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지친 몸과 마음, 그림으로 치유하세요

2011.07.09 00:22

강학희 조회 수:410 추천:1





< Wassily Kandinsky · Couple Riding · 말을 탄 연인 · 1906 >














 ▲ 치유 (治癒) 로서의 그림읽기



   - 이주은 박사 (미술사학가, 이화여자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치유(治癒)의 미술. →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治療)하는 것이 아닌,

힘들 때 위로(慰勞)가 되는 그림, 그림을 통한 치유는 깊은 지식을 요하는

작품 감상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그저 그림과 소통하는 방법만 익힌다면

누구든 이미지(그림)와 소통할 수 있고 이미지가 좀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림안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공감하는 순간 소통의 통로가 열린다.





사랑으로 아픈 당신에게 …



그림은 치유(治癒)의 힘을 가지고 있다.

치유는 여러가지 요소를 온전하게 통합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개인이며 집단에 속해 있다.

선하면서 악하며, 육체이며 정신이다. 자연이며 문명이다.

이렇게 분리된 자아를 내 안에 공존시키는 것이 바로 통합이다.



치유는 나를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내가 벌인 일들을 용서하고 나를 수용하는 것이 치유다.

나를 거부하고, 내안에 또 다른 나를 저어한다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한 분노를 불러온다.



치유는 내가 할 수 있다.

내 상처를 남이 다스릴 수는 없다. 내 상처를 존중하고,

내 상처와 만나기 위해 스스로 길을 나서는 것, 그것이 치유다.

통합과 나에 대한 수용, 그리고 스스로 상처와 대면하는 일,

치유를 위해 이제 우리는 그림을 본다.

그림 속에 바로 내가 있다.

그림 속의 나와 대화하며 나는 울고 웃고 편안해진다.






사랑을 주제로 한 미술가들



사랑이 예술에 주는 영향?



Wassily Kandinsky (Russian-born French Expressionist Painter, 1866∼1944)

칸딘스키.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 모스크바 출생.

자신의 예술론을 담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21)를 저술.



맨 위 그림 「말을 탄 연인, 1906」은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으로서

자신의 제자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주 로맨틱한 그림,
《말을 탄 연인》(1906) : 추상미술의 창시자로 평가되기 전의 초기 작품으로,
원색의 화려한 색채와 생동감으로 구상화와 추상화를 아우르는 칸딘스키 회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
회전 목마를 타고, 멀리 뒤쪽으론 성도 보이는 아주 로맨틱한 작품.



예술가는 물론 누구든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특히 그런 시기가

예술가에겐 어찌보면 한단계 넘어서기도 하고 더욱 창조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사랑은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창조의 원천이 되는 힘이지만 어떤 이에겐 혼란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심리면에선 영혼의 어두운 밤. 카오스의 회귀이기도 하다.

카오스 (Chaos : 그리스의 우주 개벽설에서, 우주가 발생하기 이전의 원시적인

상태. 혼돈이나 무질서 상태. 존재 이전의 미분화된 상태
)
하면 무질서라든가
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질서가 잡힌 코스모스 상태에선 오히려 다른

어떤 것이 새롭게 탄생하기 어려운데 반해,
사랑에 빠진 마음의 미분화된 상태에선 예측 불가능한 창조물이 탄생되는 시기인 것 같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예술가들이 훨씬 더 많이 다작하고, 에너지가 많이 담겨진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위 그림 「말을 탄 연인, 1906」은 마치 러시아의 전래동화를 그려 놓은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비잔틴 사원의 모자이크화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영롱한 색채와 까만 테두리가 그런 느낌을 줍니다.
한편 점을 찍듯이 그린 것이 쇠라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후기인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칸딘스키 특유의 색채감각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Vanessa Bell(1879-1961)의 The Tub  1917




바네사 벨 ( Vanessa Bell, English Painter, 1879~1961 ) 의 :

(화가,실내장식가. 예술을 실생활에 응용하는 새로운 감각을 보임)

〈욕조, 1917〉에 대한 설명?




이 그림은 목욕을 하고 있는 자아의 모습인 누드화이다.

욕조 앞에서 약간 우울한 모습으로 머리를 땋고 있는 여인의 나체가 그려진 작품.
작품에서 느끼기에 누드가 관능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씻어내고 싶은
그녀의 마음 상태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 주변의 것들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는 욕조와 물의 상징성(종교적의미의 세례같은 것)
즉 정화를 통한 치유를 상징하는 물. → 목욕을 통한 진정한 자기 회복을 의미.

그림에 그런 의미등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경험이 자기 치유의 시작이 아닐까.





로댕 (Rodin,1840~1917) 과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1864~1943)

까미유의 작품세계가 로댕을 능가할 자질을 보일 무렵,

로댕은 그녀를 떠나 자신의 오랜 연인인 로즈뵈레의 품으로 돌아간다.



로뎅과 끌로델의 사랑이 표현된 작품?



사랑에 상처받고 절규하는 자아를 표현한 듯한 끌로델의 작품.

로댕의 연인이며 조각가인 끌로델의 사랑은 행복의 순간도 있었지만
갈등하고 절규하는 비극적인 삶이었다.



《애원, 1899》- 까미유 끌로델 : 상처 입은 여인의 절규하는 시선을 표현한 작품

까미유 끌로델

까미유 끌로델 · Camille Claudel,1864~1943

까미유 끌로델 · Camille Claudel



《키스, 1886》- 로댕 : 로댕이 제자이자 연인인 끌로델과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 제작한 대리석 조각.
남녀가 얽겨 있는 모습이 아주 로맨틱한 작품이다.





로댕의 키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1884~1920)


초상화와 누드화를 주로 그린 이딸리아의 화가, 방탕한 생활에 젖어 살던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죽자 그의 연인 잔느 (Jeanne Hebuterne,1898~1920)가
투신 자살했다는 일화가 전함.





Jeanne Hebuterne




피카소의 사랑이 표현된 작품?



《게르니카, Guernica, 1937》- 피카소 :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독일의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된 에스파냐의 북부도시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린 벽화.





Jeanne Hebuterne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 와 도라 마르(Dora Maar,1907~1997)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연인이었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는 피카소가

《게르니카, Guernica, 1937》를 그리는 데에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한 여러 점의 초상화가 있다. 피카소는 그녀의 지적이고

혈기 왕성하고, 다혈질이고, 저돌적인 면모들이 절규하는 이미지들과 잘 밎는다고
생각하였다. 피카소의《게르니카》그림의 오른쪽 끝에 그려진 도라 마르. 즉

전쟁의 비극 속에서 절규하는 인간의 모습은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하였다.







피카소와 도라 마르










그림 속에 표현된 자기애 (自己愛)에 대해?



거울이 가지는 상징성

1. 자기애 (自己愛).   2. 영혼과 육체의 조화

→ 거울이 가진 상징성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그려진 서양 미술.



나르시스 (Narciss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에코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네메시스에게 벌을 받아,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여 그리워하다가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고 한다.





Waterhouse - Echo and Narcissus 1903
    Waterhouse · Echo and Narcissus, 1903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게 결국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걸로

내가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사람에게 내 상(image)을 막 쏘아주고 싶은 생각이 더 많은 것 같다.
상대방이 내 거울이 되어 상대방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고 그 사람이 맨날 나만 봐주기만 바라는 거울처럼
그 거울에 내가 안 비치면 분노하곤 한다. 결국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는 것이 사랑인 것 같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상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아닐까. 그

거울이 자기애(自己愛)의 출발! 애초에 그 씨앗부터 잘라버리면 사랑은 할 수도
없는 것이된다.
옛날 엄격한 수녀원에서는 아예 거울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






사람 속에 당신이 있습니다.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Belgian, 1860~1949)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 Portrait of the Artist Surrounded by Masks, 1899



중앙에 있는 단 한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어린 시절 앙소르의 어머니는 카니발 가면들을 파는 기념품가게을 운영하고

있었다.앙소르는 가게에서 그 가면을 써보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자랐다.

사람들이 가면을 썻다가 벗을 때면 좀전에 밋밋하던 그 사람은 사라지고 가면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어져 있는 듯 여겨졌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얼굴들이 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드러져 나온다는 것을 어린 앙소르는 발견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가면(Masks,假面)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앙소르의 작품 속 자신은 맨 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 속 얼굴들인 것이다.






제임스 앙소르 -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캔버스에 유화 120x80Cm.
    제임스 앙소르 -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캔버스에 유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아래 두 작품에 대한 설명?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1848~1894) -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사실성이 강한 작품을 많이 남겼고 서민층의 풍속도 및 풍경화를 즐겨 그림.



《창가의 남자, 1876》 카유보트 - Young Man at His Window, 1875.


  창가에 서서 저 아래 거리에 지나가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작품.
그 여인과 남자의 관계는 밝혀진바 없지만 만약에 그게 관계라고 한다면
카유보트의 작품 속 남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상당히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과
그 여자가 매일 그 시간에 지나가는데 이 남자는 창 밖의 여자에게 호감을 갖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을 느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그림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술이 물질이상으로 색채가 입혀진 평면을 넘어서서
그림이 우리에게
→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준다고,
또한 마음 속 상상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된다.






Caillebotte, Gustave - Young Man at His Window, 1875, Oil on canvas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 독일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풍광을 소재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 1818

위대한 자연 앞에서 존재의 보잘 것 없음을 느끼는 인간의 고독감을 표현한 작품.





Friedrich, Caspar David -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 1818, Oil on canvas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 - 미국의 화가,

  사실주의적 태도로 시가지(市街地)나 건물을 즐겨 그림.



《나이트 호크》 : Nighthawks, 1942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소외를 다룬 호퍼의 작품 中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 황량하면서도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있는 그림인데,

  자기만이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있다면 그림움은 상처가 아닌 행복이 아닐까.





Edward Hopper - Nighthawks, 1942, Oil on canvas





 (1844~1910)




Rousseau, Henri - The Sleeping Gypsy, 1897, Oil on canvas


집시소녀와의 대화



《잠든 집시》 : The Sleeping Gypsy, 1897

원시적 생명력을 예찬한 야수파 화가인 앙리 루소의 작품.

만돌린을 연주하며 방랑하는 흑인 여인이 피로에 지처, 사막 한가운데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다. 지팡이를 손에 꼭 쥐고 누운 소녀의 피곤한 모습이 낯설지 않다.
잠자리에 누워 뭔가를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은 사랑, 집착, 고독과 슬픔, 상처...
그런 것들이겠지.
허지만 이 지팡이는 그런 것들이 아닌, 오늘 하루 걸어올 때 그녀를 지탱해 준 친구이다.
그리고 집씨소녀 곁의 사자는 야생 밀림의 수호자이다. 이 소녀를 지켜주는 존재이다.
소녀 곁의 만돌린이란 악기는 몸체 모양이 마치
여성의 자궁처럼 생겼다.
만돌린을 연주하면 만물이 소생하는 느낌을 주는 생명수같은 것이다.
지나온 길이나 앞으로 가야 할 세상 삶은 쉽지가 않지만 지금처럼

달빛이, 그리고 수호자인 사자가 지켜줄 것이다.
또 그녀가 가진 빈 호리병에는
밤사이 내린 이슬로 가득 채워 질 거고...



기적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다. 달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달이 없는 건 아니다.
잠시 숨은 거지... 숨어서 우릴 지켜본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 잠든 집시소녀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평화로운 잠이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줄 거라고 생각한다.




앙리 루소가 그린 《잠든 집시》는 기하학적인 구성과 선명한 푸른 색채,

몽환적인 분위기를 소박한 화풍과 대담한 구도로 표현해낸 작품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소녀가 지팡이를 손에 쥔채 깊은 잠에 빠져있고, 야생의

수호신같은 사자가 그녀에게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달빛도 그녀에게 힘을 주듯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내일도 걸어가야 하므로 손에는 지팡이를 꼭 쥐고 있다.
옆에는 여성의 자궁같은 창조력을 상징하는 만돌린이 있고, 그 옆엔 지혜의 샘과 관련되는 호리병이 밤사이 이슬로 가득차서
이 모든 것들이 그 소녀에겐 내일은 힘찬 여정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어떻게 해야 예술과 가까워질 수 있는지?



미술관에 갔을 때 예술작품을 예술로서 '감상'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라!

그림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꿈, 상상을 표현한 것.

허구적인 세계를 그린 것이므로 → 함께 공유할 수 잇는 꿈과 상상의 세계가

그림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며 그림이 훨씬 가까이 닥아올 것이다.





그림에 마음을 놓다.



낡고 칙칙한 지하철역에서 이름도 모르는

아마추어가 연주하는 흔해빠진 '장미빛 인생'에

이름을 알 수 없이 심금을 울리더니

눈물까지 나려고 했다.

감동은 이런 곳에도 숨어 잇구나.

행복은 언제나 의외의 순간

예기치 못한 곳에서 기지개를 펴며

모습을 드러내는가 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10년 후 물어물어 다시 이 연주가를 찾아온다 한들

지금과 똑같은 느낌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행복은 하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색갈이 달라지는 카멜레온
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구하고 마침내 성취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하고 매순간 경험하는 그 무엇이니까.



- 이주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 中



그림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

일상 속에서 매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길...

그림은 상상(imagination)의 원천이 되는 이미지(image)

→ 그림을 통한 행복한 상상이 삶을 행복하게 한다.





- 그림의 말 '괜찮아, 괜찮다'

- 이주은 (이화여자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검은 선들》 (1912) : 선명한 색채를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구사하며

   추상표현주의를 관철한 칸딘스키의 대표작 중 하나.




우리는 칸딘스키를 추상미술가로 알고 있습니다.

갖가지 색채의 선과 점, 그리고 원이나 삼각형같은 도형들로 채워진 그림들을

기억할 겁니다. 그는 1910년 이후 거의 완전한 추상 미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추상 미술을 지향했던 것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가치는

가시적인 세계의 <재현을 통해서 성취되기 보다는 추상적 구성과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칸딘스키는 1886∼92년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어느날 파리를 방문하여 프랑스 미술을 보게 된 후 법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으로 떠납니다.



1889년 볼로그다주로 농촌 조사를 나갔을 때 러시아 민속미술에 감명을 받았고,
1895년 프랑스 인상파전에서 C. 모네의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에스토니아의

도르파트대학 법학교수로 초빙되었으나 회화에 전념하기로 결심, 뮌헨으로

가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1900년 뮌헨아카데미 F. 슈투크에게 사사하였고

1901년 예술가집단 <팔랑크스>를 창립, 그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네덜란드·이탈리아·튀니지·크림 반도 등을 여행한 뒤 A. 야블렌스키·

A. 쿠빈 등과 신예술가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무렵 작품은 오로지 자연에 입각해 그려졌으나 자연이 주는 정감을 <마음으로> 그렸으며, 터치와 색채를 강조하는 주관적 경향이 강하였다.



그가 추상에 접근한 것은 1908년 G. 뮌터와 함께 뮈르나우에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저녁 무렵 화실로 돌아온 그는 벽에 걸린 한 작품이 내적인 광휘로 빛나고,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형상과 색채만으로 그림이 성립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는 곧 그림이 거꾸로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뒤로 대상이
불필요함을 느껴 모든 표현을 색채에 맡기기 시작하였다.



《종탑이 있는 풍경(1909)》에서는 대상이 거의 본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뒤이어 1910년 《즉흥곡》 《콤퍼지션》의 수채연작에서 최초로 순수한 서정적 추상화를 그렸고
1911년 유채추상화를 그렸으며 새로운 회화론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1912)》을 집필하여 뮌헨에서 출판하였다.



또한 F. 마르크와 신예술가협회를 탈퇴하고 함께 <청기사(靑騎士)>를 창립하였다.
이는 《연감》 출판을 목적으로 한 편집부로서, 1912년 5월 연감이 출판되었지만,
1911년과 1912년에 조직한 전람회는 드레스덴의 <다리파[橋派(교파)]>에 이은 독일표현주의의 봉화가 되었다.



1912년 베를린의 <폭풍우>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표현주의운동도 잠시 후퇴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대혁명 때에는 예술위원·
아카데미 교수를 지내고,
1921년 예술과학아카데미 창립을 도운 뒤, 그 해 말에
고국을 떠나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종래의 유동적 터치와 형태 대신 상징·기호로서의 확정적 형태를 구사한
서정적 기하학주의 양식이 시작되었다. 1926년 《점·선·면》을 간행하였다.
바우하우스와 함께 데사우·베를린으로 옮겨갔고,
1933년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뒤 파리 변두리 뇌이쉬르센으로 이주하여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작풍도 미세한 유기적 형태와 기묘한 상형문자풍의 형태를 구성하는 최후의
양식을 전개시켰다.
그의 작품과 그 새로움이 완전한 평가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일이다.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의 화가. 모스크바 출생.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배웠으나,

1895년 인상파전을 보고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인
19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그 전후에 이탈리아· 튀니지·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908년 이후 뮌헨 · 무르나우에 살면서, 19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집단인 ‘청기사(靑騎士)’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0년에 그린 [기수]가 제작되던 때를 같이해 수채와에 의한 추상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 자신의 예술관을 이론적으로 뒷바침 해 줄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란 책을 1912년에 출판한다.
이후 그는 거의 완전한 추상 미술을 하게 되며 추상 미술을 지향했던 것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가치는 가시적인 세계의
재현을 통해서 성취되기 보다는 추상적 구성과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명력있는 표현성을 특징으로 하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구체적인 대상을 배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체를 연상시키며 그가 추구한 것은 회화 그 자체이며 여기서 정신적인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정신적인 세계는 '절대' 혹은 '추상'이라는 성격의 회화를 형성하게 된다.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서 완전히 제거한 칸딘스키는 이 같은 실물 주제의 포기를 정당화하며 회화의 자율성을 부르짖었다.
무형의 주제로부터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하며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칸딘스키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대신 대상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예를 들어 나무를 보았을 때, 화가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평화라고 가정하자.
이 때 평화스럽다는 내적인 감동을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무라는 구체적인 대상은 없어지고 화가의 감정만이 남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신 사물을 본 그 순간,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 충실했던 화가였던 것이다.



결국 그의 화폭 위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그려지는 대신 자신의 감정만을 색채와 선으로 남긴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대상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화가가 자신의 감정과 정신을 표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화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만을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는 의미 없는 낙서나 얼룩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을 파악한 칸딘스키는 색채를 통해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또한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했다. 심지어는 “색채는 건반이다.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음악이 화음만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나 선만으만으로 대상을 표현해 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 (처음 바이마르,
1925년부터 데사우)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만년에는 1933년부터 프랑스에 정주하여,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 살았으며,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21) 《점·선·면》(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쏘스제공: 유봉희시인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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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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