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배달된 편지

2005.11.23 11:43

정찬열 조회 수:150

"나는 엄마하고 아빠 집 있어며는 더 조캐습니다. 외냐며는 멘날멘날 집업서요. 엄마하고 아빠 일 마니 해구 Some times 우리 가치 밥 못 먹어요. 근대 나는 잠자서 worry 안해요 근대 I know that 우리 아빠 하고 엄마 우리 너무 너무 사랑해요"  " I want my mom and dad to stay home because they're always gone. They are gone because they have to work a lot. Some times they're so busy they can't eat dinner with us. But I know they love me."    - 장미반  정승, -
무슨 암호 같은 이 글의 뜻이 쉽게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글은 필자의 아들이 한국학교 작문시간에 쓴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지난 일요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내가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한국학교의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던 중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라는 제목으로 아이들에게 간단한 글짓기를 시켰던 종이 묶음을 발견했다. 영어와 한글문장이 함께 써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학교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는 작문지도 방법이다. 97년도 봄 학기에 쓴 작문이니까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내용이 흥미가 있어 읽어가다가 낯익은 글씨를 발견했다. 내 아들이 쓴 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아들은 아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나갔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한국말이 생각나지 않은 곳은 영어를 섞어 써 놓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97년이면 지금부터 5년 전으로 우리 승이가 아홉 살 먹던 해다. 엄마 아빠가 집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첫 마디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맨날맨날 텅 빈집을 지키면서 함께 밥도 먹어주지 못하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눈물 그렁그렁한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둠이 내려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그냥 방바닥에 잠든 녀석의 모습, 그렇게 잠이 들었기에 걱정도 무서움도 잊게 되었다는 녀석의 속마음을 읽으면서 가슴이 미어진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빠가 늦게 들어오시는 것은 일을 많이 하고 바쁘기 때문이며, 아빠 엄마는 자기들을 너무 너무 사랑한다면서 부모를 이해하며 감싸고 싶어하는 어린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그 녀석이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변성기를 지난 목소리에서 어느새 어른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사랑을 '함께 놀아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아들이 다 커 버린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다. 아빠와 함께 공놀이나 닌텐도 게임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 그런 후엔 자장면이라도 먹으면서 아빠한테 재잘거리고 싶었을 그 어린 마음, 아빠 엄마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아이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글짓기 내용을 보니 반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아이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도 느꼈지만, 아이들이 부모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 한 번 잘 키워보겠다고 낯선 땅에 건너와 힘든 일도 마다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부모들의 입장이야 이해가 되지만 아이들이 쓴 이런 글들을 본다면 어떤 느낌을 가지게될까. 늦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글을 읽었던 날, 그 날 저녁은 일찍 집에 들어와 아들을 데리고 쇼핑을 갔다. 전에 없이 친절하고 사고싶은 건 무어든지 고르라는 아빠가 조금은 엉뚱하고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던지 녀석의 표정이 좀 뜨악했다.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사과하고 싶고, 이런 식으로라도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은 아빠의 심정을 녀석은 눈치도 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훌쩍 자라버린, 나 보다 더 큰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들의 따뜻한 체온이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아들의 작문은 아빠를 철들게 하려고 이 겨울 5년만에 나에게 배달된 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늦게 배달된 편지,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 받아본 편지'로 인해 이렇게 아들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녀석이 날 보고 환하게 웃었다. 웃는 옆모습이 잘 익은 사과처럼 싱그럽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한번싱긋웃어주었다. 빨갛게 물든 단풍이 우리 부자를 향해 살랑살랑 고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2002년 11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