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 (황금알, 2012)
유봉희 (시인)
시 창작은 소통행위(疏通行爲)이다.
시인과 시가 있고, 시적 대상의 세계가 있으며, 시를 수용하는 독자가 있다.
다른 영역의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사자(四者) 사이의 대화적 관계는 시적 소통의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구성요소일 것이다.
시인은 대상 세계와 대화하고, 그 기록이 시일 것이며,
독자는 시인의 대화의 심미적 인식인 시를 읽을 것이다.
따라서 시 쓰기는 시인의 표현 욕구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대상 세계에 대한 심미적 인식을 독자와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하겠다.
나의 시 쓰기에서 독자는 거울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내 시집의 울타리 안에 함께 머물며 일상의 번잡함과 산문성과 근면성에서
잠시 벗어나 세계의 다른 형상을 느끼고 통찰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자리한다.
서정시는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감각적이며 주관적 인상을 바탕으로 표현되는 특징이겠지만.
그것을 독자와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시 쓰기에 힘이 될 것이다.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 “작은 것들과 눈 맞추며 / 오래 무릎을 접고 / 앉아”
“그들이 들려준 낮은 소리가 / 어떤 마음에 닿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작은 것들과 마주 앉아 그들이 들려주는 낮고 작은 소리를 들으며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과 나눈 작은 대화의 기록이 나의 시집이고, 이제는 그것이 “어떤 마음에 닿아” 울림이 되기를 기다린다.
나는 시를 창작한다는 말 대신 시를 만난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래서 두번째 시집 『몇 만년의 걸음』에서는
“시를 창작한다는 말보다 시를 만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시들이 시인을 만나서 옷을 받아 입고 각자 제 모습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만나러 산과 거리를 힘들게 오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들이 먼저 찾아와 나의 창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들의 숨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개성과 품격을 지켜주는 옷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했다.
이를테면 나의 시쓰기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시에 내가 깃들어 옷을 지어 입히는 행위로 여긴다.
시를 만나는 행위가 무슨 거창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를 따온 시에서
“화석이 된 송곳니 같은 조그만 몸체” 지만 “소라와 조개껍질이 바위 등에 총총히 박”힌 채
“몇 만 년 전 바다를 악물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범주는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의 원적(原籍)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겠다.
그 작은 것들은 나에게 존재의 시원이나 원형 같은 것을 보여준다.
잠깐이나마 원형적 존재의 형상을 보여주는 “시간의 발”(「현장은 왕복여행권을 가졌다」)처럼
켜켜이 축적된 존재의 지층을 현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는 지각의 변동이 심해서 8번이나 바다에 잠겼다가 나온 땅이라고 한다.
산을 오르면 바다가 산이 되고 그 산이 다시 바다가 되었다가 산이 된 현장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는 시적인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들은 자주 존재의 떨림으로 우리를 이끌고,
또 우주적 울림으로 우리의 감각을 확 열어젖힌다.
우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감각하지 못할 뿐이지, 그것들은 우리의 도처에 머물며 상존한다.
나뭇가지 한 마리 새의 지저귐에도,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칭얼대는 아이의 투정에도,
어두운 뒷골목 주름진 여인의 이마에도……
평범한 일상과 사물은 우리가 닥아와서 깊은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요구한다.
날선 칼처럼 감각은 더욱 예민하며 푸르게 벼려지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어린 아이처럼 더욱 투명하게 밝아지기를 바란다.
낡고 때 묻은 언어가 아닌 팔딱이는 싱싱한 언어,
관념의 때로 더렵혀진 언어가 아닌 날것 그대로의 언어로 그들에게 살아 있는 옷을 만들어 입혀주고 싶다.
시를 만난다는 말은 시를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픈 나의 속내일 것이고,
또한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 쓰기는 하나의 놀이나 장난, 푸념이나 넋두리가 아닐것이다.
내면의 눈과 귀, 코와 혀의 감각, 온몸이 예민한 촉수가 되어 시의 씨앗을 만나고
그것을 진실하고 절실하게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시인들의 생각일 것이다.
시쓰기의 큰 몫인 상상력이 영혼의 감각이라고 한다면 그 영혼의 감각이 닿는 시의 씨앗은 하나의 소우주를 가진 생명이 아닐까.
때로는 내가 그 생명을 찾아가 만나고, 때로는 그 생명이 내게 찾아와 만나는 일은 그지없는 행복한 일이다.
시를 쓰다보면 처음 생각했던 의도대로 써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엉뚱하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내놓을 때가 있다.
그들에게도 자체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인 생명의 내적 논리가 작동하는가 싶다.
시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자신이 가고 싶은 대로 가려는 길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신기하게도 시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의 유기체로서 스스로를 형상화하고 규율한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놀랍게도 시가 스스로를 이루는 부분과 요소들의 필연적 선택과 배열에 의한 통일적인 짜임을 지향해나가면서
자신의 형상을 스스로 갖추어나간다는 경험을 하게 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들의 요구대로 그에 맞는 언어의 옷을 찾아 입힐 따름이다.
이런 때 나로서는 시란 그 자체의 고유한 의지를 가진 생명의 실체로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순간의 포착, 나는 그저 순간적으로 날아든 시의 씨앗이 발아한 생명을 받아내는 산파로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생명을 보듬고 보살피는 것이리라. 가령 다음과 같은 시에서
나비가 내려 앉아 정지한 몇 초, 그 고요의 무게, 그 태고의 정적에서 발현하는 황홀감은 나를 취하게 했다.
그것은 내 느낌이지만, 그에 앞서 시 자체가 품은 스스로의 미적 원리에 의해
그 생명이 실현되고 작동하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웠다.
그 자체로 시적 주체인 내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풍경의 의식 영역이고, 나는 그것을 감각할 뿐이었다.
팔위에 내려앉은 나비
푸른 날개가
고요의 무게로 접혔다.
나는 숨죽인 나뭇가지다.
첫 꽃을 피운 나무는
첫 눈을 받은 나무는
이렇게 조금 부끄럽고 황홀했을까.
환하게 얼어붙은
나비가 내려앉은 몇 초
무용수가 공중에 머무는 몇 초로
태고의 정적을 모셔왔다.
내가 나뭇가지인 줄 아나 봐
다섯 살 소녀가 아니어도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데
팔에서 싹도 돋고 꽃도 피려는데.
- 「나비가 머문 자리」 전문
어느 봄날 문득 나의 팔에 나비가 잠깐 내려앉았다.
그때 그 찰나 내 팔에 나비가 내려앉은 그 순간의 정지는 풍경의 의식이리라.
인간이라는 주체가 사라진 풍경, 고요의 무게와 태고의 정적은 내가 느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느낌을 갖게 했다.
그때의 황홀함을 표현한 것인데, 그 몇 초의 찰나와도 같은 시간은 내가 시를 만나는 순간이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시를 창작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생명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하는 일이란 그에 적당한 옷을 마련해줄 뿐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옷이 싱싱하고 투명한 언어의 옷 내가 만난 시가 제 생명으로 빛나고 약동하길 바라면서,
마치 “팔에서 싹도 돋고 꽃도 피”는 언어의 옷을 고르고 입힐 따름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세번째 시집 출간 후 몇 분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나의 모국어 사용에 큰 관심을 보여 주었다.
이중 언어 생활자로서 모국어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에 대해 주목한 이들이 있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자발적 디아스포라 시인으로서 고국에서 작품 활동하는 많은 시인들의 유연하고
재치 있는 글을 대할 때마다 부럽고, 때로는 주눅이 들었던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어느 누가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눈으로만 보고 싶어 하겠는가.
마음으로 머리로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할 것이다.
나의 시 쓰기는 주로 새벽이거나 아침나절에 이루어진다.
충분한 휴식으로 머리가 맑아지고 정돈되었을 때를 택하려고 한다.
곧잘 지나친 감성과 혼돈의 몽상으로 치닫는 저녁과 밤 시간을 피해 보고자 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이국생활 40년,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그 건너 고국을 그리며 사는 사람이니
자칫 감정의 낭비로 시적 긴장감이 느슨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나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은 뜨겁고 차가운 이중구조가 필요한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계에서 산다.
생명의 한계를 넓히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비단 첨단 물리학이나 생물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시인들에게도 주어진 한 몫의 재능이라고도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Armand Trousseau)의 말이다.
시의 씨앗은 영혼의 감각으로 만나서 그것을 과학적인 안목으로 키우고 다듬으면 좋은 시가 될 것 같다.
나에게 이 말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통합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예술을 지향하는 과학, 과학을 꿈꾸는 예술의 세계는 나의 시가 다다르고 싶은 지점이다.
분리나 배척이 아닌 통합된 사유야말로 내 시적 사유의 지향처이고 싶다.
훌륭한 조각가는 대리석 안에서 어떤 상을 미리 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손을 움직여 작품을 탄생시키고,
유능한 정원사는 나무 앞에 서면 실제로 나무가 “여기 좀 다듬어 주세요.” 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이런 경지에 이르도록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시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아득하다. 잡일 듯 잡히지 않고, 보일 듯 보이지 않지만 따라 가야 하는 길.
어떤 절대나 절정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도 시인은 그런 절대의 언어를 향해 나가는 자가 아닐까.
-了-
- 揭載 [서시, 겨울호, 2012]
〔내가 뽑은 시〕
새 발자국
이른 새벽 바닷가
새 발자국
뒤 돌아보니
다시 읽어보니 작을 소(小)
파도가 자꾸 쓸어 담아 가는
삭정이
오늘밤
달이 환하게 불 켜겠다.
유봉희
『문학과 창작』 신인상 등단 2002년.
시집 『소금화석』, 『몇 만 년의 걸음』, 『잠깐 시간의 발을 보았다』
홈페이지 :
“유봉희의 문학서제” http://mijumunhak.com/eubong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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