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연-김선우
2007.04.11 04:43
강원도 정선
어라연 계곡 깊은 곳에
어머니 몸 씻는 소리 들리네
-자꾸 몸에 물이 들어야
숭스럽게스리 스무살모냥...
젖무덤에서 단풍잎을 훑어내시네
어라연 푸른물에 점점홍점점홍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
어라연 깊은 물
구름꽃 상여 흘러가는
어라연에 나, 가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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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내 시의 한 순간;
당신, 어라연에 가보셨나요. 동강의 젖줄이 풍요롭게 소(紹)를 이루는
어라연 깊은 계곡에서 나는 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인간의 기억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삼라만상을 길러온 어머니.
아름답고 고독한 자연이라는 어머니 앞에 나는 오래도록 오체투지 하였습니다. 어머니 앞에 부려놓고 자연이 스스로 나의 거짓된 빛깔들을 거두어갈 대 까지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림의 어느 한 순간에서 순간으로 유영하는 끊임없는 유동성의 빛깔들이 심연에 닿는군요.
빛과 바람의 주름을 따라 달패이관처럼 이어지는 길, 처음이며 끝인 그 길에 아득하게 열린 물의 자궁 속으로 내가 흘러듭니다.
둥글고 유연한 물의 자궁.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한 어머니를 만납니다.
한숨과 눈물 많은 내 어머니, 어라연 깊은 계곡은 늙고 병든 한 어머니를 맞아 고즈넉이 그녀의 몸을 씻겨주고 있었습니다.
푸르게 출렁이는 양수. 어라연에 들면 내 어머니도 한 따님일 뿐이지요. 어머니는 두근거리며, 부끄러워하며, 젖무덤에 아름답게 돋아난 단풍잎을 훑어냅니다. 어라연 푸른 물에 점점홍점점홍.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붉디붉은 단풍잎 위에 이제 막 태어난 바람이 머뭅니다. 옹알이를 합니다. 지극한 통과제의를 거쳐 비로소 한 호흡이 시작되고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빗장뼈에 손가락을 대봅니다.
젖무덤엔 다시 붉은 딱정이가 앉고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한잎의 계절이 움을 틔우겠지요.
누구도 어머니들의 고적한 목욕을 방해해선 안되는 그 계곡이 지금은 상거래와 레저의 이름으로 북적대고 있다지요.
물과 땅과 어머니를 사고 팔고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속된 시대에 어쩌면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의 상여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명과 욕망의 이름표를 버리지 않고는 당신과 나, 어라연에 영영 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가서는 안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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