃음이 있었다.
[<멍게>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칼 앞에 부드러운 속살이 뭉클거린다” 에는 웃음이 들어 있다. 이 웃음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슬픔을 현장에 쏟아놓고 멀리 떨어져서 그 공간을 바라보고 있거나, 혹은 직접 바라보며 세밀하게 현장을 묘사하는 경건함일지도 모른다. 칼 앞에서의 웃음,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설정으로 모순의 원리에 도전하였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이것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저것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 했다. 설령 이러한 이미지가 과장된 표현이라 해도 적합한 시적 공간이라면 거기에 맞는 단어를 선택한 작가의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테면, 상식 혹은 개념을 넘어 창의력이 표출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정확하게 진단하여 창조해 내놓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 공간을 작가의 순수한 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붉은 갑옷의 겉껍질 안에 숨어있던 속살이 껍질과 분리될 때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멍게는 부활의 희망이 전혀 없다. 죽음만 있을 뿐이다. 바다에 붙어있던 멍게가 도마 위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속없는 웃음이 있었다”는 이 단순한 표현은 체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한 생명의 원초적인 표현이며 한 우주를 정복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운명이 만들어지는 또 다른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의 시적 공간의 기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칼의 힘을 굳이 의미화한다면 칼은 죽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양한 감정의 원동력을 의미하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 반증이지만 이 시집에서 작가가 갈망하는 현재적 지향은 삶과 죽음사이에 시적공간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3, 꽃으로 피어난 생의 약동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아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흰 구름을 밀고 가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뛰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꽃들의 제사>부분 『도미는 도마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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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가 『도미는 도마 위에서』를 통해 죽음의 의식을 보여준 것은 사실 죽음이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반복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삶과 죽음에서 반복되는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여 그 안에서 실존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도미는 도마 위에서』에 나타난 꽃의 현상학적 정황들은 꽃이 단순히 꽃이 아니고 꽃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꽃 자체로서 상상 현상의 궁극적인 것, 즉 이상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 등장한 꽃들은 갖가지의 심리 현상과 내밀한 존재의 강렬성을 내보이며 말하지 못한 일체의 것들을 말하고 있다. 바로, 꽃의 본질적인 원초에서 파악된 현상학적 관찰에 의미를 둔 것이다.
꽃은 사실은 종자를 만들기 위한 그 자체의 생식기관일 뿐 인간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꽃은 아름답고 청초하기 때문에 예부터 미인을 주로 꽃으로 지칭하였다. 그렇지만 김승희의 꽃은 다르다 “벌겋게 드러난 산의 절개면 위에서도 꽃을 피우는 생명의 위엄을 목격했어요.” 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오직 스스로를 위해 피는 절개지의 꽃을 보며 신의 전망을 발견한 시인에게 꽃은 꽃이 아니다. 경이롭고 아름답게 표상되고 있는 꽃은 그녀에게 어떤 근원적 생명의 존엄성이다. 어쩌면 실존적 한계가 느껴지는 지독한 생명의 한 극점인지도 모른다.
꽃은 하늘을 향해 무슨 수직적 꿈을 꾼다든가 지상에 튼튼히 서 있기 위해 수평적 꿈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무른 줄기에 이파리를 달고 바람에 흔들리다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죽는 게 꽃의 일생이다. 분꽃처럼 하루만 피었다 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백일동안 피어 있는 백일홍도 있고 천 리까지 향기를 날리는 천리향도 있다. 이렇게 잠깐, 피었다 지는 꽃이지만 꽃은 그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벌이나 나비를 불러들이는가 하면 서로의 교감으로 존재성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인간에게는 감탄을 안겨주기도 하고 몽롱한 향기를 피어내 평화로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꽃이라는 식물이다.
바슐라르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이론이며 상상력의 소산이다’고 이미지의 형상적 기능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작가는 시적 이미지를 작가 생애의 한 요소, 즉 그가 경험한 어떤 것의 결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은 경험론에서가 아닌 오직 정신 차원에서만 가능케 함으로써 “하나의 관념철학의 근본적인 원리“ 로 정립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 을 가지므로, 그 자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존재론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잘 보는 눈은 자신을 잘 알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새롭게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꽃이 도마에 오른다 말도 안 되는 희망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꽃이 도마 위에 놓였다.
계절 따라 피는 꽃들도 도마 위에 오르면 오스스 소름이 오른다, 소름이 돋아 피가 뭉쳐
도마 위에서 꽃은 붉은 볏으로 솟아난다. 얼굴이 빡빡 얽은 붉은 얼금뱅이가
고장 난 시계를 안고 도마 위 꽃밭에 만발한다.
피안을 거슬러 화단의 모든 꽃들과 돌들이 혹서를 치르고 있는 어느 여름날
바위마저도 스스로 다비하는 듯 우리는 그런 시간을 뜨겁고 붉은
맨드라미의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러야 한다
해를 바라보며 목마름으로 더 타오르다 서서 죽는다
(<맨드라미 시간에>부분『도미는 도마 위에서』)
상상력을 경험론인 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오직 우리들의 차원에서만 가능케 함으로써, 상상력을 ‘하나의 관념철학의 근본적인 원리’로 정립시킨다고 함. 바슐라르, 곽광수옮김,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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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는 흙담집 모퉁이를 연상케 한다. 투박하고 못나 보인 모습에는 초연한 설움도 배여 있다. 주로 버건디 색에 가까운 선홍색으로 피어서 어찌 보면 생김새도 심장과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선지 작가는 맨드라미를 삶과 죽음의 의미로 삼았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희망이, 꽃 같지도 않게 생긴 꽃이 도마 위에 놓여 오소소한 소름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도마 위에서 다비하듯 혹은 혹서를 치르는 듯 목마름으로 서서 죽는 맨드라미 시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맨드라미는 다른 꽃들에 비해 생명이 좀 더 오래간다. 언뜻 보면 마치 얽은 것처럼 못생겨서 시인은 ‘빡빡 얽은 붉은 얼금뱅이‘로 지칭했다. 시인은 향기도 없고 뭉툭한, 그래서 눈에 확 띄지도 않는 맨드라미를 좋아한다. 한여름에 피어있는 맨드라미를 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그리도 많이 한 것일까. 2012년에 펴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에는 맨드라미 정원,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맨드라미가 피는 까닭은,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등등 온통 맨드라미를 내세우고 있다. 그 이유는 맨드라미에겐 고통과 시련을 견디게 하는 붉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죽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색도 변하지 않는 꼿꼿한 힘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라더라/ 목숨의 제사처럼 하는 거라더라
목숨은 한 개밖에 없는데/ 그 한 개밖에 없는 것으로
그 한 개밖에 없는 것을 바치니까/ 사랑은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된다더라
사랑은 동쪽 사과나무 아래/ 피 묻은 알몸, 하얀 사과꽃 그늘 아래
산채로 태우는 다비 같은 것/ 번제 / 알몸 위에 오래오래 불꽃이 타올라
뼈에 꽃무늬 같은 꽃물결 질 때까지/ 사랑은 그렇게 기어이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더라 (<사랑의 동쪽 전문『도미는 도마 위에서』)
김승희의 이번 시집은 여린 듯 격렬하다. 그녀의 시는 대체로 시간의 흔적들을 게워내고 정화하면서도 가끔은 너무 격렬하여 낯설어질 때가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라더라” 초연한 듯 말하면서도 목숨의 제사처럼 하는 거라고 단호히 전언한다. 한 개밖에 없는 죽음을 경계에 두고 온전한 생명을 바치라고 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생명의 가치를 지나치게 평이하게 인식하고 있는 상황 같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기어이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내적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상태다.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중심부는 결국 찬란한 죽음이자 찬란한 목숨의 제사다. 삶의 끝자리에 해당하는 죽음이 바로 삶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시집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이 되고 근원이 된다는 것과 삶과 죽음의 원형에 대한 인식을 함께 펼쳐 보여주고 있다
공통적 언어의 부재란 말은 특별한 긴장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함에 있다. 가끔 난해한 시가 새로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빈곤한 시어 때문이다. 그러나 김승희가 보여주는 시적 흐름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았고 결과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벅찼다. 자신 안에 있는 예민함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성정으로 동일한 논리와 동질적인 언어로 변화를 주었다. 『시학』 에 보면 호메로스를 위시하여 많은 시인들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시에 어떤 “신적인 힘이 관여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시는 어떤 도취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라는 거다. 전적으로 이 말에 긍정한다고 했을 때, 김승희는 자신만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영감을 주술적으로 풀어놓았다고 함이 옳겠다. 아니, 그녀의 시는 한마디로 자신에게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되었다고 함이 어쩌면 더 적합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도처에 숨어 있는 죽음, 모든 산 것들 밑바닥에는 죽음이 존재한다. 이런 질서가 세상을 지배하고 그 위를 언어가 지배하고 있다. 죽음이 여전히 우리에게 두려운 이유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끝이라는 이유에서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에 나온 시의 결과물들은 그녀의 유일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허구도 아니다. 김승희는 죽음에 대항하는 듯 하면서도 죽음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죽음을 도마 위로 끌고 와 카르페 디엠으로 만들었다. 또한 세상의 관습적인 죽음에서 벗어나 다른 질서 속에 편입된 죽음을 언어로 대신했다. 결론적으로 시인이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낸 다양한 이미지로 삶과 죽음의 질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또한 시적 공간을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통해 바라보면서 서로 간의 주체가 결합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김승희의 시적 새로움은 일상의 유사한 질서를 재창조함은 물론 자신의 슬픔을 허물고 원초의 상태로 복귀하는 법을 찾아냈다. 따라서 김승희 시에 나타난 도마의 이미지들은 고통을 감내하며 의식을 꿰뚫어 문제를 제기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모두는 한낮 보잘것없는 물질이 되고 만다는 것과 그리고. 죽음은 다만 우리를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우리들의 의식을 붙들어 놓는 것이라는 것도 제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김승희의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 의 전체적 흐름은 한 마디로 죽을 만큼의 그리움이었다. 시집 속에 등장한 수많은 꽃들은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들의 제사’였다. 이토록 시적 화자가 꽃을 통해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화려한 번제로 마침내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 태초에 그리움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 그리움은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된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기어이 찬란한 목숨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더라“ 고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듯이 꽃은 분리된 또 하나의 자신이었다. 결국 『도미는 도마 위에서』 는 작가의 성찰적 특성을 표출하기 위해 찬란한 희생으로 표출된 시적화자의 승화(昇華)였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꽃들의 제사가 된 그리움들은 오늘날 젊은 문학인들에게 분명 삶의 반려伴侶가 될 것이다.
시는 어떤 도취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 헤시오도스 역시 자신의 시재는 무사 여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말함.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시학」, 문예출판사, 2014, 10쪽
2021년 <시와 정신>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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