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죽음과 음울이 남긴 삶의 궤적(시 평론)

2006.02.15 15:21

박영호 조회 수:562 추천:14

꽃의 죽음과 음울이 남긴 삶의 궤적

다음은 생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죽음과 함께 그 음울한 우련(憂憐)을 통해서 자신의 생과 영혼의 모습을 가늠해 보는 죽음과 삶에 대한 궤적이 눈길을 끈다.  장 태숙의 ‘꽃의 장례’와 ‘자카린다’가 바로 그것이다
꽃의 참된 의미를 꽃이 현란하게 만개한 모습이 아닌, 생을 마감하고 한낱 주검으로 떨어져 내린 꽃잎이나 보도 위에 수북이 떨어져 내린 꽃잎들의 잔상을 통해서, 그들의 생의 참 모습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참된 삶의 모습과 생의 의미를 가늠해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스페인의 대표적 근대 문학자인 우나모노(Unamuno Y Jugo 1864-1936)가 일찍이 그의 대표적 저서인 <생의 비극적 의미 >에서  “합리작인 것은 모두 비생명적인 것이다.” 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생명적인 것은 비합리적이란 말일 것이다. 결국 생명적인 것은 모두가 유동적이고 각기 의지적이어서 그들의 참된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피기가 힘들기 때문이란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처럼 죽어서 떨어져 있는 꽃들의 주검을 통해서 그들이 살아온 생의 참 모습과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이, 보다 그들이 살아온 처절한 생의 아픔이나 진실된 참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자신의 생에 대해서도 역시 그 러리란 기대에서 일 것이다.

먼저 ‘꽃의 죽음’ 에서 시인은 생을 마감하고 떨어져 죽은 꽃의 주검을 통해서, 그들의 생에 대한 참 모습을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참된 생의 의미와 참된 영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사르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탁, 소리가 펄럭였다 공기를 흔드는 마지막 저항,
가슴 깊숙이 꽂힌 칼날 뽑아내 스스로 목을 치듯, 선명하게 가실 바닥으로 투신하는
바싹 마른 양란 꽃의 얼굴들


물기 하나 없는 맑은 영혼이 날아갈 듯 가볍다. 색깔을 지니는 것조차 욕심이었을까?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벼워지는 육신, 곧 바스라질 듯 가냘픈 너의 퇴색한 우주, 적막 그늘에서
싸르르 통증을 일으키는 내 청춘이 바래가고 바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한 생애, 풍장으로
보내고 싶다. 맨발의 내 영혼
                                                                         장태숙 ‘꽃의 장례’의 일부<문학세계> 16호, 2004년 겨울호에서

꽃의 죽음이 투신이란 말처럼 날카롭고 냉기까지 감도는 언어들로 무섭게 표현되고 있어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여기에서 꽃의 죽음은 패망이나 좌절이 아닌 스스로 목을 치는 의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꽃의 죽음은 차라리 장렬하다. 이처럼 죽음이 지나치게 엄숙하고 숙연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은 그만큼 생이란 것이 처절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감은 꽃이 한 때 자신이 우주리라고 느끼고, 세찬 격랑과 탱탱한 희망들, 그리고 핏줄 속의 불티가 들끓듯 일어서 긴 꽃대 끝까지 올렸던 그 현란한 시간이나, 꽃잎에 주름 앉고 생이 이승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팽팽하게 이어간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힘있게 붙들고 살아온 그들의 생생한 생의 모습이지만, 이는 시인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생의 모습일 수도 있고, 숨이 딱 멈출 때까지 붙들고 살아가려는 삶에 대한 끈질긴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셋째 연에서 꽃의 죽음에서 느끼던 소름 끼치는 싸늘한 냉기에서 벗어나, 창백하고 가볍게 떨어져 놓여 있는 꽃의 시신을 통해서, 조용히 자신의 생의 무게도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지녔던 그 고운 빛깔들도 결국은 부질없는 것처럼, 자신의 소망들도 모두가 부질없는 욕망일 거라는 허무함을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스러질 듯 가냘프게 퇴색한 꽃의 우주를 보고 아픔을 느낀다. 자신의 생에 대한 아픔이다. 그래서 바래가는 자신 스스로의 생애도 결국은 하나의 꽃잎처럼 ‘바람의 손바닥에 올려놓는 한 생애’와 ‘맨발의 영혼’ 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 얼마나 허무한 아픔인가,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생은 한 줌의 재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풍장이어야 한다고 말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풍장은 결국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허무의 세계다. 허무는 인생의 끝인 인생무상의 허무적멸(虛無寂滅)이고 공(空)의 세계다. 불합리한 인생의 형체가 사라지고 순수 자연이나 순수 무구인 무형의 세계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시인이 생이나 죽음에 대한 아픔을 거역하지 않고, 꽃잎 지듯이 자연에 순응하려는 심미적인 아름다운 마음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이 시의 세계가 더욱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꽃의 생이나 죽음을 통해서 빠져들기 쉬운 환상이나 몽환의 세계를 기웃거리지 않고. 시인이 자신의 생으로 냉정하게 바로 돌아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풍장이라는 자연에의 귀의나 영원 무구의 세계를 소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 자신의 생에 대한 깊은 고뇌와 사색적 성찰을 통해서 생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그의 삶의 자세를 잘 읽을 수 있다.

다음은 그의 다른 한 편의 시인 ‘자카린다 2‘ 이다.
시인은 여기에서도 앞서와 같이 피 멍울 든 얼굴과 음울의 분수로 서 있는 자카린다 가로수와, 그 보라 빛 꽃잎들이풀석풀석 몸을 뒤집고 있는 보도 위를 거닐면서 차라리 피빛 보라색 같은 생의 아픔을 느끼고, 그 울분으로 목대까지 치밀어 오르는 붉은 강물을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금은 암울하고 서글픈 보라 빛 색상을 통해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의 슬픔이나 아픔을 차라리 하나의 슬픈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슬픔과 음울이 빚어내는 일종의 우련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신과 동족들의 눈물겨운 삶의 고통과 생의 슬픔과 이민생활이라는 슬픈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표현 하고 있는 셈이다.

꽃잎들 흩어져 풀석풀석 몸 뒤집고
모란각 냉면 전문집 초록색 한글 간판


푸른 이파리처럼 팔랑거리는 이국의 계단
목 울대 범람한 강물이
꾸역꾸역 바닥을 적신다

독한 위스키 같은 시간들 지나면
여린 발바닥에도 하얀 실뿌리 내릴 거라고
슬픔으로 반죽한 생의 그늘, 여물어질 가라고
터무니 없이 믿는다

보라색 핏물 가득한 보도를 따라
덫에 걸린 메마른 목숨이
받은 기침을 하는 도시의 사타구니에
구걸하는 동족의 모습에
조금 슬프고
내 모습에 더욱 슬픈
로스앤젤레스의 오월
                                            장태숙  ‘자카린다 2’의 일부<문학세계 >16호, 2004년 겨울호에서

보도 위에 수북이 떨어져 몸을 뒤집고 있는 자카린다의 처절한 생의 잔상을 밟고 시인은 현실이라고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육신으로 뼈아프게 느낀다. 그리고 그는 끝내 울분이 치밀어 올라 목 울대에 범람한 강물이 꾸여꾸역 길 바닥과 그의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고통의 붉은 강물을 밟고 있는 자신의 여린 발바닥에 흰 실 뿌리가 내리고, 슬픔으로 반죽한 생의 그늘이 여물어질 것이라고 터무니 없이 믿는다. 이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굳은 신념과 그 결실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현실의 아픔이라고 하는 시인의 생의 고통이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동족에게 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 모란각이나  냉면집, 그리고 초록색 간판과 구걸하는 동족이 그렇고, 풀석풀석 몸을 뒤집고 있는 꽃잎들도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초록색 한글 간판이란 연약한 빛깔도 아직은 연약한 우리들의 상징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느끼는 생의 슬픔이나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표현되고 있고, 시인이 느끼는 삶에 대한 의지나 미래에 대한 꿈까지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더욱 이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떨어져 죽은 자카린다의 환상적인 꽃잎들과 음울의 거리에서, 결국 시인은 가슴 깊이 느껴지는 슬픔과 아픔을 차라리 하나의 우련의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과 함께 우리 모두의 미래의 삶에 대한 굳은 의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삶의 아픔이나 슬픔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는 진정성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시를 이루는 것은 언어이고 이 언어가 잘 조화되어 나타나면 바로 좋은 시가 된다는 점과. 그래서 좋은 시는 언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시가 바로 이러한 시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꽃의 주검에 대한 위의 두 작품을 통해서 이 시인이 팽팽하게 맞들고 가는 두 세계-힘든 이민의 삶에 대한 바른 자세와 이를 언어로 형상화 하려는 미적 추구- 이 두 세계가 함께 잘 조화되어 나타나는 그의 가치 있는 시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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