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숙의 '순대국'

2008.03.18 20:32

박남주 조회 수:597 추천:12

<시 벗기기>

  장태숙의 ‘순대국’
                           박남주(시인)

돼지 한 마리 들어앉은 뚝배기
설설 끓고 있다

피비린내 자욱한 손
양념 썩썩 버무려 순대 속 채우고
집착과 탐욕
접착제로 찰싹 붙인 듯한 귀때기와
헛바람 들락날락 했을 구멍 숭숭 허파와
퍼석퍼석 양심 굳은 간과
와글와글 모여앉아 뽀얗게 우려내는
이성의 살점 발라낸 뼈다귀 국물
걸쭉한 욕망이 뚝배기에 부어진다
살아있을 때 그만큼의 거리에서
제 노릇 톡톡히 해냈을 그들
죽어 한 뚝배기 속 서로 부비며 끓어 넘치고 있다

얼큰하고 뜨거운 열기 사이
푹 찔러 넣은 숟가락에 들어앉은
붉게 물든 돼지 한 마리

-장태숙의 「순대국」(네오포엠·86(2007.1.18)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순댓국 한 그릇으로 꽁꽁 언 속을 달래
고 싶은 겨울밤이다. 뚝배기를 양손으로 들고 국물 한 사발 쭉 들
이켜면, 얹혀 답답한 속이 뻥 뚫릴 것 같다. 느글느글한 속이 개운
해질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독립기념관에 들렀다가 맛 본 병천순대를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그렇게 맛있는 순대(국)를 만나지 못했다.
고기와 순댓국을 주문했는데, 처음엔 푸짐함에 놀랐고, 두 번째는
돼지 특유의 역한 냄새가 나지 않아 다시 놀랐다. 국물까지 맛있
게 마셨던 것 같은데, 순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재미는 덤으로 얻었다.

순대의 사전적 풀이는 이렇다. 돼지의 창자 속에 쌀, 두부, 파, 숙
주나물, 표고버섯 따위를 양념하여 이겨서 넣고 끝을 동여 삶아 익
힌 음식.
그렇다면 장태숙 시인의 순댓국은 어떤지 한 번 살펴보자.
귀때기는 집착과 탐욕의 접착제로 찰싹 붙이고, 허파는 구멍 숭숭
뚫려 헛바람이 들락날락하고, 간은 양심이 굳어 퍼석퍼석하다. 이
성의 살점을 발라낸 뼈다귀는 걸쭉한 욕망과 함께 뽀얗게 우려낸
다. 살아생전 각기 제 역할을 했던 귀와 허파와 간.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이제 뚝배기에서 한데 몸 비비며 끓는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당연한 이치를 곧잘 잊어버리고 사
는 인생이다. 기껏 살아야 100년도 채 못 되는데, 한 치 앞을 모르
는 게 인생이다. 때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또 어
떤 때는 허파에 바람이 들기도 하고 구멍이 뚫리기도 하고, 한편으
로는 간이 탱탱 부어오르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불행
한 일이 내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행복
의 여신이 내 편일 것이라는 어리석음은 어쩔 수 없다.
권력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미련 없이 모두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내 목소리를 낮출 때, 맛은 상승작용을 하
리라. 서로 얼마나 잘 어우러지느냐가 맛을 좌우하리라. 내가 절대
로 놓지 않으려 힘껏 움켜쥐었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음을, 한때의
덧없는 욕망이었음을 깨달을 때 뚝배기에서 맛있게, 설설 끓으리
라.
장태숙 시인의 시 「순대국」에서 인생의 한 단면을 본다. 우리네
인생을 이처럼 불과 몇 줄로 멋지게 그려낸 시를 만나기란 그리 쉽
지 않다.
시를 읽으면 그 시인을 알 수 있다. 시를 매개로 독자는 시인과 만
난다.
내가 알던 어떤 시인은 제게 날아온 시집을 읽으며, 한 번도 본 적
이 없는 상대방 시인의 외모며 성격, 심지어 피부상태까지 맞춰 나
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실제로 경험
해 볼 일이다.
장태숙 시인을 몇 년 전 낭송회에서 한 번 본 기억은 있지만, 개인
적으로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으니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
다. 하지만 난 그가 인생을 얼마나 열심히, 멋지게, 열정적으로 살
아가고 있으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 네오포엠.100호 < 2008년 3월> -
  
-------------------------------------------------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31,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