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선거를 준비하는 아들을 보면서

2005.11.23 12:40

정찬열 조회 수:169 추천:5

지난 토요일 아침, 한국학교로 가는 차안에서 9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승이가 흰색 티셔츠 20개를 사달라고 했다. 그렇게 많은 셔츠를 무엇에 쓰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한 번 씨-익 웃고 만다.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물었더니 다음 주 수요일, 9월부터 시작되는 새 학기에 학교를 대표할 전체 회장과 10학년 11학년 대표를 선출하게 되는 데, 자신이 10학년 회장후보로 출마 할 예정이란다. 그래서 자기를 지지하는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입고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셔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와 함께 티셔츠와 포스터용지, 사인펜 등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오후부터 일요일인 오늘 오전까지 녀석은 셔츠 앞 뒤 면에 "FOR SOPHOMORE CLASS PRESIDENT" "DON'T BE DUMB, VOTE FOR SAM JUNG" " HE'LL DO THE JOB RIGHT"등의 구호를 예쁜 그림이나 모양과 함께 새겨 넣었다. 밤늦은 시간인 지금은 포스터를 그리고 있는데, 목에 거는 구호도 50여장이나 만들어야 한단다. 피켓은 만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선거규정상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옆에서 자잘한 일을 도와주면서 구호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명패를 목에 걸어보았다. 제법 선거운동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거용품을 오늘 밤중으로 다 만들어 내일 아침부터는 친구들의 협조를 얻어 아침 등교시간과 점심시간 등을 이용해 선거운동을 할 작정이라 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선거일인 수요일 점심시간까지 3일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기간을 정해놓았단다. 선거와 관련된 자세한 규정이 있어 반드시 그것을 따라야 하며, 선거일자도 대통령 선거처럼 특정한 날로 정해서 매년 4월 마지막 수요일에 실시하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회장으로 출마하기 위한 자격이 필요한가 물었더니 학과목 성적이 평균 B를 넘고 F가 없어야 하며 학칙을 위반해서 처벌받은 기록이 있으면 실격이란다. 전체회장은 한국의 고 3에 해당하는 12학년 학생 후보 중에서 2천 명이 넘는 전체 학생의 투표를 거쳐 선출이 되고, 10학년과 11학년은 각 6백 여명 되는 동급생들의 선택에 의해 대표가 결정된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는 회장만 선출하고 부회장은 다른 날 다시 뽑은 다고 했다.
9학년에 한국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었더니 열 명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시안 학생은 얼마나 되는가 물었더니 전체학생의 5%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당선이 쉽지 않겠다며 걱정스레 얘기를 했더니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학교 아이들이 인종에 따라 투표를 한다고 지래 짐작하는가 하는 비난 섞인 따가운 시선이었다. 그 순간 같은 인종이면 무조건 지지하고, 다른 인종은 덜 지지할 것이라는 인종편견을 가지고 있는 속 좁은 내 마음을 들켜버린 듯 싶어 조금은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갑자기 녀석의 유치원 시절이 생각났다. 부부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아침 출근길에 아내가 아이를 유치원에 맞기면 저녁 무렵 아이를 데려오는 건 내 몫이었다. 퇴근길에 가서 보면 백인이나 흑인 등 여러 인종의 아이들이 섞여 잘 놀고 있는데, 유달리 우리 승이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구석에서 울고 있거나 아니면 혼자 놀고 있는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아빠를 보면 반가워 소리치며 달려오곤 했었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당하는 어린 마음은 또 어쩌랴 싶어 나는 그때 얼마나 마음 아파했던가.
그런 아이가 이제는 저렇게 커서 다른 인종의 또래들과 잘 어울리며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학생회장을 하겠다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참 대견스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는지 티셔츠, 포스터 등을 온 방에 가득 널려놓은 채 녀석은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저것들을 가지고 가서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선거운동을 할 것이다. 곤히 잠든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 했다면' 학생회장에 당선되고 안 되고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전해 주고 싶은, 이 아빠의 심정을 녀석은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