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에서 생각해보는 5.18

2005.11.23 12:49

정찬열 조회 수:163 추천:3

                                              
  이곳 L.A에서도 5.18 기념식이 열렸다.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사업위원회와 L.A한인회, 그리고 남가주 호남 향우회가 공동 주최하고 이 지역 인권관련 모임들이 후원한 행사였다. 행사는 총영사의 기념사에 이어 황경문 교수, 스테판 로드씨와 하미드 칸씨가 주제발표를 하고 5.18기록영화를 상영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23년 전에 있었던 일을 필름을 통해 다시 보면서, 당시 광주에서 겪었던 먼 옛날의 기억들이 마치 엊그제 일인 양 되살아났다. 깜깜한 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함께 했던 그날. 최류탄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을 때 길가 아주머니들이 바가지로 물을 퍼주어 얼굴을 훔치던 일, 최류가스엔 치약을 발라야 한다면서 누군가 치약을 짜서 눈썹 위에 발라주던 일. 유동삼거리에서 드럼통을 굴려 총알을 막으며 신역쪽으로 전진하다가 결국 밀려났던 일. 도청 앞 분수대에서 있었던 자유토론. 밤하늘에 불타던 MBC 방속국. 아! 금남로 거리를 가득 메운 택시들이 마치 영화속의 로마 군단처럼 도청을 향해 도도히 진군해 오던 장면.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사람들.
도청 앞 상무관, 태극기에 덮혀 누워있던 주검들, 주변을 진동하던 시신 썩어가던 냄새와 사망자 명단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눈동자와 표정들. 새벽공기를 뚫고 들려오던 그 다급하고 애련한 목소리. 이어서 들려오던 헬리콥터의 선무 방송. 그리고 총소리. 총소리...
광주가 완전히 고립되어버린 그 때. 사실을 외부에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외신기자들이 시내 어느 여관에 묵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영어 잘 하는 모 대학 교수를 모시고 밤에 그곳을 찾아갔으나 그들을 만나지는 못했었다. 잊을 수 없는, 그러나 세월과 함께 잊혀져 가던, 영화엔 없는 그 날의 기억들이 하나씩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광주가 섬이 되고, 수많은 형제들이 내나라 군인이 쏜 총탄을 맞고 죽어갈 때, 광주가 폭도들에 의해 점령된 특별구쯤으로 매도되고 있을 때, L.A에서는 광주시민 돕기 헌혈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 미 적십자사 농성을 통해 광주의 진상을 널리 알리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일은 호남인을 비롯한 이 지역 민주인사들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남가주 호남향우회가 결성되었다. 84년 봄, 미국에 건너 온 다음에야 알게된 사실이다.    
그 후, 이곳에 살면서 5.18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해 온 것을 보아왔다. 85년도에 '5.18의거 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3만 5천 달러를 모금하여 본국에 송금한 일, 광주 민중항쟁기념 동포 토론회, 5월 항쟁 정신계승 걷기 대회, 오월제 개최, 항쟁 기념 음악극 및 연극 공연 등, 광주 민중항쟁 23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을 해 왔다. 이런 일들은 5.18당시 수배자로 미국에 망명한 윤한봉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세운 민족학교 관계자들을 비롯한 의식 있는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 오고 있다.
5.18 스물 세 돌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광주를 생각하게 된다. 민족사의 고비마다 그 중심에 광주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물꼬를 터서 민족사의 물줄기가 바로 흐르도록 잡아 준 곳이 광주였다. 조선시대의 실학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광주는 나라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선봉에서 불을 밝힌 빛고을이었다. 그래서 김용택 시인은 '우리사랑 광주'에서 "엄동 같은 독재에도 얼지 않고 / 총알처럼 눈 퍼부어도 / 눈 쌓이지 않는 / 생수 솟는 김나는 샘 / 우리 사랑 / 광주 " 라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은 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이제 세계의 정신이 되고 있다. L.A 기념식에 참석한 연사들도 그것을 강조했다. 광주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