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가 꾸는 꿈속의 아름다운 고향: 정국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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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 2023. 6. 22.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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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희 시인은 『창조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 시 부문에 입상했다. ‘시와사람들’ 동인,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미주시문학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2019년에 제4회 동주해외작가상을 받았다. 아래는 당선 소감과 연보.


동주해외작가상에 원고를 보낸 다음 날, 잘 받았다는 내용과 함께 ‘공정한 심사를 하겠습니다’라는 답장을 받았다. 공정한 심사를 하겠다는 말이 ‘당신의 시는 좀 위태롭습니다’ 라는 말로 읽혀졌고, 또한 공정한 심사를 하니까 안 되더라도 서운하게 생각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 즉시로 괜히 보냈나 하는 후회와 함께 가슴에 품은 꿈이 헉 막혀왔다. 이후 난 80%는 ‘위태로운’ 상태로 그리고 20%는 ‘혹시’ 하는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꿈도 만날 맹숭맹숭했고, 발표 날이 되어가도 아무런 낌새조차 없었다. 이미 물 건너갔다고 생각한 나는 차라리 YMCA를 찾았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줌바를 하면서 머리는 온통 ‘내 시는 무엇이 문제일까’를 생각했다. 앞으론 어디든 원고를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우연히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다가 뜻밖에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읽었다. 잘못 봤나?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읽는 순간 목울대가 떨리기 시작했고 떨림은 금방 목울음으로 번졌다.


야호! 기뻐서 함빡 웃어야 할 일이 왜 그리 슬프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눈물을 흘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도 내 눈은 눈물바람을 일으켰다. 이런 울음을 울었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영화 ‘동주’를 보며 울었던, 영화가 끝났어도 일어날 수 없었던 그런 눈물과는 다른, 이런 눈물은 그때마다 나의 심장을 끌어올리면서 또 다른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눈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눈물은 매번 나의 존재를 확대시켜 꿈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입속에 혀를 숨기고 며칠을 보냈다. 입을 벌려서 자랑을 하면 바람이 시샘할 것 같아서였다. 아니, 막상 윤동주 상을 받고 보니 윤동주 시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나 부끄러워서였다. 나의 소식을 들은 스승께서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을 받았으니 앞으로 시 창작에 더욱 정진하라는 말씀을 듣고서야 이 상은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기뻐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항상 미안하고 고마웠던 분들에게 이 상으로 다소나마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새삼 기쁘고 감사했다.


며칠째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읽고 있는 중이다. 바슐라르는 ‘사람은 자기 속을 명석하게 들여다보지만 그래도 꿈을 꾼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람은 자기의 꿈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내 시는 처음부터 꿈을 꾸었고 위태롭지 않았었다. 다만 위축되려는 시에게 심사위원들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이국의 언어 아래서 조국의 언어를 껴안고 처절한 밤을 지새운 윤동주 시인에게 죄스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그분처럼 그렇게 내 언어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분처럼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것 같아 또한 미안하다. 내가 이처럼 고결한 윤동주 상을 받을 자격이 과연 있을까 하는 물음에 앞서 심사해주신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남은 인생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이 상을 제정한 시산맥과 광주일보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

2013년에 펴낸 『집 떠난 이들의 노래-재외동포 문학 연구』를 펴냈는데 이 책의 429쪽부터 443쪽까지가 정국회론이어서 블로그에 올린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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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희 시인
전남 완도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창조문학』 신인상
2008년 미주한국일보 신춘문예 『모녀』 당선
2013년 해외동포문학상 『늑대의 조시』 당선
2014년 가산문학상 본상 수상
미주시문학회 회장 역임
(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현) 미주시문학회 시 창작 지도강사
<시와 사람들> 시 창작 지도 담당
2019년 시집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땅을 거처로 삼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도서 선정
2019년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시집 『맨살나무 숲에서』 『신발 뒷굽을 자르다』 『노스캐롤나이나의 밤』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땅을 거처로 삼았다』


이메일 : elegantcookie@hotmail.com
주소 : 116 S Alexandria Ave
Los Angeles CA 90004


이민자가 꾸는 꿈속의 아름다운 고향
―정국희론


미국 LA에 살고 계신 교포시인이라는 것 외에, 그대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원고를 받았습니다. 한 달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지하철에서고 버스에서고 수시로 꺼내 들고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한 달이 지나니까 겨우 쓸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겨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대가 여성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 답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정 시인의 나이도 모르고, 미국에 가기 전 한국에서의 삶도 모르고, 몇 년에 미국에 갔는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그간 어떻게 생활해 오셨는지도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연락을 취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려다 포기하고, 오로지 그대의 시만을 갖고 해설의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골똘히 생각해보아야 겨우 감이 잡히는 시도 있어 텍스트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았음을 먼저 고백합니다.


디아스포라의 꿈


시집의 제일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시집을 이해하는 데 있어 실마리의 역할을 하는 시가 대개 제일 앞에 놓이거든요. 제목이 ‘디아스포라의 밤’인 걸로 봐서 이민자로서의 감회를 다룬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화자는 새벽 1시에 광장에 서 있습니다. 그 시간에도 광장은 네온사인으로 휘황한가요. LA나 뉴욕 같은 대도시는 인종 전시장이라 “더 이상 색의 경계를 논하지 않는”가 봅니다.


서로 다른 뿌리로부터 건너온 인파 속
너는 누구인가
달리다 갑자기 멈춘 사슴처럼
문득 공중에 정지한 나
끊어진 듯 연결된 소음이
제자리로 가기 위한 정지임을 알려오고
빛의 후예였구나
다투며 피어나는 불꽃에서
일순 환속한 나를 발견한다
―「디아스포라의 밤」 제4연


화자는 “너는 누구인가” 하고 자문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달리다 갑자기 멈춘 사슴처럼/ 문득 공중에 정지한” 존재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미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지’ 이미지로 파악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빛의 후예이므로 “다투며 피어나는 불꽃에서/ 일순 환속한 나를 발견”합니다. 이미지는 금방 정지에서 파동으로 바뀝니다. “캄캄한 밤의 장막을 걷어낸 디아스포라의 밤”에 어찌하여 “LG 광고 간판이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화자, 아니 시인의 고국이 대한민국이기 때문이겠지요. 새벽 1시경, 광장의 어둠을 몰아낸 것이 LG 광고 간판이라고 하니 애국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대의 마음은 늘 고국을 향해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를 보니 미국에서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에 와서 무진장 고생하는 이민자 중 한 사람인 그대이기에 이런 아바타를 만든 것일까요.


날개도 없으면서
무사히 둥지 튼 천사의 땅
로스앤젤레스
텃세 센 잡수풀 휘저어
꺾꽂이로 꽂은 몸에 뿌리가 내린 것은
순전히 부자로 만들겠다는
꿈의 의도가 나의 아바타를 조정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바타」 마지막 연


미국에서의 삶은 속된 표현으로, ‘맨땅에 헤딩하기’지요?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LA라고 하여 이들 한인이 다 이웃사촌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동포가 더 힘들게 했을 때도 있었겠지요. 인종이 다른 경우 또 어떤 차별이 있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텃세 센 잡수풀 휘저어/ 꺾꽂이로 꽂은 몸에 뿌리가 내린 것”은 미국에서 감당하기 힘든 세파를 헤쳐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꺾꽂이로 꽂은 몸에 뿌리가 내릴 정도였으니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기란, 고국에서의 삶보다 몇 배 힘든 고통을 이겨내야 가능했겠지요. LA에서 몇 시간을 가면 ‘데스밸리’라는 곳이 나오지요? 다음 시는 그곳을 무대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국땅, 휑한 사막
썩은 이처럼 자라다 만 나무 한 개와
몇 개의 선인장이 긴 침묵으로 서 있는
길도 아닌 척박한 땅
누가 올려놨나
돌탑이 서 있네
―「책임」 첫 연


사막 한가운데 돌탑을 세운 것은 무엇인가 ‘비원’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대는 이것을 “간절히 남겨진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한 칸 한 칸 올라앉은 꿈들이/ 두고 간 약속 이행하느라/ 이글이글 모을 제물로 태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황금빛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국까지 와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빈과 부가 극도로 교차되는 이곳,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희망과 절망이 나란히 공존하는 거리, 어쭙잖게 그날그날 살아가는 인생들도 부자와 똑같은 햇빛을 이고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이미지로 도심 속 일상을 보내고 있는 오후, 습기 찬 냄새를 탐하듯 “헤이 맨!” “훳츠 업?” 반짝 건네받는 날카로운 순간 슬그머니 피하고 대신 한들거리며 걸어가는 아가씨의 허벅지를 쳐다보는 시큐리티의 민첩한 눈이 대낮보다 더 밝은 빛을 쏟아내고 있다.
―「엘에이 다운타운」 후반부


제목 그대로 엘에이 다운타운의 점경(點景)입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갈라지는군요. 넥타인 맨 ‘인재’와 노숙자가 공존하는 세상의 불공평함과 불합리를 따지고 있기에는 내 코가 석 자입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면 응당 희망을 좇아가야지요. 인정보다는 자본주의 논리가 더욱 잘 통하는 사회에서는 재력을 키워야 하겠지요. 그렇지요, 이 시의 화자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입니다. 내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 혀를 차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정된 땅을 밟고
주는 물만 먹고도

온 주위를
향기로 채우는데


이 넓은 땅을
밟고 다니며
온갖 것을 다 먹은
나는, 지금
무슨 향기를 내고 있나
―「蘭」 전문


‘이 넓은 땅’은 미국일 것입니다. 난초는 그 자리에서 생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보내는데 화자는 이 넓은 땅을 밟고 다니며 온갖 것을 다 먹습니다. 그런데 난과 비교해보니 난은 자기 주위를 향기로 채우는데 나는 무슨 향기를 내고 있는지, 생각하면 한심합니다. 바로 그런 자기반성의 의도를 담아 쓴 시가 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미국에서의 나날에 대해 크게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국말 물 흐르듯 줄줄 할 줄 몰라/ 자존심을 근으로 달아 팔아버린 곳”이 미국이라고 하니까요.


몇 날을 앓아누워 운신을 못해도
알맞게 간한 죽 한 그릇 들고 와
한술 떠보라며 입바람 후우 불어주는
인정스런 이웃 없는 곳
―「달이 시를 쓰는 곳」 제2연


미국에서의 외로움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다. 그대는 대문만 나서면 이웃이 있고 차만 한 번 타면 친척이 사는 곳에 갈 수 있는 고국을 떠나 먼 이역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민의 대열에 섰기에 그대는 달을 보며 시를 쓰고 있는 것이겠지요. 생활의 고달픔보다도 인정스런 이웃이 없는 것이 이민자로서의 나날을 더욱 서럽게 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시는 서러운 것이 있을 때 나오는 희한한 것입니다.

고향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


그대 의식의 지향점은 유년기 혹은 성장기의 한국이 아닐까, 짐작케 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일 년 중 책 말리기에 가장 좋다는
칠월 칠석 다음날
책 대신 하늘 밀어내고
눅눅한 이불을 넌다


(중략)


휘모리장단으로 퍼붓던 열기에
벌써 몸이 개운해진 듯
여기저기 붙어 있는 머리카락
고슬고슬 떨어내고 있는
금세 화사해진 얼굴이라니
―「포쇄」 제1, 4연


우리 조상은 음력 칠월 칠석이 지나면 서적들을 햇볕에 내놓고 쪼이는 포쇄(曝曬)라는 행사를 가졌지요. 아마도 그대의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이런 행사를 했었던가 봐요. 기억의 창고 깊은 데서 그 일을 끄집어내 제게 보여주시는군요. 책만 널어 말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햇볕에 말리는 포쇄 날의 의미가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향수 하면 정지용이지만, 저는 정국희 시인의 향수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손님 없는 계산대에 앉아
깜박 졸음이 들라치면
아득하게 먼 샛길이 보인다
그러면 두 눈 그대로 감고
맨드라미 싸리나무 육모초
옹기종기 줄지어 선 돌담길로
찰랑찰랑 걸어가는 어린 소녀 본다


사시장철 풍치 좋은 산 아래
사대부 집 후손으로 자리잡은 집
마당에서 놀던 감빛 햇살
불썬바위로 넘어가면
부녀자들 빌미 만들어 모여들던 집
―「향수」 제1, 2연


“손님 없는 계산대에 앉아/ 깜박 졸음이 들라치면”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엿보게 합니다. 가게를 보다가 깜박 졸음이 와 어린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 것이겠지요. 그곳에서는 맨드라미, 싸리나무, 육모초가 옹기종기 줄지어 선 돌담길이 보입니다. “찰랑찰랑 걸어가는 어린 소녀”는 당신 자신이 아닙니까? 제2연에서 묘사된 집은 작은할머니가 계신 집인 듯한데, 맞습니까? 그대는 제3연에 가서 작은할머니를 등장시킵니다.

전생은 어쨌든 간에
후생은 구렁이 되었다는
택호가 영암댁인 작은할머니
당골네 말이 영험 있었던지
뒷간이나 곳간까지 구렁이 얼씬거려 쌓더니
끝내는 할아버지 데려가 불고
가산이 차츰차츰 반으로 줄어들었던 집


구렁이 같은 년이라고
눈꼬리 사납게 흘겨쌓던 울 할머니
큰 굿하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던 그 집으로
함마니 함마니
쪼르륵 달려가는 어린 소녀 본다
―「향수」 제1, 4연


택호가 영암댁인 작은할머니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당골네 말이 영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험이 없어서 가산이 줄어든 것이겠지요? 당골네를 구렁이 같은 년이라고 욕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입가에 미소가 머물게 합니다. 할머니가 큰 굿을 하며 싹싹 빌었던 그 집으로 ‘함마니 함마니’ 하고 부르며 달려가던 어린 소녀는 역시 시인 자신이지요? 완도에서의 추억도 한 편의 시를 이룹니다.

청해진 맑은 물 찰랑찰랑 휘돌아
생물내 흥건한 해안선 끝
태고의 신비 머금고
수억 년 절경으로 떠있는
섬 안에 섬 주도
갈매기들 한바탕 춤사위 벌일 때마다
청아한 물결 서편제로 추임새 넣는


물을 열어 해상길 만들고
돛 올려 뱃고동 울렸던
천혜의 비경 정도리 깻돌밭
장보고의 옛 영광이
미역 말리는 아낙네의 콧노래로
물결마다 박혀 있는
―「완도」 제2, 3연


이 땅에서 탄생한 수많은 시 가운데 완도의 역사와 풍광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낸 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완도에 이 시가 적힌 시비가 서면 완도 주민들이 대단히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서정과 서경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좋은 시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고향 언저리 사람들에 대한 추억담은 사주팔자 어느 일생 헬멧  같은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정이 무엇인지 알고 살았던 그때 그 사람들. 그대의 성장기 회상 장면 중에는 버스터미널 풍경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차창마다
젖은 추억 환각처럼 달고
달릴수록 허전한 균형 잃은 눈
슬픈 연기 오르는 어느 외로운 창을 지나
별똥받이 재밭 넘으면
처음 만났던 예의 그곳에 닿겠지
느닷없이 누군가가 기다릴 것처럼
마치 그럴 거라고 믿으며 창밖을 보는데
어느 사이 종착역 가까워 왔나
경사진 노선의 처량한 엔진 소리
너는 하행선
나는 상행선
철 지난 유행가로 막바지 오르막길
꺼역꺼역 오르고 있다
―「아름다운 회상」 제2, 3연


이런 것을 가리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할까요, 몸은 먼 이역 미국 땅에 있어도 마음은 늘 한국을 향해 있음을 이런 시를 읽으면 알게 됩니다. “슬픈 연기 오르는 어느 외로운 창”이니 시골 마을입니다. ‘별똥받이 재밭’을 제 낮은 국어실력으로는 알아내지 못했는데, 아마도 산촌의 풍경을 묘사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져온 시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버스는 하염없이 달려 목적지에 거의 다 온 듯합니다. 가난은 “흔들리는 차창마다/ 젖은 추억 환각처럼 달고/ 달릴수록 허전한 균형 잃은 눈”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보니 그 을씨년스러웠던 풍경도 아름답게 회상이 되나 봅니다. 바람 휑한 날은」이란 시도 우리네 농촌의 정서를 물씬 풍기는 고운 작품입니다. “군불 땐 아랫목으로/ 찰진 밥 한 상 걸게 차려내면// 그때서야 목에 걸린 설은 밥알은 못 이긴 척 그렁그렁 넘어간다”는 대목은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작품입니다. 이밖에도 우리 정서를 십분 살린 시로 오냐와 등을 내준다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첫 글자 엄마 다음으로 배운 말
글자체가 각지지 않고 단정하여
입을 작게 오므렸다 놓으면
저절로 웃으면서 새나오는 말
―「오냐」 제3연


그대는 ‘오냐’라는 말에는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 같은 넉넉함”이 있고, “나는 네 편이라는 든든함”이 배어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할머니가 썼고 어머니가 썼고 이제는 화자가 쓰고 있는 이 ‘오냐’라는 말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쓸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안심되고 편안한 말이 또 있을까요”라고 시를 끝맺었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우리말 중에 이보다 더 사람을 안심시키는 말은 없네요. 동년배끼리는 ‘맞아’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어른이 아랫사람에게는 ‘오냐’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상하게 젊은 세대는 ‘정말?’ ‘진짜?’ 하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부바 하고 등 내밀면
좋아라 업히는 아이를 생각하다가
단풍잎 같은 세 살 이쁜 손 어깨 위에 얹히면
몸에서 풍금소리 퍼지는 걸 생각하다가
다른 말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어부바라는 뜻이
어와둥둥 내 사랑일 거라고 결론 내린다
―「등을 내준다는 것」 제3연


‘어부바’라는 말도 그렇지만 등을 내주어 업는 행위도 지극히 한국적인 행위입니다. 사람의 등이 이때는 전폭적인 사랑, 완전한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대는 누군가를 업고 가는 것을 “등에 가슴을 대고/ 같은 쪽을 보며 한 몸으로 간다는 것”이라고 했고, “애틋한 정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업을 때, 그것은 단순히 보행을 돕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말 백 번을 할 것을 한 번의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등을 내준다는 것, 업는다는 행위입니다. ‘어부바’, 참 얼마나 정겨운 우리말입니까.


우리말 구사의 달인


그대의 이번 시집에서 제가 세 번째로 주목하는 것은 우리말과 사투리의 풍부한 구사입니다. 우리말과 사투리의 아름다움을 살핀 시가 10편은 족히 됩니다. 미국에 가서 살면서 어쩌면 이렇게 순우리말을 잘도 구사하는지, 시집 원고를 읽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말은 우리 정서를 살려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 땅의 시인들이 그대한테서 크게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은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몇십 년 밥 먹듯 해온 말을
고분고분 정갈하게 하지 못하고
일랑절랑 너픈너픈 딴말을 내뱉는다
―「나이 값」 제2연


‘일랑절랑’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너픈너픈’은 ‘너푼너푼’의 사투리가 아닌가 합니다. ‘너푼너푼’은 엷고 넓은 물건이 자꾸 가볍게 날리어 흔들리는 모양이나 가볍게 너부시 자꾸 움직이는 모양을 가리키므로 ‘대수롭지 않게’ 딴말을 한다는 뜻이 아닌가요? 또 다른 시를 봅니다.


눈에 촉수를 세우고
마른자리만 오지게 딛고 다녔어도
밤을 등에 기대면
진자리만 회창회창 더트고 다닌 듯
결린 어깨로 두엄 냄새 넘어오는 밤이면
그리운 쪽으로 돌아누워도
원추리 꽃 같은 허연 헛것이
차란차란 보이는 곳
―「달이 시를 쓰는 곳」 제4연


‘회창회창’은 ‘휘청휘청’의 작은 말인 것 같고, ‘더트다’는 무엇을 찾으려고 손으로 더듬는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입니다. ‘차란차란’은 액체가 그릇에 가득 차 가장자리에서 넘칠 듯 말 듯한 모양이거나 물건의 한쪽 끝이 다른 물건에 가볍게 스칠 듯 말 듯한 모양을 가리킬 때 쓰는 부사이므로 ‘찰랑찰랑’과 ‘치렁치렁’에 가까운 듯싶습니다. 이런 사투리와 순우리말은 ‘오지게’, ‘무덤 냄새’, ‘원추리 꽃’ 등과 잘 어울려 토속적인 분위기를 멋지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낱말 공부를 하게 한 시를 좀 더 볼까요.

바람에 나오는 ‘느자구’는 ‘싹수’(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의 전남 방언이고, ‘속창아리’는 ‘철’(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의 전남 방언입니다. 사주팔자에 나오는 ‘서털구털’은 말이나 행동이 침착하고 단정하지 못하며 어설프고 서투른 모양이지요. 질투에 나오는 ‘뽀닥뽀닥’은 북한 말인데, 물기가 있는 물건의 거죽이 말라 매우 빳빳하게 굳어진 모양을 뜻하지요. 이삿짐을 싸면서에 나오는 ‘기신기신’은 게으르거나 기운이 없어 느릿느릿 자꾸 힘없이 행동하는 모양이거나 굼뜨게 눈치를 보며 반기지 않는 데를 자꾸 찾아다니는 모양을 뜻하지요. 하지만 눈빛에 나오는 ‘꼽발’과 이삿짐을 싸면서에 나오는 ‘뻣쌔지게’는 끝내 그 뜻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일상의 길목의 ‘까란 것’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말과 사투리를 애써 시어로 쓰는 이유를 모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영어를 쓸 일이 많을 테고, 모국어는 점점 기억에서 희미해져 갈 것입니다. 언어란 쓰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어렸을 때 썼던 우리말과 사투리를 기억해내(혹은 찾아내) 시어로 쓴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애국애족이 뭐 거창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한글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애국애족이며 모국어 사랑인데, 여기에 순우리말과 사투리까지 열심히 시어로 새기고 있으니, 그 노력에 대해 존경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시를 위한 각오


그대는 이번 시집에 자전적인 내용과 현재의 생활에 대한 시도 몇 편 실었습니다. 아내에는 “생전에 돈 많이 못 벌어다 준 게 한이 된” 아버지가 나옵니다. “처자를 아끼고 술에 정겨워하던/ 온화한 선비상을 가진 남편”(그늘)도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창회는 현실풍자를 너무 재미있게 하여 너털웃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집으로 가는 길과 모녀는 미국에서 만난 사람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전적인 시와 생활시도 좋지만 제 눈길을 확 끌어당긴 것은 시를 품고 살아서」란 한 편의 시입니다. 시의 전반부는 가슴에 시를 품고 살아서 작년보다 더 여물어진 몸으로 봄을 맞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가슴에 시를 품고 살게 된 이후 달라진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군요.


책을 포개 놓고
밤을 까맣게 새운 지식은
시가 되지 못했지만
어느 연민에 뒤채이던 여린 시어는
부족함을 끌어올려
세상은 아름답다고 쓰게 했다
감성이 저 먼 곳까지 닿았는지
그게 시가 되었다
가난한 영혼 위에
생명의 언어를 잉태해준 신실하심이
시를 영글게 만들어주셨다
할렐루야
―「시를 품고 살아서」 후반부


시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지요. 감성 혹은 영혼의 차원입니다. 공감 혹은 감동의 차원입니다. 시는 때때로 충격을 주고 깨달음도 줍니다. 우리를 전율케 하고 번민케도 하지요. 그런 시에 대한 그대의 열망을 저는 이 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영혼 위에 생명의 언어를 잉태해준 신실하심이 시를 영글게 해주었다고 그대는 시에 감사하고 있군요. 할렐루야! 외치면서 말입니다. 이 시는 그대의 시론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제 시를 품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나날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물론 고민과 좌절도 수반될 테지만 말입니다. 두 번째 시집을 내는 각오가 이렇게 남다르니 앞으로 더욱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국어를 잘 돌보며 키워나가리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그대이니만큼 앞으로의 활동에 더욱 큰 기대를 해보게 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아울러 기원합니다.


2010년 12월 13일
이 승 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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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민자가 꾸는 꿈속의 아름다운 고향: 정국희론|작성자 이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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