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숙의 시 '주차장에서' (평론)

2006.03.08 08:43

윤관영 조회 수:442 추천:17


진공청소기처럼 훅 빨려 들어간다
위험한 삶들이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굴
원시와 문명이 합체 된 내가 흡입된다
신전의 기둥처럼 곳곳이 우뚝 선 두툼한 방패 벽 뒤
들소 길들이듯 질서정연하게 나를 주차시키고
갑옷을 벗은 내가 나를 돌아본다
수백 개의 눈동자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는
선사시대 벽화처럼 크고 작은 문자들과 화살표
그 길을 따라 걷는 열쇠꾸러미들
동굴 밖으로 통하는 모퉁이에서 신호를 쏘아 올리듯
짧은 휘파람 소리를 낸다
그 곳에 나를 두고 나온다
두고 온 나와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나
안전은 그곳에서만 유효하다
환풍 되지 못하고 눅눅한 곰팡내 번져 가는
지하 단칸방 같은 따뜻한 집
세상의 비수에 상한 몸 추스르며
또 다른 사냥감 찾아 발진을 시도 할

  -장태숙의 '주차장에서' 전문(창조문학 2004년 겨울호 수록) -    

뭐든지 일상이 되면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지만 어쩌다 겪는 일은 자못 충격적일 수 있다. 너무 알면 시가 안 된다는 말은 여기 들어맞는 말일 수 있겠다. 내겐 백화점 지하 주차 경험이 이 시의 울림과 호흡에 들어맞는다.
이 시는 대조되는 것이 많다.(물론 시인이 대조한 내용을 대차대조표처럼 가져다 붙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이 부질없을 수 있지만)대조된 것을 대비해 보는 것은 좀 흥미로운 일이다. ‘동굴/바깥세상, 원시/문명, 문자/신호, 두고 온 나/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나’가 서로 대조된다. 화자가 있는 공간이 원시시대로 설정되어서 원시적 상황이 다분해서 그렇지 대립은 비교적 분명하다.
여기서 화자는 ‘원시와 문명이 합체된 나’이다. 그런 나이기에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굴에’에 ‘나를 두고’, 즉 ‘두고 온 나’를 두고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왜냐하면
‘안전은 그곳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매력은 ‘진공청소기처럼 훅 빨려 들어간다’는 첫 구절부터 시작된다. 정말 시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가서는 겨우겨우 주차를 시키고 차가 주차된 곳의 영문표지와 숫자를 차마 적지는 못하고 잠금장치 신호를 쏜다. ‘경계의 눈빛’을 느끼기에 외려 안심되기도 한다. 상승의 입구를 향해 급히 가면서 현재적인, 혹은 다시 올 미래적인 어떤 두려움이 잊혀진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나’가 완성된다.
주차장은 ‘위험한 삶들이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굴’이지만 잠시 차가 머무르는 곳이요, ‘지하 단칸방 같은 따뜻한 집’이지만 잠시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따라서 ‘세상의 비수에 상한 몸 추스르는’ 잠시 잠깐의 쉼터가 된다. 아니다, 여기가 쉼터가 아니라 바깥세상이 전쟁터이다. 서로가 사냥감이 되는.

   - 윤관영 시인의 평론 ‘시에 말 걸기, 혹은 시비하기’ 중에서 -
       (창조문학 2005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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