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를 건다 … 1-9

2012.05.07 03:20

arcadia 조회 수:445 추천:36

   백기를 건다   


유 봉 희


밤마다 백기를 건다.
경건한 무슨 의식인양
더 이상 물 먹은 순면의 타월이 아니다.
바닥으로 늘어지면 하루가 엄살로 끝나고
천장에 부딪히면 오기로 남는 것 같아
공중에 백기를 건다.

그는 나를 슬며시 수면으로 밀어놓고
칠흑의 밤 목마른 사막을
맨발로 걸어갈 것이다.
모르고 지은 내 허물이
알고 지은 것보다 커서
그의 등짐이 무거울 것이다.
낙타의 발자국이 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등짐의 능선 위로 다시 햇살 돋아나고
바람의 마른 갈기 몇 가락 얹어
하얀 사구로 돌아온 타월.

히말라야 등반은 아닐지라도
순례에서 돌아온 이를 맞이하듯
성자의 옷깃을 어루만지듯
이렇게 새 아침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어젯밤에 백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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