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저녁까지
2021.02.27 20:43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타들어 가는 시간을 소요하는 건 기왕지사 편안했다
희미했지만 누구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창 옆을 지나가기도 했다
일없이 다운타운 쪽으로 목을 쭉 빼보기도 했다
부러 심심하지 않은 척도 했지만 쓸데없이 쓸쓸하기도 했다
레몬나무가 창에 그림자를 키울 때쯤 오래된 취미처럼 책을 펴들었다
눈에서 글자들이 우왕좌왕했다 이런 쯧쯧
눈꺼풀과 글자 사이, 미세한 불화로 책을 덮어버렸다
시간을 때리는 건 티브이가 제격이다
칙칙한 옷을 입은 늙수그레한 사내가 왔다 갔다 해서 그냥 꺼버렸다
재클린과 정말 닮았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재키를 닮았다고 미국에서 미국 남자가 내게 해준 첫 말
갑자기 그 말이 왜 생각나지?
그때가 이민 와서 처음으로 미국 마켓을 갔던 날이었지 아마
사실 그 이후부터 동양인의 콤플렉스가 줄어들긴 했었지
여하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둥댔다
대체적으로 별 무리 없이 초지일관 의연했다
좀 무료하긴 했지만 하루는 나를 소 닭 보듯 지나갔고
나는 하루를 한눈팔며 지나갔다
2020년 <시산맥 >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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